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일적인 동선과 빽빽한 대량 진열을 미덕으로 삼던 그로서리 스토어에 변화의 기류가 흐른다. 지역의 거점이자 디자인과 미식을 결합한 체류형 플랫폼으로 진화한 세계의 그로서리 6곳을 소개한다.

Meadow Lane


지난해 말, 뉴욕 맨해튼에 새롭게 등장한 메도우 레인 Meadow Lane은 고메 그로서리를 표방하는 새로운 형태의 리테일 공간이다. 창립자 겸 CEO 새미 누스도르프 Sammy Nussdorf의 의도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뉴욕 도심 속, 소비자들이 휴식할 수 있는 차분하고 환영받는 대안을 만드는 것.’ 미식, 디자인, 소비 트렌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공간을 정교하게 구성한 그는 일상에 미학을 더하겠다는 취지 아래 모든 요소를 큐레이션했다. 그중에는 미식 전문 팀과 함께 연구해 개발한 즉석 조리 식품과 공간을 구성한 맞춤 제작 이탈리아 마감재 또한 포함된다.
공간의 디자인은 인테리어 디자이너 사라 카펜터 Sarah Carpenter가 총괄했다. 그는 스토어의 이름에서 연상되는 해안 소도시 분위기에 뉴욕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더했는데,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지나치게 정돈된 공간 대신 온화하고 텍스처가 풍부한 연출을 택한 것이 특징이다. 입구의 플로럴 설치물과 데다의 리넨 패브릭으로 장식한 창이 따뜻한 느낌을 자아낸다면, 아파라투스 스튜디오의 조명이 설치된 오션 블루 톤의 화장실은 절제된 팔레트에 강렬한 대비를 더한다. 이곳에서는 아트 어드바이저 소피아 코헨 Sophia Cohen과 크리에이티브 아트 파트너스 Creative Art Partners와의 협업을 통해 다양한 예술 작품 또한 소개하고 있다. 그 덕분에 식료품 매대, 장바구니 반납 구간 등 곳곳에서는 캐나다 출신 작가 마이클 스웨이니 Michael Swaney를 포함한 신진 및 기성 작가들의 작품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SuperHub

네덜란드 흐로닝언의 신지구 메이르스타트 Meerstad에 위치한 슈퍼허브는 그 이름처럼 허브, 즉 지역 주민들을 연결하는 중심지 역할을 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지어진 그로서리 스토어다. 이곳은 온라인 배송이 활성화된 오늘날, 사람들이 교류하고 만나는 물성적인 공간을 통해 장을 보는 경험을 다시 사회적인 행위로 되돌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고 교류하는 만남의 장을 활성화한, 마켓플레이스와 쇼핑센터가 결합된 현대적 공생 모델인 것이다.

건축 스튜디오 드 즈바르테 혼트 De Zwarte Honde는 전통적인 마켓 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순환적 개념의 공간을 만들었다. 9m에 달하는 높이와 넓고 투명한 구조를 지닌 건물은 십자 형태의 기둥과 보로 이루어져 대성당 같은 인상을 풍기고, 목재 특유의 따뜻한 톤은 대형 마트 특유의 차가운 조명과 대비되는 동시에 주변 녹지 환경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역할을 한다. 개방적인 구조 덕에 커뮤니티의 수요에 맞춰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는 점 또한 눈에 띈다. 현재 인구 유입이 빠르게 진행 중인 신도시의 특성을 반영해, 향후 커뮤니티 센터나 박물관, 심지어 주거 공간으로 전환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설계한 결과다. 그로서리 스토어로서의 기능에 충실한 동시에, 도시의 성장과 함께 진화하는 미래 지향적인 커뮤니티 허브인 셈이다.


ICA Stop

네온사인 반짝이는 신선 코너, 유려하게 흐르는 메탈 프레임, 파스텔 톤 컬러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유희. 새로운 감각으로 재탄생한 스웨덴의 슈퍼마켓 ‘ICA 스톱’은 공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디자인 오브제를 연상시키며, 쇼핑 경험을 즐거운 체험의 일부로 승화시킨다. 변화하는 라이프스타일에 발맞춰 과감한 변화를 시도한 이번 프로젝트는 스웨덴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SNASK와 건축 스튜디오 베스트블룸 크라세 아르키텍트콘토르 Westblom Krasse Arkitektkontor의 협업으로 완성됐다.

네온사인 반짝이는 신선 코너, 유려하게 흐르는 메탈 프레임, 파스텔 톤 컬러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유희. 새로운 감각으로 재탄생한 스웨덴의 슈퍼마켓 ‘ICA 스톱’은 공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디자인 오브제를 연상시키며, 쇼핑 경험을 즐거운 체험의 일부로 승화시킨다. 변화하는 라이프스타일에 발맞춰 과감한 변화를 시도한 이번 프로젝트는 스웨덴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SNASK와 건축 스튜디오 베스트블룸 크라세 아르키텍트콘토르 Westblom Krasse Arkitektkontor의 협업으로 완성됐다.



Plastic Box

스페인 마요르카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플라스틱 박스’는 콘크리트 셸의 거친 표면과 산업적인 스틸 선반이 조화를 이루는 슈퍼마켓이다. 스페인의 건축 & 인테리어 디자인 업체 미니멀 스튜디오 Minimal Studio가 완성한 이곳은 미니멀 브루탈리즘을 상업 공간으로 확장한 실험의 결과물이자, 대담한 미학과 혁신적인 기능성을 내세운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직선과 기하학적인 라인으로 이루어진 콘크리트 셸은 장식을 배제한 채, 강인함과 지속성을 전면에 드러낸다. 쇼핑이라는 일상적인 행위는 이를 통해 하나의 공간적 경험으로 전환된다.





Erewhon

과거와 현재, 변화와 개성이 공존하며 전 세계 트렌드세터들의 필수 방문지로 사랑받는 LA. 럭셔리 오가닉 그로서리 마켓 ‘에르혼’은 이 도심의 중심에서 기존 식료품 마켓의 개념을 전복한 새로운 웰빙 라이프의 초상을 보여준다. 병입 전 산소를 주입한 하이퍼 옥시제네이티드 Hyper-oxygenated 생수, 무항생제 닭고기 샌드위치, 비건 부리토 등 진열대에 오르는 머천다이즈는 클린 라벨과 친환경 가치를 기준으로 엄선되어, 소비자에게 럭셔리한 리테일 경험을 선사한다. 이를 통해 단순히 물건을 고르는 것을 넘어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 의식하며 쇼핑 자체를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인식하게 된다.

LA에 위치한 열 곳 남짓한 매장 대부분은 RDC 건축소에서 설계를 맡았다. 부유층을 주요 타깃으로 삼은 만큼, 4성급 호텔과 고급 의류 매장을 벤치마킹해 공간을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로비를 연상시키는 여유로운 동선과 세련된 미감, 채광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개방형 창은 전통적인 식료품점 이미지를 완전히 지운다. 특히 좁은 통로와 높게 구성된 선반은 매장 내 상주 직원들이 소비자와 자연스럽게 교류하도록 치밀하게 계산된 장치다. 경험과 품질, 독점성에 집중한 공간 전략은 그로서리를 일반적인 쇼핑 공간에서 해방시켜 방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되는 동시대적 라이프스타일 플랫폼으로 확장시킨다.

Gem Home

셰프가 구현한 그로서리의 형상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해 뉴욕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 새롭게 문을 연 ‘젬 홈’은 이런 궁금증을 경험으로 풀어내는 공간이다. 이곳의 오너 플린 맥개리 Flynn McGarry는 셰프 출신으로, 이전에 운영하던 레스토랑에서 오브제 판매를 진행한 경험을 계기로 공간 기획을 확장했다. 매장 곳곳에서 큐레이션되는 식료품은 셰프 특유의 날카로운 감각으로 발견한 것들이다. 컬럼비아 카운티와 뉴욕에서 소량 생산되는 제철 잼, 교토산 말차 가루를 더한 소금 등은 기민한 감각이 아니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희소성 있는 제품으로서, 이곳만의 독창적인 큐레이션 철학을 보여준다. 공간 뒤편에는 큐레이션 제품과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제철 메뉴를 선보이는 카페가 마련되어 쇼핑과 미식, 라이프스타일을 동시에 경험하는 몰입형 체험을 선사한다.

아늑한 가정집을 연상시키는 내부 인테리어는 1970년대 미국 서부 해안 특유의 여유로운 미감을 반영해 완성했다. 목재와 벽돌을 사용해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다양한 디자인 오브제와 빈티지 아이템으로 포인트를 더해 개성 있는 분위기와 스토리텔링을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이러한 공간 디자인은 소비자에게 구매까지 이어지도록 설계됐다. 방문객은 단순히 관람하는 것을 넘어, 마치 자신의 집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제품을 직접 체험한 후 구매할 수 있다. 그야말로 한 사람의 취향이 빚어낸 유일무이한 공간이자 쇼핑과 미식, 라이프스타일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감각의 집약체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