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통차의 맑고 담백한 미학을 현대적으로 잇는 로해. 김시습의 후손 김동현 대표는
차의 본질과 예술적 가치를 세계적 시선으로 재해석한다.




한 잔의 차에는 계절의 향과 땅의 기운, 그리고 마시는 이의 마음가짐이 함께 담긴다. 옛 사람들은 차를 종종 ‘감로(甘露)’에 비유했다. 천하가 태평할 때 내리는 단 이슬, 불교에서 중생의 고통을 치유하는 부처의 가르침과 도 같다는 의미다. 맑고 담백한 존재로서 늘 곁에 두어야 할 친구인 셈이었다. 조선 초기 문인이자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쓴 김시습 역시 그러했다. ‘매월당’이라는 호로 시와 차를 즐긴 그는, 시집 <매월당집>에 차를 기르는 법부터 마시는 태도까지 70여 수의기록을 남겼다. 오늘날로해는 이러한 차의 본질을 현대적으로 잇고자 한다. 이름 그대로 ‘이슬의 기운’을 뜻하는 로해는, 김시습의 18대 후손인 김동현 대표가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호이다. 뿌리 깊은 가계의 문화적 자산과 개인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 전통차의 미학을 동시대적으로 해석하는 길을 걷고 있다. 2019년 미국에서 돌아온 후 그는 전남과 경남의 차밭과 절, 개인 다원을 찾아다니며 현장 연구를 이어왔다. 미술사를 전공하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근무한 경험은 전통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적 맥락 속에서 한국 차의 미학을 새롭게 번역하는 기반이 되었다. “일본과 중국은 이미 세계적으로 강력한 콘텐츠로 자리 잡았는데, 한국은 정제된 방식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드물었어요. 제가 가진 배경을 토대로 한국의 미감을 종합예술인 차를 통해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지난 8월 문을 연 로해 서울 공간 역시 같은 맥락에서 탄생했다. ‘초당’을 모티프로 한 이공간은 일본이나 중국과는 또 다른 한국의 미감을 보여주고 싶었고, 화려한 궁중 문화가 아닌 서민들이 살던 초가집을 통해 일상의 소박한 미학을 드러내고자 했다. 정면에 걸린 현판 ‘和開是序廬’(화개시서려)는 조화를 바탕으로 세워진 학자의 초막을 뜻하며, 검은 바탕에 흰 글씨만 새긴 디자인은 비움과 담백함을 실천한 조선 차인의 정신을 반영한다. 이 외에도 짚을 엮어 만든 초막 바닥을 연상케 하는 바닥 카펫, 해 풍을 견디며 몸을 꼬아 자연의 본질을 드러내는 소나무 기둥, 한국적 미감 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나무 장과 김민재 작가의 의자 등 공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오랜 시간 차근차근 준비해온 결과물이다. 이곳에서 선보이 는 첫 전시 는 조선 선비들이 남긴 기록을 토대로 ‘작설차’를 오늘날에 되살린 자리다. 참새 혀처럼 작고 여린 찻잎인 작설은, 일제강점기 ‘녹차’로 불리기 전 한국 차 명칭이다. 전시장에서는 <매월당집>에 묘사된 방식을 따라 올해 수확한 작설차를 맛볼 수 있다. “<매월당집> 70여 수중 작설을 토대로 만든 차예요. 책에는 작설 차를 언제 따는지, 어떤 형태인지, 그 맛과 기분은 어떤지 등이 세세히 표현되어 있어요. 한국 작설차의 원형을 조명하고, 동시에 로해가 해석한 것 까지 경험 할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차와 함께 곁들여지는 다과는 의외로 초콜릿이다. 전통 한과 대신 동시대적 언어로 풀어낸 시도다. 조선후기 이미 초콜릿이 ‘저고령당’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는 흥미로운 사실에서 착안했다. 전시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제자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 속 차 만드는 법이 함께 소개되며, 이를 재현한 봉단차와 소반, 도자기, 곱돌 화로 등이 어우러져 전통차 문화의 풍경을 오늘날의 언어로 재현한다.




로해는 앞으로도 다양한 한국 차의 원형을 연구하며 오늘날의 감각으로 소개할 계획이다. “한국차는 쓴맛, 시원한 맛, 구수한 맛이 모두 공존 합니다. 보통 차가 쓰면 마시지 않더라고요. 커피에 대해서는 그 한계치가 굉장히 낮은데 말이죠. 그 다층적인 맛이 바로 한국 차의 특징이라 생각해요. 그런 맛까지 담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가 전하려는 것은 단순히 마시는 차 한 잔의 맛을 넘어선 감각이다. 오래 이어온 한국 차의 기억과 현재의 미감을 동시에 마주하게 하는 순간인 것이다. 앞으로도 이곳은 차를 매개로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일상과 예술을 잇는 대화의 장을 펼쳐 나갈 것이다. ADD 서울시 강남구 영동대로129길 20 INSTAGRAM @rohae.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