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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공업소가 의료복 브랜드 호퍼의 쇼룸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디자이너 이길연이 만든 놀이터를 소개한다.

피팅룸엔 이상민 작가의 러그와 20여년 전 고객에게서 받은 소파를 리폼해 배치했다.

20여 년 전,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로 만난 두 사람이 친구를 넘어 동업자가 되었다. 인테리어 디자인 스튜디오 길-연의 이길연 대표와 치과 의사이자 의료복 브랜드 호퍼 Hopper의 장승은 대표 이야기다. 성수동 골목의 오래된 공업소였던 건물은 이길연 대표의 손길을 거쳐 그의 놀이터이자 호퍼의 쇼룸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그 시작은 2023년 코엑스에서 열린 치과의사협회 국제학술대회였다. 개원 28년 차 장승은 대표는 ‘좋은 진료복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 디자인과 기능성을 갖춘 호퍼의 첫 컬렉션을 선보였고, 이길연 대표는 부스 디자인을 맡아 브랜드의 진정성 있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풀어냈다. 작은 부스였지만, 수술과 진료 현장의 세밀한 움직임까지 고려한 디자인 덕분에 호퍼는 업계의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장승은 대표는 그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의 의료복은 최저가 납품에 익숙한 단체복 수준에 머물러 있었어요. 의료 행위에는 정교한 몸의 움직임이 필수인데, 이를 고려한 원단이나 디자인은 전혀 없었던 거죠. 의사에게 진료는 곧 일상 그 자체입니다. 환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데, 그 진심을 뒷받침할 의료복이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직접 ‘호퍼’를 만들게 되었어요.”

마이클 스코긴스의 작품이 걸린 회전식 문을 열면 다이닝 공간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가진 호퍼의 쇼룸이 펼쳐진다.
호퍼 장승은 대표(왼쪽)와 길-연의 이길연 대표.

건물의 2층엔 호퍼 사무실, 1층에는 쇼룸이 자리했다. 오래된 공업소의 흔적을 정리하고, 이길연 대표의 취향을 담은 공간을 재정비하는 데만 5개월이 걸렸다. 건물의 묵은 때를 청소하고, 그의 집과 사무실과 창고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작품과 가구들로 공간을 채웠다. 두 사람 모두 본업이 있는 만큼 서두를 이유도 없었다.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 답이 나오잖아요. 시간을 들이며 이 공간에 맞는답을 찾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의료진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쇼룸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곳이 플리마켓이나 전시 등을 하는 열린 공간으로 확장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따라왔죠.” 이 공간의 하이라이트는 발을 딛고 올라설 수 있는 회전식 구조의 문이다. 마이클 스코긴스의 작품이 걸린 이 문을 넘어서면, 셔터 뒤에 숨겨져 있던 호퍼의 쇼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길연 대표는 손님이 찾아오면 이 문에 올라서며 위트 넘치게 공간의 여정을 열어 보인다. “슬라이드나 여닫이문처럼 익숙한 방식을 지양하고, 방문객에게 예측하지 못한 경험을 선사하고 싶었습니다. 안으로 들어설수록 새로운 장치와 요소들이 차례로 더해지도록 설계한 것이죠.”

셔터 바깥에서 바라본 공간의 전경. 기존 공업소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시공 전 공간 모습. 오래된 자재와 공업소 날것 그대로의 이미지가 두드러졌다.
천장과 벽면을 가로지르는 케이블 트레이는 이 공간의 특징인데,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다.
세르주 무이와 세컨 하우스의 조명, 박세현 작가의 바나나 오브제가 장식된 천장과 벽면.

호퍼의 창의적인 아이덴티티에 이길연 대표의 감각이 더해진 공간은 흔히 떠올리는 의료복 브랜드 공간의 단조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가에타노 페세의 암체어, 피팅룸을 구성한 조명과 소파, 러그 등 그가 소장해온 아이템들이 시의적절하게 배치돼 공간을 채운 덕분이다. 테이블이 놓인 접대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10여 년 전 노팅힐에서 직접 공수한 손잡이, 허명욱 작가의 행거, 신상호 작가의 테이블, 캘리 박 작가가 이 대표를 위해 커스터마이징한 의자, 박세현 작가의 바나나 오브젝트 등 각기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세심하게 어우러져 잘 꾸며진 전시장에 온 듯한 분위기를 만든다. 야외로 통하는 문을 열면 다채로운 색감의 테이블과 피트 하인 이크의 벤치, 헨릭 빕스코브의 홍학 작품이 어우러져 채워진 테라스가 나타난다. 공간의 내부와 외부를 장식한 모든 오브제는 이 대표가 직접전 세계를 돌며 직접 수집하거나 선물받은 것들인데, 그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무실과 집에 있는 것들을 모아 이곳을 꾸몄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놀이터’라는 말로 설명하게 되는 것 같아요.” 호퍼의 쇼룸이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열린 공간. 이 대표는 이곳의 용도와 목적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았다. 옷이나 파티 장식을 디스플레이할 수 있는 케이블 트레이를 설치하고, 갤러리로 전환될 경우를 대비해 스팟 조명까지 미리 계산해둔 것도 이 떄문. “여기서는 팝업도, 전시도, 파티도 할 수 있어요. 파티나 팝업을 한다면 셔터를 올려 야외 주차장까지 이어 쓸 수도 있고, 젊은 창작자들에게 저렴하게 대여한다면 그들의 첫 무대를 펼칠 수도 있습니다. 누가 무엇을 해도 가능한 공간이 되었으면 해요.”

접대 공간의 한편은 이길연 대표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오브제들로 꾸며졌다.
캘리 박 작가가 이길연 대표를 위해 작업한 의자.
피트 하인 이크의 비비드한 벤치가 야외 테라스의 활기를 더한다.

한때 공업소이던 곳이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기획력과 창의력이 만나 무한한 가능성을 품게 됐다. 놀이터라는 이름에서 출발한 이곳은 앞으로도 실험적이고 다층적인 기능을 지닌 유연한 무대로 계속 확장될 것이다.
ADD 서을시 성동구 성덕정9가길 4 INSTAGRAM @kilyeon76,@hopper_offic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