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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손이 멈춘 자리에서 자연은 다시 자라났다. 잊혀가는 생명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온 최재은 작가의 이야기.

‘최초의 인류’ 화석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조각 작품 <루시>.

“식물의 주권을 찾아주고 싶었어요. 산책 중에 마주한 풀꽃과 들꽃… 그들의 이름과 존재를 살피며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습니다.” 조각, 영상, 설치, 건축을 넘나들며 생명과 자연의 관계를 오랫동안 탐구해온 최재은 작가는 국내보다 국제 무대에서 먼저 주목받아왔다. 일본과 베니스 비엔날레 등에서 작업을 선보이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질문해온 그녀는 이번 개인전 <최재은: 약속(Where Beings Be)>에서 그 질문을 좀 더 근본적인 지점으로 되돌린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리는 전시 <약속>은 자연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호명하기보다, 우리가 이미 그 일부였다는 사실을 다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전시 첫 장면을 여는 조각 작품 <루시>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시장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3m 높이의 구조물. 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형상은 단단하고 묵직하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세포를 연상시키는 반복적인 구조 속에서 미묘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작품 이름 ‘루시’는 1974년 발견 당시 최초의 인류로 추정된 화석의 이름에서 착안했다. 히말라야의 한백옥돌을 벌집 형태로 잘라 이어 붙였는데, 하나의 몸이 수많은 단위의 연결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처음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었고 관계 속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전시는 이 첫 장면에서 환기한다. 전시 주제 ‘약속’은 이러한 작가의 태도를 집약한다. “어떤 선언의 약속을 하자는 게 아니고 우리 내부에 존재해온 자연, 그 점을 한번 인식해보자는 차원에서 약속이라는 타이틀을 붙였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였으니까요.” 작가가 전시 출발점으로 삼은 ‘공생지약(共生之約)’은 인간과 자연이 새롭게 맺어야 할 약속이 아니다. 언어 이전의 시간부터 이어져온 상호 연대와 공존의 질서, 그 오래된 관계를 다시 감각해보자는 제안에 가깝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2025, 옻칠 나무 패널에 압화, 각 41.3 × 26.8 × 3.1cm.
DMZ 시리즈를 선보이는 ‘자연국가’ 섹션. 중앙에는 관람객이 직접 작품 위를 걸을 수 있는 <증오는 눈처럼 녹는다>. 3 미시 세계에 깃든 순환의 질서를 조망한 ‘소우주’ 섹션.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가루이자와)>, 1991~1992, 아크릴 레진에 와시, 각 98.7 × 98.7 × 6.5cm. © 이치카와 야스시

<루시>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서면 바다의 이미지와 수치 데이터가 결합된 영상 작업 <대답 없는 지평>이 펼쳐진다. 실시간 해수면 온도 변화와 백화된 산호의 풍경을 병치한 화면은 기후 위기의 현실을 과장 없이 드러낸다. 자연은 말을 하지 않지만, 화면을 채운 숫자와 이미지들은 이미 충분한 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섹션의 제목이 ‘경종’인 이유다. 전시는 시선을 낮추며 미시적인 세계로 이어진다. ‘소우주’ 섹션에서는 일본 전통 종이 와시를 토양에 묻었다가 다시 꺼내는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 그 변화를 현미경으로 기록한 <순환>, 전시장 중앙의 <숨을 배우는 돌>을 통해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낸 조형의 질서를 드러낸다. 작가는 인간의 개입 없이도 작동하는 시간과 형태를 천천히 보여주며, 우리가 자연을 바라봐온 관점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자연을 세심히 들여다본 작가의 시선은 ‘미명’ 섹션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드러난다. 전시장 양옆으로 길게 펼쳐진 압화 작업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현재 교토에 거주 중인 작가가 인근 숲을 산책하며 채집한 560여 점의 들꽃과 들풀을 기록한 것이다. 각각의 식물은 자신의 기원, 인간과 맺어온 관계, 그리고 현재 직면한 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관객은 숲길을 걷듯 작품 사이를 지나며, 그 이름과 존재에 귀기울이게 된다. 전시 후반부는 작가가 10년 넘게 탐구해온 비무장지대(DMZ)로 이어진다. 작가는 DMZ를 어떤 상징이나 인간의 경계로 읽기보다 자연이 주체가 되어 살아온 공간으로 바라본다. 인간의 개입이 제한된 시간 속에서 오히려 생태계가 회복되고 축적된 장소다. <대지의 꿈>과 <자연국가> 프로젝트는 생태 현황을 기록하고 회복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으로 확장된다. 특히 철조망을 녹여 만든 징검다리 <증오는 눈처럼 녹는다>는 관람객이 작품 위를 직접 건너며 자연의 흐름 속에 몸을 두게 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가 거창한 결론으로 귀결되기 바라지 않는다. “가능한 한 많은 작가가 생태에 대해 표현하고 적극적으로 나간다면, 세상은 조금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약속>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미 관계 속에 있었음을, 그리고 그 관계를 다시 감각할 수 있음을 조용히 제안한다. 전시는 4월 5일까지 열린다.

미시 세계에 깃든 순환의 질서를 조망한 ‘소우주’ 섹션. © 홍철기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작업을 설치 중인 최재은 작가. ©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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