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2025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의 전시장은 젊은 작가들의 에너지로 요동쳤다.
이들이 생성한 풍부하고 날 선 감각의 지형은
동시대 미술이 향하는 곳을 또렷이 가리키는 듯했다. 그 현장에서 목격한 아홉 가지 장면들.

‘드로잉과 나뭇잎’, 2025, Watercolor on canvas, 200 × 100cm.
‘노을과 안경’, 2025, Watercolor on canvas, 200 × 100cm.
‘두 번의 오늘’, 2025, Watercolor on canvas, 110 × 200cm.
전현선 작가. © Galeire Lelong

닫히지 않는 장면
전현선은 이미 오늘날의 아트 신에서 주목받는 이름이다. 그가 회화 위 인물과 사물, 기하학적 도형, 패턴을 병치하고 충돌시키는 과정은 세계를 단일한 시선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웅변한다. 명확한 진술보다는 모호함,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에 집중하는 작가의 태도는 구상과 추상을 오가며 오히려 더 풍부한 감각의 층위를 드러낸다. 전현선 작가의 작업은 어린 시절 경험한 시각 환경, 즉 2D와 3D 사이의 그래픽 이미지, 학종이와 색종이, 수공예적 구조 등에서 비롯된 평면성의 감각과 맞닿아 있다. 회화 속에서 반복되는 망원경 모양, 픽셀 구조, 기초 도형 등은 서로를 반사하고 호응하며, 단일한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에서 장면을 조직한다. 이는 작가가 경험을 단순히 재현하기보다, 그 때 분위기와 감각을 다시 불러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결국 전현선의 회화는 닫힌 결말이 아니라 열린 층위를 보여준다. 하나의 화면 앞에서 동시에 겹쳐지는 여러 갈래의 세계, 이는 곧 삶이 직선이 아니라 분기와 반복, 되돌아옴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가 펼친 다층적이고 모호한 세계는 지금 이 세대를 대표하는 감각 자체로 읽혔다.

(Floating Rubble) 전시 전경. © CON_, Yokote Taiki
요코테 타이키 작가.
Installation – Floating Rubble, 2025, Mixed media with debris from the dismantling of the sculpture building. © CON_, Yokote Taiki

보이지 않는 이야기
콘크리트 돌탑 위로 돌들이 부유하며 회전하고 있었다. 부스 앞으로는 비닐봉지가 바람에 흩날리듯 계속해서 움직였다. 일본 작가 요코테 타이키 Yokote Taiki가 갤러리 콘_ CON_을 통해 공개한 설치작업 이 연출한 장면이었다. 중력을 거스르고 공중 회전하는 파편들은 묘한 공허감을 자아냈다. 원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플로팅 러블, 즉 부유하는 잔해들. 부서진 시멘트 조각, 휘어진 철사, 낡은 건축 자재들이 쌓인 잔해 더미처럼 보이는 설치는 작가가 정확히 의도한 장면이었다. 그가 다니던 미술학교 건물이 철거되는 모습을 목격한 경험이 작업의 출발점이 됐다. 일상적인 공간과 물질이 언제든 사라지거나 형태를 달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작업실과 전시 공간에서 모은 파편들로 작품을 완성했다. 1998년생인 요코테 타이키는 익숙해질 만하면 낯설게 변하는 플랫폼과 환경, 곁에 없을 때 오히려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현상 속에서 자연스레 ‘부재의 존재’에 익숙해졌다. 그렇게 성장한 요코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단순히 ‘그곳에 없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균열 속에서 새롭게 드러나는 감각에 가깝다.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힘, 그 자체가 작가 작업의 본질이 아닐까 느꼈다.

디스위켄드룸의 프리즈 서울 전시 전경. © 최지원, ThisWeekendRoom, Seoul
최지원 작가.

진공의 초상
지난해 키아프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의 최종 수상자로 선정된 최지원은 국내외 미술 신에서 꾸준히 주목받아오고 있다. 생(生)과 사(死)의 간극, 현재와 미래가 교차하는 ‘진공의 공간’은 최지원에게 있어 탐구 대상이자 작업의 소재다. 작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도자기 인형, 공예품, 박제된 동식물은 이미 삶을 다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듯 현재에 개입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업엔 기묘하고도 그로테스크한 기류가 서린다. 디스위켄드룸의 프리즈 부스에서 신작 〈색온도 5〉를 마주할 때도 기분 좋은 긴장감이 돌았다. 확대된 채 캔버스를 가득 채운 두 얼굴은 서로를 향해 있으면서도 시선은 끝내 교차하지 않는다. 관계의 틈새에 드리운 긴장과 불안을 작가는 이토록 정밀하게 포착해냈다. 최지원의 화면은 정물, 풍경, 초상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극도로 사실적인 묘사는 때때로 부조나 입체로 착각될 만큼 견고하지만, 시선 처리와 빛의 구도는 의도적으로 미세하게 어긋나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어느 순간 현실감이 미끄러진다. 홀린 듯 빠져들었다가도 정신 차려 보면 현실에 두 발 딛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 간극 속에서 작품은 초현실과 현실을 왕복하며, 그 사이에 남아 있는 것들의 무게를 체감하게 했다.

‘She sings what she wants’, 2025, Oil on canvas, 162.2 × 97cm.
‘노래들 #4’, Oil on canvas, 2025, 194 × 194cm.
최윤희 작가. © 이승현

층위의 회화
국내외 아트 컬렉터 사이에서 최윤희 작가의 이름이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다. 지갤러리를 통해 프리즈 서울에 참가한 그는 물감을 켜켜이 쌓아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흔적을 회화적 질감으로 가시화했다. 그의 작업은 대상의 특정한 형상이나 서사보다는, 감정의 궤적과 그로부터 파생된 시각적 밀도를 구축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위해 화면에 수차례 물감을 덧바르고, 때로는 손으로 문지르며 색면과 질감을 만들어낸다. 물감 자체의 물리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화면에 시간성과 정서를 축적하는 방식이다. 도시 외곽의 풍경을 포착하던 초기 작업을 거쳐 강렬한 붓질과 옅은 선들의 구성에 집중해온 작가는 내면을 기록하는 방식으로서 회화가 가진 가능성을 탐구해왔다. 프리즈에 출품된 회화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명확히 드러났다. 2026년 지갤러리에서는 그의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다. 그곳에서 최윤희가 구축해온 회화적 언어가 어떤 방식으로 확장될지 기대된다.

‘Melon_01’, 2024, Archival print on backlit film, Metal frame, 76 × 47cm.
‘Melon_02’, 2024, Archival print on backlit film, Metal frame, 76 × 47cm.
휘슬의 프리즈 서울 전시 전경. © 노경
람한 작가.

응축된 환영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마주하는 순간에는 언제나 기대와 긴장이 교차한다. 람한은 그런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는 작가다.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그는 올드 팝, 서브 컬처, 그리고 미디어에 내재된 판타지로부터 출발해, 디지털 아트의 지평을 확장해왔다. 이러한 시각적 언어는 프리즈 서울에서 공개한 작품 에 여실히 드러난다. 본 작품은 휘슬에서 열린 개인전 에서 선보인 식물 드로잉의 연장선으로, 디지털 환경에서 회화적 기법을 적극적으로 실험하는 시도가 인상적이다. 명확한 서사적 중심 없이 오직 감각의 밀도로 구축한 디지털 페인팅이라는 형식은 새로운 정서의 공간을 열어젖힌다. 이 응축된 이미지들은 긴 설명이나 배경 없이도 그 자체로 충분히 강렬하며, 디지털 회화가 어떻게 빛과 물성, 기억의 층위에서 ‘현재형’의 회화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선명하게 증명한다.

드로잉룸의 프리즈 서울 전시 전경. © 드로잉룸, 임선구
임선구 작가.
‘그림자를 업고 떠나온 밤‘, 2025, Handmade paper, graphite, Styrofoam, and mixed media, 112.5 × 133.5 × 11cm. © 드로잉룸, 임선구

기억의 안식처
프리즈와 키아프를 통틀어, 이번 아트 페어에서의 가장 큰 발견은 임선구 작가의 설치작업이었다. 임선구의 작업은 사라져가는 공간에서 출발한다. 종이와 흑연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매체를 다루지만, 그의 화면은 단순히 기록을 넘어 시대와 개인의 층위를 끌어안는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 사회의 급격한 도시 개발 속 잊힌 장소들을 불러내며, 개인과 가족의 시간이 겹쳐진 ‘기억의 장소’를 제시했다. 폐종이를 잘게 조각내어 뭉친 덩어리는 건축 자재처럼 쌓여 화면을 이루었고, 그 위에 흑연 드로잉이 겹쳤다. 그렇게 완성된 개별 패널들은 하나의 벽면을 이루듯 배치되어 관람객을 맞이했다. 작가의 개인적 서사의 단편을 담고 있던 각각의 작품이 모여 하나의 집단적 기억의 서사로 확장된 것이다. 임선구는 그렇게 한국의 급속한 도시 개발 과정에서 밀려난 흔적을 보존 가능한 감각의 층위로 전환시켰다. 화면은 남겨진 잔해로부터 출발하지만, 그것이 구축하는 장면은 단순한 과거의 회고가 아니었다. 곧 사라질 풍경을 붙잡으려는 손길과, 그것을 기억으로 환원하려는 끈질긴 시도. 사라짐을 기록하는 동시에 기억을 새로 구축하는 힘이야말로 작가의 작업을 지탱하는 근원이 아닐까.

‘호감도_향일호 Open Sunflower’, 2025, 비단에 담채, 59 × 51.7cm. © THEO, 박그림
‘호감도_호복 Crossed Owls’, 2025, 비단에 담채, 112 × 145.8cm. © THEO, 박그림
‘호감도_호지근 Pick DickMushrooms’, 2025, 비단에 담채, 20.2 × 48.2cm. © THEO, 박그림
박그림 작가.
‘호감도_호앙 Lovebirds’, 2025, 비단에 담채, 53.3 × 69.4cm. © THEO, 박그림
‘호감도_호리 Breath of Carp’, 2025, 비단에 담채, 족자 55.7 × 27cm, 원화 27 × 20.2cm. © THEO, 박그림

호감도의 이중주
올해 키아프 하이라이트 수상 작가 중 한 명인 박그림은 갤러리 띠오를 통해 연작 <호감도>를 선보였다. 한국에서 복(福)을 기원해온 상징적 오브제인 해바라기, 부엉이, 잉어 등은 호랑이와 함께 병치되었다. 오랫동안 장식과 민속의 영역을 오가며 사랑받아온 이 형상들은 또 한편으론 ‘미신’이라는 시선 속에 소외되곤 했다. 작가는 이 양가적 성격을 해체하고 다시 짜 맞추며, 기원의 이미지를 회화 작업으로 불러냈다. 제목에 중첩된 두 의미 역시 흥미롭다. 호랑이의 감각을 드러내는 그림(虎感圖)이자, 인간관계의 정서를 가늠하는 ‘호감도(好感度)’. 작가에게 호랑이는 단군 신화 속 불완전한 존재이자 민화에서 복을 불러오는 영물, 동시에 오랜 페르소나로 기능한다. 이 호랑이는 복을 기원하는 집합적 이미지 속에 퀴어의 존재를 은밀히 끼워넣는다. 단순한 장식적 병치가 아닌,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배제되던 존재가 누군가의 소망의 대상으로 전환되는 순간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번 키아프에서 그의 작품은 총 7점이 판매되며, 박그림 작가에 대한 관심과 수요를 동시에 증명해냈다. 숫자로 환산된 성과 뒤에는 복이라는 보편적 열망을 퀴어적 감각과 함께 재구성한 그의 작업이 던진 울림이 남아 있다.

백아트 프리즈 서울 전시 전경.
추미림 작가.

인터페이스의 틈에서
웹의 픽셀과 도시의 그리드를 직조하듯 연결한 추미림 작가의 설치는 이번 프리즈 서울에서 가장 정교한 작업 중 하나로 기억될 것 같다. 백아트가 포커스 아시아 섹션을 통해 선보인 작가의 신작은 ‘웹’과 ‘도시’라는 이질적 환경을 하나의 인터페이스로 설정하고, 그 접속 지점을 통과하는 감각을 시청각적으로 유도했다. 추미림은 웹의 ‘픽셀’을 디지털 이미지의 최소 단위로, 도시의 ‘그리드’를 물리적 환경의 구조 단위로 차용하며 두체계를 절묘하게 중첩시킨다. 위성 이미지에서 추출한 패턴은 아크릴과 은색 페인트, 거울 아크릴이라는 복합 재료를 통해 회화, 영상, 설치의 매체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관람객은 화면이라는 경계를 넘어선 ‘접속’의 감각에 이르렀다. 노스텔지어로 회귀하는 픽셀의 추억부터 위성 이미지에서 도출한 추상 그리드, 반사와 투과를 동시에 품은 거울 매체까지, 모든 요소는 작가의 화면 위에서 긴장 속 균형을 유지하며 낯선 언어를 생성한다. 기술적 지식 이전에 감각의 구조에 대해 깊이 사유하는 그가 앞으로 펼쳐 나갈 세계가 기대된다.

‘카우보이2’, 2025, Watercolor on canvas, 100 × 73cm.
‘카우보이1’, 2025, Watercolor on canvas, 117 × 80.5cm.
박노완 작가.

윌링앤딜링 ‘키아프 하이라이트’ 전시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