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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의 품 안, 산사의 적요 속에 자리한 명적암은 템플스테이를 넘어 ‘머무름의 미학’을 제안한다.
무르익은 가을 색감만큼이나 마음속 깊숙이 충만함을 채우고 돌아온 하룻밤의 기록.

직지사 깊숙한 곳에 지리한 명적암. 산세의 고요함을 품은 채 단아하게 서 있다.
누각에 올라가 넓은 풍광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자연스레 정돈된다.
다채로운 가을빛으로 물든 11월의 명적암.

몇 해 전부터 가을이면 늘 산사로 향했다. 세속의 속도를 잠시 잊고 싶을 때마다 찾은 곳은 강원도 구룡사였다. 좁고 깊은 산길을 지나 도착하면 다른 시간대로 접어든 듯한 고요가 내려앉았고, 짧은 며칠간의 머묾만으로도 지친 마음이 치유되는 듯했다. 그렇게 매년 이즈음이면 자연스레 구룡사를 찾곤 했다. 올가을에는 조금 더 깊고 새로운 고요를 찾아 경북 김천의 직지사 자락으로 향했다. 천년 고찰 직지사의 산내 암자, 명적암(明寂庵)은 이름 그대로 밝고 고요했다. 지난봄, 이곳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리트릿 스테이, ‘스테이 앎 명적’으로 다시 태어났다. 명적암은 흔히 떠올리는 템플스테이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정해진 수행 일정이나 규율보다는 존재를 인식하고 마음을 비우는 사유의 리트릿에 더 가깝다. 고려 시대 능여 대사가 창건한 직지사는 1970년대 녹원 스님에 의해 다시 일어섰고, 명적암 또한 그 터를 지켜오던 자리에 복원됐다. ‘덕망 있는 이들이 하룻밤 머물며 밝은 마음을 얻는 장소’가 되기 바란 녹원 스님의 깊은 뜻은 2024년 직지상생포럼과 베터씨티랩이 공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다시금 이어졌다. 베터씨티랩은 전통사찰이 가진 결은 해치지 않되, 오늘날 감각으로 ‘리트릿’이라는 새로운 템플스테이 문화를 만들었다. 철학은 단 하나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게. 실제로 명적암 방에 들어서면 이 철학이 선명해진다. 단청의 녹색과 흙빛, 숲의 초록이 실내의 뉴트럴 톤과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빛은 얇은 ‘발’ 구조를 통과하며 실내를 은은하게 채운다. 과한 장식은 없지만, 누워보면 단단하고 편안한 매트리스, 텐셀 이불의 부드러움, 손끝에 닿는 원목의 질감까지 모든 요소가 ‘머무름’ 그 자체에 집중되어 있었다. 방안에 발을 들이는 순간 온몸의 긴장이 사르르 풀어지는 기분이랄까.

단풍나무가 창 너머로 펼쳐지는 2인실.
고즈넉한 한옥의 풍취를 배가시키며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발’ 구조의 1인실.
고요에 잠긴 채 몸을 따스하게 녹여줄 차 도구가 준비되어 있다.
도심을 벗어나 새소리와 산바람만이 머무는 명적암의 적막함.
노랑과 주황으로 깊게 물든 가을 풍경.
단단한 매트리스와 포근한 이불,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마련된 다섯 가지 베개가 세심한 배려를 전한다.

아랫목이 따뜻하게 데워지기 시작할 무렵, 석식 시간이 찾아왔다. 이곳의 백미는 단연 사찰음식 장인 경운 스님의 한 상이다. 2024년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이 위촉한 장인이자, 사찰음식 제1호 명장인 선재 스님의 제자로 알려진 스님이다. 세계 한식요리대회 금상 등 이력도 화려하지만, 스님의 음식 앞에서는 그런 정보조차 곁가지에 불과했다. “두부는 부드럽지만, 콩이라 천천히 씹지 않으면 소화가 잘 안 돼요. 그래서 우엉을 길고 가늘게 썰어 올리면, 꼭꼭 씹어 먹어야 해서 자연스럽게 시간을 들이게 되죠. 음식끼리 서로를 완하도록 조합하는 게 중요해요.” 스님 말은 곧 ‘기교가 아닌 깨달음으로 만든 음식’이라는 표현을 단번에 이해하게 했다. 더덕잣즙무침, 흑임자연근전, 구운 도토리묵, 생청국장 양념과 녹두튀김, 묵은김치지짐, 잡곡밥과 아욱감자된장국까지 한 상 가득하지만 어떤 것도과하지 않았다. 천천히 먹고, 느리게 씹으며 마음을 조율하는 식경의 시간이 되었다. 이튿날 새벽, 법당의 종소리가 산 안개를 깨운다.명적암 주지 스님과 함께하는 명상 시간. 차가운 공기 속에서 들숨과 날숨이 맞물리며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알아차림’의 시간이 40분간 이어졌다. 명상 뒤에는 고소한 잣죽으로 조식을 들고, 절 내 숲길을 천천히 걸어보는 포행이 뒤따랐다. 그렇게 몸과 마음의 속도를 정돈했다.

사찰음식 장인 경운 스님이 제철 식재료로 차린 석식 한 상. ‘상다리가 부러진다’는 표현이 절로 떠오른다.
사찰 음식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경운 스님.
톳두부무침, 궁채버섯들깨볶음, 미나리숙주나물 등 정갈한 나물 요리.
아침에는 고소하고 담백한 잣죽에 소박한 반찬이 곁들여진다.
두부부침 위에 잘게 썬 우엉을 올려 식감을 더한 정갈한 한 접시.
명적암을 지키는 ‘뚱냥이’와 선행 주지스님.
조식과 석식이 준비되는 식사 공간.
사찰 음식의 깊은 맛을 책임지는 장독대.
해질 무렵, 산사의 풍경이 고운 색감으로 물든다.

명적암의 스테이는 4~7인 소수 정원제로 운영되며, 한 팀이 암자 전체를 단독으로 사용하는 프라이빗 리트릿이다. 법당, 별채, 누각, 차담실까지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 ‘잘 먹고, 잘 자고, 잘 멈추는’ 리듬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정해진 규율보다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머무를 수 있는 자유로움이 더 크다. 프로그램 역시 강제되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산사의 호흡에 스며들며 조용히 자신을돌아보면 된다. 겨울이 다가오는 지금, 이곳의 리트릿은 내면의 정적을 되찾는 가장 느린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 절제된 아름다움과산사의 깊은 숨결이 머무는 ‘스테이 앎 명적’은 템플스테이의 새로운 얼굴을 선명하게 보여줬다.
예약 문의 stay.hermitage@gmail.com ADD 경상북도 김천시 직자사길 95 명적암 INSTAGRAM @stay.herm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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