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한복판, 평범했던 주택이 창작의 현장이자 전시 무대가 되었다. 막연한 상상에서만
존재했던 공간을 현실로 이끌어낸 리빙룸 마이알레와 벨트의 대담한 도전.

훌륭한 작품 몇 점만으로 그럴듯한 전시를 꾸미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전시 전체의 밀도를 완성하기 위해선 작가를 보는 안목, 공간을 구성하는 감각, 전시장의 공기까지 아우르는 기획력과 연출자의 시선이 필요하다. 마이알레와 공간 프로덕션 컴퍼니 벨트 Welt가 프리즈 서울 기간 선보인 (me, meme – 세기말의 안빈낙도)는 그 복합적인 감각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생생한 사례였다. 무대는 이태원 마이알레 리빙룸 옆 단독주택. 김민재, 이규한, 최건혁 작가가 3개월간 거주하며 작업한 레지 던시를 전시 공간으로 전환했다. 서울 한복판의 주택 한 채가 예술가의 삶 과 실험이 녹아든 현장으로 변모한 것이다. 기획은 비어 있던 공간의 활용 을 고민하던 리빙룸 마이알레와 김성열 벨트 총괄 디렉터의 우연한 대화에 서 시작됐다. “작가 레지던시에 대한 생각은 그 이전부터 막연하게 있었는 데, 벨트와 이야기를 나누며 계획이 점점 구체화됐어요. 어찌 보면 우연하 게 맞아떨어지는 타이밍에,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한 덕에 좋은 프로젝트가 탄생하게 된 거죠.” 그렇게 마이알레 아트 레지던시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벨트는 서로 다른 매체를 다루면서도, 공간 중심으로 작업을 확장할 수 있는 작가들을 섭외했다. “이번 전시는 공간 자체가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작가가 이 방에 산다면 어떤 가구를 들일까?’ 같은 상상도 해봤어요. 자연스럽게 가구와 오브제를 중심으로 작업해온 김민재 작가가 떠올랐죠. 공간을 구성하는 또 다른 핵심 요소인 ‘빛’을 고려했을 때, 조명 등의 작업을 하며 일상의 사물에서 영감을 받아온 이규한 작가의 방식도 전시 방향성과 잘 맞았습니다. 2층 다락방에 구현된 세계는 최건혁 작가만의 시선으로만 열어낼 수 있는 풍경이었어요. 작가의 작업관과 그 방이 만나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렇게 세 작가는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 “세 작가 사이엔 일말의 친분도 없어야 했어요.” 작업이 루즈해지거나 한계가 빨리 올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작가들의 어색한 동거는 함께 생활하고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전시 방향의 구체화로 나아갔다.


이들의 작업과 생활이 맞물린 흔적은 전시 전반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김민재 작가는 전시하는 동안 자신이 만든 작품 <김 같은 침대>에서 실제로 숙박하며 생활을 이어갔다. ‘주택을 해킹한다’는 개념 아래, 레지던시와 전시의 경계를 허물고 공간에 실질적인 변형을 가하는 실험도 함께 이뤄졌다. 샹들리에가 있던 자리에 이규한 작가의 조명을, 장의 문을 잘라낸 자리에 최건혁 작가의 코드를 넣었다. 대리석 바닥을 곡괭이로 부수는 일종의 세리머니도 있었다. 그 파편은 김민재 작가 방에 전시되며 그 흔적마저 고스란히 담았다. 의도적으로 낮춘 천장 높이에 맞춰 문을 자르고, 조명 아래의 바닥엔 샌딩 처리를 해 빛의 효과를 극대화 한 것도 실험의 일부다. 마이알레는 이 같은 공간 개조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가능성을 닫는 순간, 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가 사라지는 셈이니까요.” 결과적으로 전시는 마이알레의 라이프스타일 지향성과도 일치했다. “우리는 결국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인데, 작가들이 만들어낸 조명, 시계, 침대, 의자 등이 공간 전체에 구석구석 배치되어 멋진 시너지를 냈다고 생각합니다.”



전시 제목 (me, meme – 세기말의 안빈낙도)는 세 작가가 레지던 시에서 머무는 동안 자연스럽게 도출한 개념이다. ‘세기말’은 동시대 미술 계에서 활동하며 느낀 불안과 과잉의 감각을, ‘안빈낙도’는 레지던시 생활 에서 경험한 소소한 평온을 뜻한다. 이들의 협업으로 완성된 <강 건너 불> 은 이미지 과잉 시대에 거리를 두는 삶의 태도를 제안하는 작업이다. 세 사 람이 이곳에서 직접 안빈낙도를 체험하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주제와 결과물이다. 전시가 마무리에 가까워졌을 무렵, 마이알레 우경미 대표는 본 프로젝트를 이렇게 돌아봤다. “레지던시가 단순한 작업 공간이나 숙소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작가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자 연스럽게 작업 이야기를 나누고, 그 과정을 통해 작업이 실질적으로 발전 하는 걸 경험했죠. 서로가 서로의 컨텍스트가 되어준 셈이에요.”




이번 아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리빙룸 마이알레와 벨트 모두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특히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동해온 동갑내기들이 모여 설립한 벨트에게는 팀의 첫 프로젝트였기에 더욱 의미 깊었다. 기획자, 건축 디자이너, UX 디자이너 등 전공 분야가 모두 달랐던 이들은 서로의 생각을 더해가며 공간의 잠재력을 끌어냈다. “작가들이 협업한 방식은 벨트가 일하는 구조와도 닮아 있었어요.” 전시는 끝났지만, 이를 위해 수많은 사람이 고민하고 개입한 흔적은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번잡한 대도시 한복판의 주택이 창작과 사유, 휴식이 교차하는 ‘도심 속 안빈낙도’가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앞으로 이곳에서 또 다른 프로젝트가 이어지겠지만, 마이알레 아트 레지던시의 첫 단추를 끼운 벨트와 마이알레의 협업은 프리즈 서울 주간의 가장 생생한 기억 중 하나로 오래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