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한 나무 위에 흑연으로 그리는, 어느 찰나 속 인물. 우리는 그 안에서 각자의 서사를 발견한다.

리만머핀 서울에서는 알렉스 행크 Alex Hank의 아시아 첫 개인전 <오직, 지금(Only the Present Rise)>이 열리고 있다. 스위스 알프스에 위치한 작업실 인근에서 채집한 자작나무판 위에 흑연으로 그린 그림의 시작점은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이다. 찰나의 이미지를 다시 손으로 옮기며, 디지털 시대의 순간을 오래된 재료와 전통적인 드로잉 기법으로 담아낸다.

먼저 전시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오직, 지금>이라는 제목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어떤 삶 속에서 현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지 자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언가를 진짜로 경험할 수 있고, 더 행복해질 수 있으며,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작나무판 위에 흑연으로 그리는 방식은 오늘날 흔한 방식은 아닙니다. 이 재료를 선택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나요? 오래전에 나무를 매체로 사용한 적이 있었어요. 아주 짧은 기간이었고, 그 뒤로는 다른 작업을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 나는 나무에 페인팅하고 드로잉하는 걸 정말 좋아했는데’ 하고 다시 나무 매체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나무마다 색이 조금씩 다르고, 결이나 표면의 텍스처도 다르잖아요. 그런 점이 저에게는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이 매체 자체가 굉장히 오래 지속될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에요.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감각이 있죠.
피사체는 동시대의 인물이지만 재료는 오히려 고전적이라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오래된 드로잉 방법이지만 제가 다루는 인물들은 동시대적인 현대 인물이기에 그 사이의 약간 맞지 않는 균형감이 흥미롭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 대비가 이 작업의 중요한 긴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흑연으로 그리는 작업은 색이 없기 때문에, 명암만으로 감정과 감각을 드러내야 한다는 점에서 더 어려운 작업처럼 느껴집니다. 흑연과 나무는 실수를 거의 허용하지 않는 매체라고 생각해요. 한 번에 그리기 시작하면 수정하기가 어렵고, 수정할 수 있는 범위도 적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매체를 선택하는 것이 나에게 ‘벌을 주는 일’이라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해냄으로써 나 자신에게 증명할 수 있다’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면서 내가 행복하다는 것까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팬데믹 이전에는 사진, 회화, 조각 등 다양한 작업을 해왔습니다. 과거 작업은 지금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요? 첫 번째는 저는 늘 사람을 그린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구도와 구성에 대한 관심입니다. 어렸을 때 사진을 공부했고 이후에는 네온 라이트를 이용한 설치 작업도 했어요. 여러 가지를 시도해봤지만 일관되게 남아 있는 것은 결국 사람이었습니다. 또 구성과 프레이밍을 중요하게 생각해왔습니다.
이번 전시 작품 역시 사진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릴 때, 인물에게서 포착해낸 분위기나 감정이 있었나요? 제 이미지들은 계획적으로 세팅된 것이 거의 없어요. 어떤 순간을 포착하고 싶을 때, 우리가 늘 들고 다니는 휴대폰 카메라를 통해 그 찰나를 붙잡습니다. 리만머핀의 라쉘 레만이 제 작업을 ‘기술의 흐름을 거꾸로 가는 작업’이라고 말한 적 있어요. 휴대폰으로 찍은 디지털 이미지를 가져와, 거기서 기술의 층위를 다 걷어내고 장인적인 작업으로 바꿔놓는다는 거죠.

작품을 시작해서 완성하기까지, 작가로서 가장 설레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가장 설레는 순간이라기보다, 가장 두려운 지점이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예전에는 흑연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화면의 왼쪽 위에서 오른쪽으로 작업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늘 눈에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가장 어려운 부분이 눈이기 때문이에요. 눈, 코, 입 순으로 얼굴을 먼저 완성하죠. 그렇게 얼굴이 먼저 생기면, 그 다음부터는 마치 작업실에 누군가가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스튜디오로 돌아왔을 때 누군가가 매일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요. 그 감각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번 전시에서 한 작품을 제외하고 모두 한 인물의 다른 장면을 그렸습니다. 왜 그 사람이어야 했나요? 한 사람을 여러 번 그린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저는 이 사람에게 굉장한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관찰하는 연습을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여러 모습을 계속 들여다볼수록 내가 이 사람을 더 깊이 잘 알 수 있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이 인물은 앞으로도 계속 등장할까요? 올해 이스탄불에서 미술관 개인전을 앞두고 있는데, 그 전시에도 이 인물의 초상화가 들어갈 예정입니다. 약 2.5m 규모의 작업이 될 거예요. 재미있는 건, 관람자들이 제가 말하기도 전에 이 인물들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린다는 점이에요. 그 점이 무척 기뻤습니다. 물론 동시에 다양한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죠. 그런 부분은 관람자의 상상에 맡기고 싶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과 어떤 감정, 혹은 무엇을 나누고 싶으셨나요?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제가 선택한 나무와 흑연 같은 오래된 재료들이 한국의 미감과 잘 맞는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번 설치가 완성되었을 때, 마룻바닥이 있는 공간과 흰 벽 사이에 이 나무 작업들이 놓인 장면을 보고 모두가 놀랐습니다. 이 도시와 이 공간, 그리고 이 나라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전달되는 것이 있다고 믿게 됐어요.

나무와 흑연을 사용해 인물을 담아내는 방식은 마치 수행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도 공감합니다. 누군가가 전시된 작품 중 하나를 집으로 가져간다면 그것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지면 좋겠어요. 저는 복제될 수 없는 것, 유니크한 것, 유일무이한 것을 가져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긴 시간과 절제 속에서 만들어진 작업이기에 보는 이가 그 소중함 자체를 가져갈 수 있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요즘 스스로에게 가장 자주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요? ‘나는 지금 행복한가?’ 작업뿐만이 아니라 삶 전반에 대해서요. 매일 이 질문을 던지며, 행복하지 않은 것은 바꾸면 되고, 행복한 것은 더 많이 하면 됩니다. 몸 상태, 마음 상태, 일, 가족, 친구, 사랑까지 모든 걸 아우르는 질문이죠. 지금 제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마 그것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