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예술

걷는 예술

걷는 예술

요즘 같은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작은 성취감일지도 모른다. 이미 걷기를 통해 예술을 완성한 이들도 있다.

 

리차드 롱, 독일 클레베 미술관 전시. ⒸCC(Creative Commons)

 

리차드 롱, 포르투갈 Mario Sequeira 갤러리 ⒸGaleria Mario Sequeira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고민이 있을 때 일단 걸어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독일 하이델베르크에는 칸트가 시간을 맞춰 걸었다는 ‘철학자의 길’이 있는가 하면, 스티브 잡스는 산책 회의를 즐겼으며, 의사는 걷는 것만으로도 심장 혈관 운동이 가능하고, 뼈와 관절을 튼튼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실내에만 있을 수 없는 요즘이야말로 걷기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는 기회다. 리처드 롱 Richard Long(1945~)은 걷기를 통해 작품을 만든다. 대학 시절 그의 첫 작품은 숲속의 자주 걷는 땅 위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길을 사진으로 남긴 것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걷기의 예술은 5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걸어간 길의 흔적의 흔적(사진), 걸으면서 길에 남긴 흔적, 주운 돌멩이와 나뭇가지를 재료 삼아 땅에 가지런히 쌓아놓은 더미 등이 작품이다. 동그랗게 또는 사각형으로 각을 맞춰 나란히 배열하는 일은 상당한 정성과 숨 고름이 필요하다. 어렸을 때 누구라도 해보았겠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다. 생산과 효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시대에 누가 하릴없이 길을 걸으며 돌멩이를 줍는가?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작품이 경탄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다. 심지어 그는 8일 동안 240마일을 걸은 적도 있다. 그는 걷기 때문에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작품을 만들 장소를 찾기 위해 걷지만, 결국 걷기가 작품을 만들 장소로 데려다 주기 때문이다. 걷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풍광, 돌, 나무 뿌리 등은 애초 계획에 없었던 것들이지만 비로소 그것들로부터 예술이 시작된다.

 

자코메티, 프랑스 매그 파운데이션 Ⓒ김영애

 

앤서니 곰리, 영국 크로스비 비치 Ⓒ김영애

 

 

우연한 만남과 사건들이 삶을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심지어 리처드 롱은 가서 보기 어려운 외진 곳에도 작품을 만든다. 아무도 볼 수 없고 또 언젠가는 사라져버릴지 모를 조각이다. 아깝다고? 그러나 바로 이런 내려놓음이 그를 자유롭게 한다. 걸을 수 있는 한 예술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단한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 걷기의 매력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걸을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또한 살아 있는 한 걷기를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무려 1천2백억원에 판매되어 화제를 모은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이 주는 감동도 바로 거기에 있다. 자코메티는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장치를 하기도 했다. 나무 아래에서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두 인물은 고도의 심부름꾼이 남긴 메시지에 희망을 건 채 고도가 곧 올 거라는 희망으로, 고도가 대체 언제 올 거냐고, 만약 고도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끝없는 만담을 펼친다. 코로나19가 대체 언제 끝이 날지, 백신 개발 소식을 되풀이하는 요즘 뉴스도 이와 다르지 않은 듯하다. 기다림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자유는 걷는 것이다. 앤서니 곰리가 바닷가에 심어놓은 조각, 도시의 빌딩 위에 심어놓은 조각은 당신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는 위안이다. 누군가가 하늘 위에서 나를 보고 있고, 돌아보면 내 옆에 동료가 있다는 믿음이다. 고도가 올 때까지, 가을을 넘어 내년까지 걷기를 멈추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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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애(이안아트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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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아름다움

동서양의 아름다움

동서양의 아름다움

<시리얼> 매거진의 공동 창업자 로사 박이 기획한 프란시스 갤러리는 1800년대 지어진 건축물이 주는 역사적 의미에 동서양을 아우르는 현대 작가의 작품이 더해져 더욱 흥미롭다.

 

 

영국과 한국의 미학을 아름답게 융합시킨 프란시스 갤러리 Francis Gallery는 런던에서 2시간가량 기차를 타면 다다르는 도시 바스 Bath에 자리한다. 바스는 고대 로마인이 건설한 온천 도시로 유서깊은 역사와 문화를 자랑해 수많은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곳이다. 프란시스 갤러리는 영국 감성의 라이프스타일 잡지인 <시리얼 Cereal> 매거진의 공동 창업자인 로사 박 Rosa Park이 기획한 곳으로, 그녀가 잡지를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계획하며 꿈꿔왔던 공간이다. 로사 박은 서울에서 태어나 캐나다와 미국, 영국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언제나 그녀의 뿌리를 단단한 기반으로 여기며 한국의 예술과 전통, 미학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고 한다. 프란시스 갤러리는 2018년 가을, 런던 말리본 지역에서 팝업 전시를 선보이며 많은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이후 영국과 한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는 물론 다재다능한 신진 작가를 발굴하며 다채로운 전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매력적인 공간으로도 주목 받고 있다. 바스 지역의 특색과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1800년대 조지안 건축물에 자리 잡고 있으며 디자이너 프레드 릭비 Fred Rigby와 협업해 인테리어를 완성했다. 은은하고 반듯한 감성으로 누군가의 집에 들어온 듯 포근함이 감도는 이곳은 로사가 직접 셀렉트하고 구입한 앤티크 가구와 프레드 릭비가 갤러리를 위해 자체 제작한 가구로 채웠다. 코로나19로 인해 영국 역시 많은 갤러리에서 온라인 전시를 계획하고 있는 요즘, 프란시스 갤러리는 공식 웹사이트를 보다 활발하게 운영하며 온라인을 통한 작품 구입 시스템을 구축해나가고 있다.

add 3 Fountain Buildings Lansdown Road Bath, BA1 5DU
tel 012 2544 3220
web francisgallery.co

 

은은한 크림 베이지 톤의 벽과 어두운 원목 마루로 따스한 분위기를 연출한 갤러리 내부.

 

동양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허윤영 작가의 작품과 앤티크 가구가 한테 어울러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1800년대 지어진 건축물에서 세월의 멋스러움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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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그래퍼

Rory Gard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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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민 (런던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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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ci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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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가구 브랜드 바치 포 칠드런과 올해 초 새롭게 론칭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바치 BFD가 1970년대 지어진 가정집을 개조해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바치 포 칠드런은 색상과 사이즈, 형태 등 다양한 옵션이 있어 사용자의 취향에 맞춰 주문 제작이 가능하다.

 

두 개의 브랜드를 이끌고 있는 이하연 대표.

 

아담한 정원과 삐걱대는 옛날식 나무 계단에서 왠지 모를 정감이 느껴졌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가구 브랜드의 쇼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이곳은 아동 가구를 제작하는 바치 포 칠드런과 올해 1월 새롭게 론칭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바치 BFD의 쇼룸이다. “단순히 가구를 판매하기 위한 쇼룸의 개념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는 집처럼 따스한 곳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2014년에 시작한 바치 포 칠드런은 길 건너에 쇼룸이 있었는데, 바치 BFD와 함께하기 위해 이곳으로 옮겼어요.” 바치의 이하연 대표가 이곳으로 자리를 잡은 계기를 설명했다. 사실 바치 BFD는 유목을 뜻하는 노마딕 쇼룸으로 운영되며 고정된 장소 없이 개성이 뚜렷한 전시를 통해 주기적으로 쇼룸을 운영해왔다. “가구는 어떤 공간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어요. 바닥이 나무일 때의 느낌과 타일일 때 주는 분위기가 다르고, 햇빛이 들 때와 안 들 때 보여지는 모습에서 확연한 차이가 나죠. 재미있는 공간을 찾아다니면서 전시를 진행했고, 그것을 기록 형태로 남겨 온라인에 업로드하는 방식으로 운영해왔어요. 하지만 기존의 바치 포 칠드런 쇼룸도 굉장히 작았기 때문에 보여지는 것이 한계가 있더라고요. 우연히 흔치 않은 분위기의 이곳을 찾았고, 바치 BFD의 오프라인 쇼룸도 함께할 수 있는 바치 하우스를 오픈할 수 있었어요.” 이미 상가가 밀집한 서울숲에 비해 1970년대 지어진 이 주택은 집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원했던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1970년대 지어진 가정집을 개조해 곳곳에서 예스러움이 묻어난다.

 

심플하지만 디테일이 살아 있는 디자인이 특징인 바치 BFD는 주거 공간은 물론 상업 공간에서도 잘 어우러진다.

 

“ㄷ자의 마을 형태를 이루고 있어 깜끔하게 외관을 고치는 것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어요. 1층과 2층 사이에 1.5층이 있는데, 이런 구조도 굉장히 드물어서 마음에 들었어요. 독특한 구조와 1970년대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계단과 문 등은 최대한 보존했어요. 1층에 있는 주방도 남겨두고 아웃도어 가구의 출시를 앞두고 있어 작은 정원도 같이 활용하면 좋겠다 싶었죠.” 이하연 대표가 설명했다. 바치 포 칠드런은 아이용 침대부터 소파, 테이블, 의자, 베딩, 월 데코를 비롯해 다양한 리빙 소품을 판매하며 소비자의 취향에 맞춰 주문 제작 방식으로 운영된다. 아동 가구의 특성상 컬러풀한 제품이 주를 이루고 있어 바치 BFD는 멀리서 보았을 때 바치 포 칠드런과는 결이 다르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바치 BFD는 ‘밸런스 바치’를 모토로 두 브랜드 간의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이들 가구와도 무리 없이 어우러질 수 있도록 자재의 색상이나 마감 방식 등의 디테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모서리가 만나는 부분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심플하지만 디테일이 살아 있는 방향을 추구한다. 또 인센스 홀더와 테이블웨어 등의 소품을 늘려 전체적인 라이프스타일 제품을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바치는 순한글로 장인을 뜻해요. 쇠를 다루는 사람은 쇠 바치, 이런 식으로 ‘장이’처럼 옛날에는 흔히 사용되었죠. 이름이 지닌 의미처럼 저희는 각 재료의 특성을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기술자분들과 협업해 오래도록 향유할 수 있는 디자인 제품을 만드는 것이 목표예요.” 단지 바치 하우스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숨어 있는 공간을 찾아다니며 발길이 많이 닿지 않은 곳에서의 전시를 계속해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U자형 개체가 서로 맞물려 포개지는 형태가 매력적인 위빙 사이드 테이블.

 

숲속의 야생 버섯을 연상시키는 인센스 홀더.

CREDIT

에디터

포토그래퍼

이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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