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운명

화가의 운명

화가의 운명

거대한 산이었던 조부의 그늘 아래 처음 붓을 든 것은 여섯 살 때였다. 한국화가 허달재의 삶과 그림은 그렇게 처음부터 하나였다.

 

정중동 동중정

포도, 2008, 한지에 수묵채색, 209×146cm ⓒ 표갤러리

 

그림만으로 그 그림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화가의 인생과 그림이 하나의 뿌리를 두고 엮여 있어서 어느 한쪽만으로는 도저히 다른 한쪽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간혹 있다. 직헌 허달재 화백이 그런 경우다. 흔히 한국 전통 기법과 형식을 바탕에 둔 회화를 한국화로 통칭하지만, 실제로 그 안에는 여러 갈래의 논의와 화풍이 혼재한다. 조선 후기 중국에서 유입돼 고유의 방식으로 진화한 한국의 남종화 南宗畵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 주력하기보다 작가의 생각과 느낌에 중점을 두고 그리는 화풍이다. 선비의 그림이라 할 수 있는 문인화와 사실상 중첩된다. 그는 추사 김정희에서 이어지는 남종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의 장손이다. 당대를 이끄는 예술가였던 할아버지는 한자리에 진득하게 앉아 있는 것부터 고역이었을 여섯 살 어린 손자에게 붓을 잡게 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과 인생의 깨달음을 그림에 담는 남종화의 계승자가 다음 세대를 이어갈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 그림 그 이상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허달재

 

“보는 게 반이라고 하니까. 혈통 그런 건 모르겠고, 남들보다 많이 보면서 자랐으니 아무래도 배운 것이 있겠죠. 전통적으로 서양이 몸과 이성에 중심을 둔다면, 동양은 정신과 지혜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어요. 어느 쪽이 나쁜 건 아니고 누구나 양쪽의 입장을 다 가지고 있지만,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게 중요합니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하늘이 준 내 성품에 할아버지라는 사람과 인연을 맺어서 다듬어진 생각을 가지게 된 사람이에요.”

화가 이전에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세우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할아버지는 곧은 마음으로 살라는 뜻을 담아 ‘직헌 直軒’이란 호를 지어줬다. 조부이자 스승인 의재 선생이 작고한 후 화가로서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스승의 작품 세계에 어떻게하면 더 가까워질까 고민하던 시기를 지나자, 당연하게도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연의 고통이 찾아왔다. 뉴욕과 파리, 북경 등을 오가며 새로운 기법과 소재, 주제에 대한 실험을 거듭했던 즈음이다. 그 무렵에 열었던 전시가 <KARMA>전이었다. 영광스러운 가업은 어느 순간 말 그대로 ‘업 業’이 되어 있었다.

“수묵이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파트나 자동차 같은 것도 그려봤어요. 추상 작업도 해보고, 한지 대신 캔버스에 그리기도 했죠. 그리고 다시 전통으로, 사군자로 돌아왔어요. 나도 모르게 나는 이미 변해 있는데 내가 굳이 변하려고 애를 쓴 거였구나 깨닫게 된 거예요.”

명실상부 남종화의 계승자이자 신남종화의 개척자로 불리고 있는 허달재의 개인전 <정중동 靜中動 | 동중정 動中靜 Movement in Tranquility, Tranquility in Movement>이 서촌으로 이전한 표갤러리의 첫 번째 전시로 열리고 있다. 정과 동,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등 대립되는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지점을 찾아온 작가의 기나긴 여정이 담긴 이번 전시는 10여 년 만에 열리는 오랜만의 개인전이기도 하다. 다시 돌아왔다고 하지만, 당연하게도 처음과 같지 않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색채, 형태, 재료의 사용 등 작가의 생과 함께 익어가고 있는 작품의 변화는 충분히 숙성된 예술 세계의 틀 안에서 새롭고 분방한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표갤러리 전시

매화, 2018, 한지에 수묵채색, 130×91cm ⓒ 표갤러리

 

허달재 개인전

목단, 2018, 한지에 수묵채색, 170×120cm ⓒ 표갤러리

 

“내 그림의 부족함을 알고, 그래서 부끄럽고 겸손하게 되면 작가가 성장하게 됩니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었을 때 내 그림을 본 사람이 차분하고 편안해진다면, 그게 내 그림의 값어치겠죠.”

여섯 살의 소년은 일흔의 나이를 앞두고 있지만, 아직도 매일 작업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불편하다. 매일 생각하고 공력을 들이지 않으면 여전한 그림을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전통이 살아 있으면서도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매화 시리즈는 꾸준하게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작업이다. 하지만 그는 인생과 그림을 정리할 시점이 오면, 지금까지 자신이 칠한 색을 거둬내고 수묵화로 돌아갈 생각이다. 아직 찬란한 색으로 가득한 그의 작품들은 6월 8일까지 표갤러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허달재 개인전 <정중동 靜中動 | 동중정 動中靜 Movement in Tranquility, Tranquility in Movement>
when 5월 20일(월)~6월 8일(토)까지
where 표갤러리 본관
tel 02-543-7337

 

허달재 정중동 동중정

매화, 2018, 한지에 수묵채색, 207×285cm ⓒ 표갤러리

 

표갤러리 정중동 동중정

문향, 2008, 한지에 수묵채색, 125×95cm ⓒ 표갤러리

 

표갤러리

문향 , 2008, 한지에 수묵채색, 125×95 cm ⓒ 표갤러리

 

한국화

매화, 2008, 한지에 수묵채색, 209×146cm ⓒ 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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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그래퍼

김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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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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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네임 이즈 폴 스미스

마이 네임 이즈 폴 스미스

마이 네임 이즈 폴 스미스

오는 6월에는 없는 일을 만들어서라도 동대문에 다녀와야겠다. 오는 6월 6일부터 8월 25일까지 DDP 배움터 2층 디자인박물관에서 <헬로, 마이 네임 이즈 폴 스미스 Hello My Name Is Paul Smith>전이 진행되기 때문.

 

헬로 마이 네임 이즈 폴 스미스

 

DDP 개관 5주년을 기념해 서울디자인재단과 런던 디자인 뮤지엄이 공동 주최하고, 지아이씨클라우드가 주관하는 이번 전시는 런던 디자인 뮤지엄 역사상 가장 많은 관람객이 찾은 전시 중 하나로 꼽힌다. 폴 스미스가 어릴 적 일과 후 늦은 시간까지 재단 수업을 들으며 패션 디자인에 대한 꿈을 좇았던 노팅엄 뒷골목은 지금도 여전히 봉제상인과 재단소, 의류 소재와 도소매 상점이 즐비하다. 이 전시가 왜 동대문 DDP에서 열려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 전시에는 폴 스미스가 디자인한 의상, 사진, 페인팅, 오브제 등 540여 점의 전시품과 그가 수십 년간 수집한 명화와 팬들의 선물, 2019 S/S 컬렉션 의상 등 1500여 점의 진귀한 기록물을 선보일 예정이다.

 

DDP 전시

폴스미스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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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문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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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UR VIBE

COLOUR V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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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보데의 작품은 가사가 없는 연주곡과 닮았다.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대신 색채가 빚어내는 화음과 리듬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니콜라스 보데

 

독일 작가 니콜라스 보데 Nicholas Bodde는 색채 화가로 불릴 만큼 다채로운 색의 변주에 집중하는 작가다. 16년 만에 다시 서울을 찾은 그의 개인전이 지난 5월 9일부터 신사동 예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작품은 일관되고 명쾌하다. 사각의 프레임에 한정되지 않고 원형과 타원형, 3차원의 기둥으로 확장된 화폭에 구현되는 그의 작업은 다양한 색채가 이루는 선과 면의 조합으로 충만하다. 그에게 있어 색은 주제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적 요소가 아니다. 기하학적 형식에 담아 계속되는 색에 대한 탐구는 그의 작업에서 핵을 이루는 부분이다. 그는 의미의 해석 대신 색을 중심으로 한 가장 원초적이고 감각적인 미술적 경험에 집중할 것을 관객에게 제안한다. “작가로서의 방향성도, 작업의 방식도 지적인 과정과 결정이 아니라 직관적인 느낌으로 자연스럽게 정해졌어요. 모든 사람이 내 작품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색채를 좋아하고 내 작품에 흥미를 느끼는 관객이라면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감상했으면 하는 바람은 있습니다. 미술 작품을 보고 느끼는 행위에는 반드시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나는 개념을 세우기보다 느끼면서 작업하는 작가입니다. 관객 역시 느끼는 데 집중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의 작업은 캔버스 대신 알루미늄 판 위에서 이뤄진다. 알루미늄 판에 붓질과 스프레이 작업을 통해 색을 입히고 선과 면을 채워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매끈한 알루미늄의 물성은 색의 발광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완성 이후 공간에 설치했을 때 캔버스에 비해 날렵하게 표현된다는 점 때문에도 선택한 소재다. 니콜라스 보데는 6~7개의 판을 펼쳐놓고 동시에 작업을 진행하는데, 이때 유화, 아크릴, 수채화 물감 등을 두루 사용한다. 또한 유광과 무광의 효과, 매끈하거나 거친 질감 같은 대조적인 속성이 동시에 한 작품에 혹은 개별적으로 각각의 작품에 분방하게 반영된다. 작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봤을 때는 정교하고 깔끔하게만 보이던 선과 면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마치 기적 과정이 아닌 사람의 손으로 완성됐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한 표면을 갖게 되는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다. 일면 단순한 구조를 지닌 것 같은 그의 작품이 긴 시간을 꼼꼼히 두고 볼수록 다르게 보이는 이유 중 하나다.

 

예화랑 전시

 

그럼에도 선과 면을 이루는 색채가 빚어내는 하모니의 내적 규칙성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색을 선별하고 선과 면을 구획하는 기준이나 원칙을 물었을 때 작가의 답은 “I don’t know.” 당혹스럽기까지 한 이러한 답변은 완성된 그의 작품이 작가의 통제를 벗어난 우연의 결과임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정돈된 논리와 기술적 질서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무엇, 즉 하나의 컨셉트에 긴 세월 매진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 작가적 성찰이 우선한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그것은 언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서서히 체화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새로운 주제와 소재, 형식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작가와 자신의 작업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그 범주 안에서 깊이를 더해가는 작가가 있다. 어느 쪽이 낫다고 할 수 없는 선택의 문제다. 니콜라스 보데의 입장은 당연히 후자 쪽이다. 그에게 색채는 그 자체로 무한한 미술적 탐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은 색채라는 틀 안에서 서서히 진화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Slim Verticals’가 좋은 예다. 긴 사각기둥 형태의 이 작품은 그가 3차원의 세계로 작업의 형태를 확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각의 느낌을 주는 ‘Slim Verticals’는 실외에 설치가 가능해서 주변 환경과 섞여 들어가는 색과 형태의 새로운 느낌을 경험할 수 있는 구조를 갖지만 선과 면으로 구성되는 색채의 조합이라는 면에서는 이전 작품들과 같다. 색채의 코러스를 만끽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5월 31일까지 계속된다.

 

니콜라스 보데 개인전 <COLOUR VIBE>
when 5월 9일(목)~5월 31일(금)까지
where 예화랑
tel 02-542-5543

 

니콜라스 보데 개인전

No. 1232, 1233 Slim 2017, 125×7cm, Oil&Acrylic-Aluminium ⓒ 예화랑

 

니콜라스 보데 전시

No. 1302 Vertical 2018, 140×60cm, Oil&Acrylic-Aluminium ⓒ 예화랑

 

컬러바이브 전시

No.1355 Horizontal Dyn. 2019, 50×100cm, Oil&Acrylic-Aluminium ⓒ 예화랑

 

colour vibe

No. 706 Oval 2008~2019, 75×150cm, Oil&Acrylic-Aluminium ⓒ 예화랑

 

 

CREDIT

포토그래퍼

김도원

writer

이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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