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LCE&GABBANA IN HOUSE

베니스에서 공개한 돌체앤가바나의 까사 컬렉션

베니스에서 공개한 돌체앤가바나의 까사 컬렉션

돌체앤가바나가 지난 8월, 베니스에서 최초 공개한 까사 컬렉션을 만나볼 수 있는 까사 스토어를 오픈한다.

돌체앤가바나가 지난 8월, 베니스에서 최초 공개한 까사 컬렉션을 만나볼 수 있는 까사 스토어를 오픈한다. 각각 라노 코르소 베네치아 7번가와 비아 두리니 23번가에 오픈하는 까사 스토어는 각기 다른 지향점을 지닌 것이 특징. 코르소 베네치아 7번가에 위치한 까사 쇼룸의 경우, 쿠션이나 프린트 퀼트, 무라노 라스와 시칠리아 세라믹 접시 등의 인테리어 소품이나 테이블웨어가 중점적으로 비치되어 있다. 이와 함께 돌체앤가바나 특유의 화려한 색채와 패턴을 입은 향초와 목제 장식도 만날 수 있다. 비아 두리니 23번가에 위치한 까사 스토어에서는 럭셔리 리빙 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탄생한 웅장한 패브릭 소파부터 오크 테이블, 바 캐비닛을 아우르는 다양한 캐비닛까지 돌체앤가바나 스타일로 완성한 가구를 둘러볼 수 있다. 돌체앤가바나 DNA와도 같은 레오퍼드, 지브라, 카레토, 블루 메디테라네오 테마 등으로 탄생한 가구와 라이프스타일 아이템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듯.

WEB www.dolcegabb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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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앤 크래프트의 원조, 윌리엄 모리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열리는 윌리엄 모리스의 전시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열리는 윌리엄 모리스의 전시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윌리엄 모리스의 전시가 6월 말까지 진행된다. 그는 기계에 맞서 수공예의 예술적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아트 앤 크래프트 운동의 창시자다.

윌리엄 모리스의 53세 초상 사진. photo Frederick Hollyer. © Wikimedia

최근 불고 있는 뜨거운 리빙 열풍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인물 중 한 명이 윌리엄 모리스 William Morris(1834~1896)다. 그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문인이자, 사회 운동가으며, ‘아트 앤 크래프트 운동 Art and Craft Movement’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 기계화가 도입되자 기계로 만든 조악한 제품이 아름다운 수공예 작품을 대체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다시 중세 시대의 수공예 길드 시대로 돌아가 생활과 예술이 결합되는 아름다운 삶을 꿈꾼 이상주의적 운동이다. 그는 일명 레트 하우스를 직접 지었고, 예술가 친구들은 가구 및 천장에 벽화를 그려주었다. 이 집을 출발로 1861년 모리스는 에드워드 번 존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피터 폴 마샬 등 동료 예술가나 아내와 함께 모리스앤코 Morris&Co. 회사를 설립해 장식 미술을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다양한 제품을 만들었다.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아름다운 도안을 바탕으로 태피스트리와 벽지를 만들었고, 성당의 스테인드라스 장식을 맡았다. 디자인과 생산이 분리되어서는 안 되고 디자이너가 장인으로서 제작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직접 제작에도 참여했고 염색, 자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과거의 제작 방식을 복원하여 적용하고자 했다.

‘블랙손’ 1892년, 존 헨리 데일 디자인, 모리스앤코 런던 제작, 제프리앤코 런던 인쇄. Gift of Crab Tree Farm Foundation. ©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The Day Dream, 1880. © Google Art Project

그러나 시대는 달라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악했던 기계 제품은 점차 뛰어난 품질을 갖추게 되었고, 가격도 저렴해진 반면 수공예 제품은 제작 시간도 오래 걸리고 오랜 배움과 숙련의 과정을 견뎌내야 하는 장인들이 사라지면서 소수의 부유층만을 위한 장르로 남게 되었다. 회사가 성장할수록 노동자 계급에 대한 연민을 갖고 있던 사회주의 성향의 모리스에게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는 마음에 맞지 않는 불편한 것이 되었다. 모리스의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것은 모리스 컴퍼니를 유지하면서 병행한 다양한 고전 신화의 번역과 시작 그리고 사회주의 활동이었다. 게다가 그의 친구이자 동료던 로제티가 사별한 후 자연스럽게 그의 레드 하우스에 눌러앉고 주변에서 함께 일하면서 모리스의 아내 제인과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해야 했다. 그녀는 가난한 하층민 집안의 딸로, 연극 무대에서 선 그녀의 미모에 반한 윌리엄 모리스의 구애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연극을 함께 본 동료 예술가들도 그녀를 모델이자 뮤즈로 수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이들 ‘라파엘 전파’의 작품은 오늘날 유수의 미술관에 남아 있어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다. 똑똑했던 제인은 금세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배웠고, 피아노와 세련된 매너 등 각종 교양을 갖춰 사교계의 여왕이 될 만큼 신분상승을 이뤘다. 그녀의 흥미로운 삶은 훗날 오드리 헵번이 주연을 맡은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모델이 되기도 한다.

‘포모나’ 1882년, 에드워드 번 존스 및 존 헨리 데일의 도안을 바탕으로 멀톤 수도원 타피스트리에서 발터 테일러 및 존 키스가 직조. ©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아트 앤 크래프트 운동은 모리스의 사망과 함께 현실에서는 부잣집 도련님의 이상주의적 운동으로 끝났지만, 이후 바우하우스와 수많은 디자인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모리스앤코 컴퍼니도 1940년 문을 닫았지만 이들의 저작권을 물려받은 사업체는 지속적으로 라이선스 사업을 하고 있어 오늘날에도 모리스앤코 제품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1955년 윌리엄 모리스 소사이어티가 재탄생하면서 이들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데 애쓰고 있는데, 주요 원작 40여 점을 모은 전시회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오는 6월까지 열릴 예정이다. 직접 가보지는 못해도 공예와 예술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인 현상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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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애(롯데백화점 아트 콘텐츠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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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천사의 시

독일 미술가 요린더 포그트의 작업실에서 만난 신작

독일 미술가 요린더 포그트의 작업실에서 만난 신작

독일 미술가 요린더 포그트의 신작을 베를린 작업실에서 만나보자. 그녀의 작품은 음악에서 감을 받아 시작되었으며, 언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개념에 미술과 음악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특징이다.

12m의 높은 층고를 가진 스튜디오는 공간마다 색깔이 다르다.

 

메인 홀은 정원에서 발견한 형형색색의 녹색 스펙트럼으로 연출했고, 욕실은 주황색이다.

요린더 포그트 Jorinde Voigt의 작업실은 베를린 남동부 슈프레 강 옆 산업단지에 위치한다. 그녀는 대학을 다닐 때 이곳을 처음 발견했고, 언젠가는 여기에 스튜디오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건물을 매입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2018년 이곳에 그녀의 작업실이 만들어졌다.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폐허에서 ‘사랑해’라는 낙서를 발견했고, 그때 이곳에 완전히 매료되었지요. 스튜디오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슈프레 인근 지역을 개발하던 건축가 다니엘 베르헐스돈크와 손잡고 개조를 시작했습니다. 건물에는 유연한 사용을 위한 여러 공간이 있는데, 각각의 방에 모두 다른 색상을 선사했어요.” 색상은 그녀에게 음악만큼이나 중요한 소재다. 가장 크고 밝은 메인 홀은 인근의 정원에서 사계절 발견할 수 있는 형형색색의 녹색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졌다. 주변 자연에 대한 모든 기억의 합체처럼 말이다. 이 공간은 온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울창한 화분들을 놓았고, 이곳에서 그녀는 휴식을 취한다. 세면대는 주황색 공간에 설치했고, 바닥과 계단은 검은색을 선택했다.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스튜디오 외관. ©Amanda Holmes

 

 요린더 포그트는 건축가 다니엘 베르헐스돈크와 손잡고 세상에 하나뿐인 창조적인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메종>과의 인터뷰를 반가워했다.

그녀는 강렬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고, 평범한 하얀 벽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처음 미술가로 작업을 시작했을 때 색칠을 한다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어요. 2009년 선보인 ‘식물 코드 Botanic Code’ 연작은 색상을 접목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한 첫 번째 작품입니다. 식물원을 산책하면서 내가 마주친 색깔에 대한 연대기 기록을 바탕으로 한 알루미늄 소재의 작품이지요. 그 후로 종이에도 색칠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스튜디오에도 색이 불러일으키는 분위기에 따라 색깔을 골랐어요. 예를 들어, 가을날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멋져서 작업실에 이를 배가시켰고요.” 건축은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아름다운 과정이다. 이전 스튜디오는 블랙과 화이트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곳은 완전히 다르다. 건축가 다니엘과의 호흡도 환상적이었다. 그는 이곳을 하나의 집과 같이 디자인했다. 사무실, 서재, 옥상 테라스와 부엌은 가장 중요한 작업실과 곧 바로 연결된다. 그들은 목재, 금속, 진흙, 시멘트와 같은 자연적인 재료를 선택했고, 이는 슬라이딩 도어의 눈부신 표면과 지붕의 발광과 대조된다. 12m의 높은 층고를 가진 스튜디오에서 방문객들은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어시스턴트와 방문객이 매일 찾아오지만, 필요하다면 그녀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스튜디오는 널찍하다.

 

 

그녀는 자신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메종>과의 인터뷰를 반가워했다.

 

그녀는 신작에서 단순한 선이었던 것을 메스로 절개하고 여러 겹의 도면으로 구성했다.

원래 베를린 중심부에 스튜디오가 있었는데, 슈프레 강변에 이 새로운 작업실을 열면서 그곳을 집으로 개조했다. 유명 미술가 토마스 사라세노, 안젤름 라일레, 알리차 콰데의 작업실도 그녀의 스튜디오 인근에 있다(안젤름 라일레의 정원이 아름다운 작업실은 <메종> 1월호에 소개된 바 있다). “이 스튜디오는 이상적인 작업실이에요. 하지만 나는 지금의 작업실에 만족하지 않아요. 다시금 새롭게 스튜디오를 디자인하고 싶고, 만약 더 이상 변모시킬 수 없다면 즉시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타 미술가로, 워킹맘으로 대단히 바쁘겠지만 언제나 열정이 넘치는 그녀의 에너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매일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아들을 학교에 보내고, 스튜디오에 출근한다. 그리고 스튜디오에서 하루 종일 무수히 많이 발생하는 어려움을 뚫고 계획했던 대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오후 6시에는 집으로 가서 아들을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가끔은 친구들을 만나거나 여행을 가기도 한다. 지난해 서울 청담동 쾨닉 갤러리에서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기 때문에 요린더 포그트의
팬이 많다. 어린 시절 첼로를 전공한 그녀는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이 외부 조건과 어떻게 교차하는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드로잉 작업을 해왔다. 특히 서울 쾨닉 갤러리 전시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로드비히 판 벤토벤, 소나타 Ludwig van Beethoven, Sonata 1-32’ 시리즈와 더불어 베토벤의 소타나도 공간에 울려퍼졌다는 점이다. 시각적으로 작품을 보면서 작가에게 영감을 준 음악까지 청각으로 감상할 수 있는 관람 방식이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곳은 마치 한 채의 집과 같이 구성되었다. 사무실, 서재, 테라스와 부엌은 가장 중요한 작업실과 연결된다.

 

바닥과 계단을 검은색으로 칠해 다른 공간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어렸을 때부터 베토벤을 사랑했고, 그의 음악을 통해 내 안의 음악적 공간 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베토벤이 음악을 전달하는 감정의 스펙트럼은 어린 내게는 거대해 보고,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어떤 음악도 내 안에 그렇게 강한 감정의 시각적 현상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어요. 베토벤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가 나를 산과 바다, 가까운 곳과 먼 곳, 터널과 언덕, 안개와 물, 떨림과 경직 사이를 오가는 끝없는 지형 위를 날고 있는 비행기에 태운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베토벤은 내 안의 세계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고, 깊은 슬픔으로부터 나를 끌어올려주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나의 개인 비행기 조종사라고 할 수 있지요.” 지난해는 베토벤 탄생 250년이었기 때문에 쾨닉 서울에 이어 독일 본미술관에서 열리는 <소리와 침묵 Sound And Silence> 전시에도 참여했다. 베토벤의 청각장애를 시작점으로 완전한 침묵의 불가능성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다. 그녀는 음악, 철학, 문학을 공부했지만 최종적 관심이 미술로 옮겨간 계기는 무엇일까? 그녀는 초기에 사진을 매체로 사용하다 드로잉 등 점차 작품을 변화시키고 있다.

금박과 잉크, 파스텔과 연필로 그린 2018년 작품 ‘Immersive Integral I’.

‘Trust+Rain in June III’은 6월에 내리는 비를 연상시키는 2020~21년 작품.

“서울에서 선보인 ‘베토벤 소나타’ 연작은 음악이 표현이나 특정한 해석을 제외하고 자체적으로 주제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되었어요. 특히 베토벤의 악보에 새겨진 감정선을 표현할 표기법을 발전시키는 것이 큰 도전이었지요. 소나타의 원곡 악보와 기보법을 이탈리아어에서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이러한 발췌 작업은 나만의 고유한 작업 방식입니다.” 결국 그녀는 음악이 작동하는 방식이 미술이 만들어지는 방식으로 완전히 옮겨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악은 여전히 그녀에게 중요한 부분이지만, 스튜디오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것은 아니다. 자택에는 각종 악기가 구비된 음악실이 있고, 요즘은 아들에게만 첼로 연주를 들려준다. 최근에는 완전히 다른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녀가 <메종>의 인터뷰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인 것은 독자들에게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작은 ‘컷아웃’ 작품이다. 단순한 선이었던 것을 메스로 절개하고 여러 겹으로 도면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앞과 뒤가 동시에 보이는 일종의 지형을 형성했고, 시간적 시퀀스의 음악적 배치를 위한 기초가 되었다. 표면의 절단과 분리로 만든 라인과 부품의 리드미컬한 재배치는 여전히 중요하다. 4월 말, 베를린 갤러리 위크엔드 기간에 작업실에서 전시회를 연다니 기대가 된다. 예술의 도시 베를린의 열기가 벌써부터 느껴지는 듯하다. 그녀는 스튜디오에서 만든 작품이 공간 밖에서 자율적으로 빛을 낸다고 믿는다. 하지만 오늘날의 스튜디오는 창작 과정을 볼 수 있는 공공장소이기도 하다. 그녀의 스튜디오에서 영감을 받게 될 베를린 미술 애호가들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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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그래퍼

Roman Mä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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