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을 다한 자투리 소재가 장인의 손길을 거쳐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된다. 서울에 도착한 에르메스 쁘띠 아쉬가 보여주는 손의
기억, 그리고 창작의 또 다른 생애.

에르메스 메종 도산에 들어서자, 공간은 마치 한 편의 영화 속 장면처럼 펼쳐졌다. 특별한 점은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배우가 아닌 장인의 손끝에서 태어난 오브제라는 것. 반짝이는 가죽, 섬세한 실크, 금속과 포슬린이 어우러진 작은 작품들 하나하나가 저마다 이야기를 전한다. 세심하게 연출된 빛을 받아 반짝이는 표면은 속삭이듯 손으로 만드는 것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에르메스 쁘띠 아쉬 Hermes Petit H 전시는 그 자체로 손의 노동과 창의의 힘을 기리는 무대였다. 2010년 설립된 쁘띠 아쉬는 에르메스 공방중에서도 가장 자유롭고 실험적인 공간이다. 에르메스 가문의 6대손 파스칼 뮈사르는 사용되지 않은 최고급 자재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며 이 실험실을 열었다. 장인의 손길과 아티스트의 상상력이 만나, 평범한 소재는 예술적 오브제로 다시 태어난다. 고드프루아 드 비리유 Godefroy de Virieu의 창의적 디렉션 아래, 창작 과정은 역순으로 진행된다. 정해진 디자인에 따라 제작하지 않고, 다른 공방에서 남은 가죽과 실크, 크리스털 등 다양한 소재를 조합하고 조율하며 새로운 형태를 찾아간다. 단추를 뚜껑으로 사용한 크리스털 소금통, 켈리백 손잡이가 달린 카라프 물병, 테이블웨어 조각을 모아 완성한 포슬린 모자이크 테이블 등. 에르메스의 장인정신과 고품질 소재, 기발한 상상력이 한데 어우러져 독창적 오브제가 탄생한다.




이렇게 완성된 쁘띠 아쉬 오브제는 매년 두 나라를 여행하며 세계 각지 아티스트와 협업한다. 방문 국가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특별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두바이에서는 매 형태의 스탠드와 인센스 홀더를, 베이징에서는 용 디자인의 책장을 선보였다. 올해 에르메스는 쁘띠 아쉬의 종착지로 서울을 택했다. 한국 전시는 8년 만이며, 이번에는 아트 디렉터 류성희 감독의 연출이 더해졌다. 영화 <어쩔수가없다>, <헤어질 결심> 등에서 미술감독으로 활약한 그녀의 손길에 의해 에르메스 메종 도산은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재탄생했다. 전시장 곳곳은 <가을이 보낸 편지>라는 가상 이야기 속 장면처럼 구성되었다. 손의 노동이 창의의 출발점이라는 믿음 아래, 한 집에서 세 세대가 살아가던 시절의 풍경이 떠올랐다. 할머니의 뜨개질, 아버지의 수선, 어머니의 담금주, 아이들의 장난스러운 놀이. 전시장은 지하실과 침실, 거실, 주방으로 이어지며, 각 공간마다 오브제들이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보자기 예술에서 영감을 얻은 조각보 선반, 제주 해녀의 삶을 담은 레더 마케트리 수납 버킷, 장독대에서 착안한 패치워크 항아리. 각각의 오브제는 배우처럼 장난기 가득한 시나리오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손으로 만드는 것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쁘띠 아쉬의 오브제는 소량, 혹은 단 하나의 에디션으로 태어난다. ‘모든 것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쁘띠 아쉬의 믿음은 아티스트의 상상력과 장인의 손길을 지나 새 생명으로 이어진다. 에르메스의 창작 공방이 만든 이 작은 세계는 우리에게 익숙한 사물을 다른 프레임으로 바라보게 한다. 설명보다 감각에 먼저 닿고, 조용한 손의 움직임이 어떻게 삶의 온도를 다시 높이는지 은근한 방식으로 들려준다. 전시는 그렇게 잔잔한 여운만 남긴 채 천천히 페이드아웃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