디지털 기술과 공예의 경계를 넘나들며 도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는 임재현 작가.

종이를 접은 듯 날렵한 면과 매끈한 표면. 임재현 작가의 작업은 도자라는 사실이 낯설만큼 유동적인 움직임을 품고 있다. 지난해 공예트렌드페어와 렉서스 크리에이티브 마스터즈 파이널리스트를 통해 주목받은 그는, 디지털 기술과 수공예의 접점에서 도자의 새로운 형태 가능성을 탐구하는 세라믹 아티스트다. 작업의 출발점은 ‘플리츠 Pleats’ 구조다. 접힘과 펼쳐짐이 반복되는 주름 패턴은 도자의 형태 변주를 고민하던 그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계기는 패션 브랜드 이세이 미야케의 플리츠 컬렉션이었다. “옷이 바닥에 놓여 있을 때는 기하학적인 규칙을 따르지만, 몸에 걸치면 움직임에 따라 곡선으로 변하죠. 그 과정에서 신체와 옷 사이에 새로운 공간이 생기는데, 그 장면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기하학적 질서와 유기적인 흐름이 동시에 공존하는 이 구조를 도자로 옮긴다면 어떤 형태가 가능할지, 그 질문에서 지금의 작업이 시작됐다.



정교한 기하학 구조는 3D 모델링에서 시작한다. 플리츠 패턴을 기반으로 제어점을 비틀거나 당기며 직선이 곡선으로 전환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이후 이 모델을 바탕으로 몰드를 제작해 슬립 캐스팅으로 형태를 구현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탈형 이후다. 하나의 몰드에서 나왔지만 손으로 재단하고 해체하고 다시 조합하며 각기 다른 형태로 재구성한다. 디지털 기술로 출발하지만, 마지막에는 공예의 영역으로 돌아오는 셈이다. 수학적 질서로 시작된 형태가 공예적 프로세스를 통과하며 미세하게 어긋나고 변주되는 과정, 그는 이를 ‘유연한 기하학’이라 표현한다. 정확한 설계와 예측 불가능한 변형이 공존하는 과정에는 높은 수준의 통제와 노동이 따른다. 재단과 연마를 거치며 형태를 손으로 다듬고, 표면의 주름 하나하나를 사포질해 정제된 상태로 끌어올린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형태의 출발점이 끝까지 읽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저에게 중요한 건 ‘얼마나 새로운가’보다 ‘얼마나 분명한 기준에서 벗어났는가’예요. 원형이 명확할수록 변형의 방향과 정도도 더 선명해지거든요.” 그릇이나 기하도형처럼 익숙한 형태를 출발점으로 삼되, 의도적으로 비정형으로 어긋나게 만드는 이유다. 관객은 형태를 즉각적으로 인지하는 동시에 그 이해가 흔들리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이 미묘한 어긋남이 작업에 긴장과 깊이를 더한다. 완전히 추상적인 형태보다 오히려 더 많은 감각적 해석을 유도하는 이유다. 공예트렌드페어와 렉서스 전시를 통해 관객과 직접 만난 경험도 인상 깊게 남았다. ‘이게 도자인지 모르겠다’, ‘종이처럼 보인다’는 반응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일반 관객들이 제 작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늘 궁금했어요. 두께감과 얇게 빠지는 부분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데, 그런 의도가 자연스럽게 전달된 것 같아 굉장히 기분 좋은 순간이었습니다. 동시에 제 작업이 도자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조금은 흔들면서, 낯설지만 재미있는 지점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어요.”


마치 대리석처럼 매끈한 표면을 위해 사포질을 여러 번 반복하며 표면을 마무리한다.
올해 그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리는 국제 공예 비엔날레 ‘호모 파베르 Homo Faber’에 출품할 계획이다. 전 세계 동시대 공예 작가와 장인들의 작업이 모여 ‘손으로 만든다는 것’, 그리고 인간과 기술, 재료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자리다. 지난해 참가한 가나자와 공예 트리엔날레 이후 두 번째 해외 전시로, 다른 문화권의 관객에게 자신의 작업이 어떻게 읽힐지 점검하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하다. “공예를 기능이나 전통으로 한정하지 않고, 동시대적인 조형 언어로 보여주는 전시라고 생각해요. 제 작업이 한국적인 조형으로 읽힐지, 혹은 국적을 넘어 좀 더 보편적인 언어로 받아들여질지도 스스로 궁금한 지점이에요.” 임재현의 작업은 하나의 형태로 고정되지 않는다. 정교하게 설계된 기하학은 손을 거치며 어긋나고, 도자는 종이처럼 접히며 예상 밖의 표정을 드러낸다. 그가 만드는 것은 완결된 조형이라기보다 통제와 이탈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하는 상태에 가깝다. 디지털 기술로 시작해 손의 감각으로 마무리되는 그의 도자는, 오늘날 공예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묻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