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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수련’ 연작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wikimedia

 

모네 ‘수련(1903)’ 파리 마르모탄 미술관. ©wikimedia

일기예보를 하듯 올해의 색을 발표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지금 주목받는 색이어서가 아니라 그 색을 올해의 색이라 명명하면 주목을 받게 되는 일종의 마케팅은 아닐까? 실은 둘 모두 맞는 말이다. 팬톤은 올해의 색을 정하기위해 1년에 두 번 유럽에서 모여, 색상 분위기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칙칙한 방에 모여서 다양한 국가의 전문가들과 함께 소비자들이 현재 좋아하는 색, 의미가 있는 색에 대해 비밀리에 토론을 한 후 결정한다고 하는데, 그 논의 과정이 거의 문화인류학 세미나 수준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색은 그 자체로 다양한 상징을 지니고  있으며, 그 상징은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그 색을 지닌 자연물을 즉물적으로 연상시키며, 게다가 인간의 피부색은 정치적 논의로도 연결 될 수 있는 민감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과정을 거쳐 선정된 올해의 색은 ‘베리 페리’다.

 

 

모네 ‘수련’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작품 일부). ©wikimedia

레드와 블루가 섞인 보라색. 보라색이야말로 자주색에서부터 포도색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생각하는 기준이 가장 광범위한데, 베리 페리는 파란색에 더 가까운, 그리고 화이트도 섞인 듯한 색이다. 올해의 경우 실제의 세계가 아니라 디지털 세계의 영향을 반영했다고 하니, 자연속의 사물 중에는 이 색을 닮은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언뜻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라벤더 색인데, 예술가들의 작품에서는베리 페리를 좀 더 쉽게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시작은 인상주의 미술에서부터다. 그 이전의 예술 작품에서 베리 페리 색상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렘브란트, 고야, 들라크루아, 자크 루이 다비드…. 그들 모두 훌륭한 예술가들이고  나름대로 시대를 리드한 혁명가들이었지만, 갈색 톤을 주조로 하는 작품에서 보랏빛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확실히 보라색은 빛에 대한 이해로 눈을 뜬 예술가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으로 선택한 신선한 색이다. 모네의 ‘수련’ 그림에서부터 세잔의 ‘빅투아르 산 풍경’에 이르기까지 보라색은 오늘날의 디지털 아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새로운 시대의 색으로, 화면을 밝고 화사하게 바꾸고 있다. 베리페리가 가장 빛 나는 그림은 바로 고흐의 작품 ‘아이리스’ 시리즈다. 아를르에서 노란 해바라기를 그리며 예술가의 이상적 공동체를 꿈꾸었지만 고갱과의 불화로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마음의 상처를 입은 후 시작한 그림이다. 보라색 아이리스는 혼돈과 상처를 극복하는 용기를 주는 이미지로 고흐의 작품 속에 자리잡았다.

모네 ‘수련(작품 일부)’. ©wikimedia

또한 보라색은 연두색의 보색이다. 쇠라및 시냑 등 신인상주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색채 연구를 겸한 고흐도 연두색 잎과 가장 잘 어울리는 보랏빛 꽃을 선택하며 화면 속에 색의 조화를 꾀했을 것이다. 초현실주의의 대표 작가 호안 미로의 작품에 나타나는 주조색도 베리 페리에 가깝다. 주로 파란색으로 소개되지만, 2020년 팬톤이 정한 올해의 색, 클래식 블루와 비교해 보면 미로의 색은 블루보다는 베리 페리와 더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안 미로도 고흐처럼 우울증을 겪기도 했지만 원시미술과 아름다운 자연의 영향을 창조적으로 승화시켜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같은, 그러나 놀랍도록 아름답고 순수한 작품을 그려낸 작가다. 모네에서 미로까지 베리 페리를 일찍이 즐겨 사용한 예술가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용기, 뚝심 그리고 초월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