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6대 왕, 단종은 1457년 6월, 수양대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봉되었고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길에 오른다. 어린 왕의 나이는 열일곱. 사약을 받기까지 유배 생활은 고작 4개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이 짧고 슬픈 기간을, 단종이 청령포 사람들이 지어준 밥을 먹으며 울고 웃는 이야기로 채운다. 단종이 유배 길에 오른지 정확히 569년 후인 2026년, 그 밥상을 직접 차린 이가 있다. 영화 푸드 팀의 디렉터, 이혜원(푸드앤컬쳐코리아의 대표)이다.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는 먹기 위한 음식보다 엎어지기 위한 음식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작품이었다. 폐위된 단종 이홍위(박지훈 분)는 처음 등장하는 수라상과 마지막 사약까지 입에 대지 않는다. 이처럼 배우가 실제로 먹지는 않지만, 음식이 등장하는 장면을 준비할 때 푸드 팀은 어떤 것에 집중하나? 배우가 음식을 섭취하는 장면이 없는 경우에는 음식이 좀 더 시각적으로 돋보일 수 있도록 색감을 강조하거나, 촬영 시간이 길어져도 상하지 않고, 형태가 유지되도록 보존 처리에 공을 들인다. 특히 ‘왕사남’의 수라상 장면들은 국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이 참 중요해서 그 부분을 세심하게 신경 썼다.
앞서 언급했듯 이홍위는 수라상을 거부하는 장면으로 처음 등장한다. 비록 입에도 대지 않지만 수라상인데, 어떤 고민을 했을지 궁금하다. 권력을 잃은 왕의 수라상이었다. 유배 전 마지막 상을 차렸던 수랏간 상궁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어떤 음식을 어린 왕에게 차려드리고 싶었을까 고민했다. “왕위에서 쫓겨나기 일보 직전의 왕이 받는 상차림”이라는 것을 강조한 장항준 감독의 말에 따라 본래 왕에게는 올리는 12첩의 수라상이 아닌 9첩으로 가짓수를 줄여 구성했다. 너무 화려하거나 꽉 찬 느낌보다는 전체적으로 힘을 좀 뺐고, 대신 음식의 위치와 배열만큼은 최대한 고증에 충실하게 구현했다.
영화 속 상차림을 준비할 때 참고한 자료는 무엇인가? 아마 시각 자료보다는 주로 문헌에 의지해야 했을 것 같은데. 맞다. 모든 상차림은 고서에 기록된 내용을 기본 바탕으로 구성했다. 다만 극의 배경이 조선 초기이다 보니 정확한 고증 자료가 풍부하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시대적·계절적 배경을 우선 고려하되, 영월이라는 척박한 땅에서 일반 백성들이 구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식재료에 대해 고민하며 크고 작은 15개의 밥상 차림을 만들었다.
상차림에 쓰이는 그릇이나 소반 등은 푸드 팀과 소품 팀 중 어느 쪽에서 담당하는지도 궁금하다. 상차림에 올라가는 그릇은 주로 우리 푸드 팀의 몫인데 늘 소품 팀과 긴밀하게 협의해 진행했다. 수라상을 차릴 때 사용한 주칠(朱漆) 대원반, 소원반, 책상반은 우리가 직접 준비했다. 특히 주칠 대원반은 구하기도 까다롭고, 구매하기에도 매우 비싼 편이라 소품 팀에서 보유하고 있지 않은 경우 푸드 팀이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유배된 청령포에서 사용한 강원반 밥상은 소품 팀에서 준비했다. 두 팀이 서로 보유하고 있는 것들을 확인하고 공유하며 함께 세팅을 완성한다.
엄흥도(유해진 분)가 우연히 찾아간 노루골은 한창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장면을 위해 준비했어야 할 음식의 양이 상당했을 것 같은데? 맞다! 정말 많은 양의 음식이 필요했다. 촬영지는 강원도 영월의 영화 <웰컴 투 동막골> 야외 세트장이었는데, 풍경은 무척 아름다웠고 세트도 예뻤지만 가는 길이 워낙 험난해 촬영 기간 내내 다리에 경련이 날 정도로 고생을 했던 기억이 난다. 준비할 음식이 많다 보니, 우선 회사에서 1차로 기본 요리를 다 하고 현장에서 끓이고 볶는 등의 후조리 과정을 거쳤다. 음식 양이 어마어마해서 1톤 트럭에 가득 실어 날라야 할 정도였다.

영월 사람들이 이홍위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씬에서, 엄흥도가 간식처럼 먹던 ‘무’도 이혜원 디렉터가 준비했나? 아니다. 그 무는 제작팀에서 맛있는 강원도 무를 직접 공수하여 준비했다. 엄흥도의 아들, 엄태산(김민 분)이 이홍위에게 글을 배우고 싶다 할 때 둘 앞에 차려져 있던 곶감도 제작팀에서 별도로 준비했다. 상차림보다는 소품에 가까운 음식들은 제작팀이 우리와 논의하며 현장 공수를 한 것이다.

한명회와 양반들의 주안상은 스크린에 자세히 비춰지진 않던데, 혹시 정성껏 준비했지만 카메라에 담기지 못한 걸까? 그 장면보다는 영월 군수의 술상을 한 상 그득 차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편집에서 삭제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지방 군수의 세력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굉장히 세속적이고 화려하게 주안상을 구성했는데,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이홍위의 밥상 촬영은 총 몇회 정도 진행되었나? 극 중 막동어멈이 이홍위를 위해 차리는 밥상은 약 10번 정도 등장한다. 그 중 6번의 밥상은 메들리로 촬영했다.





이홍위는 유배지에 온 이후 호랑이를 잡고 나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밥을 먹는다. 쌀밥과 다슬깃국, 어죽, 산초 무침, 저민 토끼 고기, 그리고 산삼 뿌리와 산딸기까지. 이렇게 상차림을 구성하게 된 이유가 있나? 이 구성은 시나리오를 처음 읽을 때부터 존재했다. 감독님과 작가님이 작품을 준비하며 미리 설계한 차림으로 알고 있다. 나는 이것이 옛 상차림에 크게 위배가 되지는 않는지 문헌 및 자료 조사를 선행했다. 가장 공들여 만든 차림 중 하나다. 1450년대 강원도 영월의 음식은 화려할 수 없고, 구하기엔 어려운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계절과 산과 강이 내어주고, 부뚜막에서 만들 수 있는 밥과 찬과 국이어야 했다. 다슬기는 영월 사람들이 서강에서 손으로 건져 올릴 수 있는, 가장 친숙한 식재료 중 하나였다. 이 밥상에서 다슬깃국과 어죽은 온기를 담당하는 음식이며 산초 무침은 유일하게 향이 있는 찬이다. 조선시대 강원도 산간에서 구할 수 있는 짐승의 고기 중에서도 구운 토끼 고기는 소박하지만 귀한 고기 반찬이라 밥상 위에 올렸다. 산삼 뿌리는 가장 망설이던 것이다. 너무 귀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는데, 영월 일대 깊은 산에서 산삼이 났다는 기록이 있고 무엇보다 청령포 사람들이 유배 온 어린 왕에게 좋은 것을 드리고 싶었을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귀한 것을 주는 마음말이다. 산딸기는 계절이 허락한 선물이다. 실제로 단종이 영월에 머물던 시기는 강원도 산자락에서 산딸기가 붉게 익어가는 여름에서 초가을 사이였다. 밥상 중 유일하게 단맛을 낸다.

영화 속 쌀밥이 유난히 하얗게 보인 것은 내 착각일까? 가난한 백성들이 먹는 보리밥과 확실하게 대비되어 보였다. 이 밥 연출에도 특별한 준비가 있었을 것 같은데. 예로부터 흰 쌀밥이 지니는 의미가 매우 컸던 것 같다. 과거 농경 사회에서는 보리는 생존을, 쌀은 경제력과 풍요의 상징이었으니까. 화면 속 쌀밥은 매 순간 윤기가 잘잘 흐르고 먹음직스러워야 했기에 현장에서 직접 밥을 했다. 이때 고슬고슬한 느낌보다는 밥이 약간 질면서 ‘떡밥’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이홍위의 밥상에 올리기 위해 강원도 시골 사람들이 흰 쌀을 구해다 지었으니 조금은 투박했으면, 그렇지만 넘치는 정은 좀 보였으면···. 그런 밥의 형태를 구현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간단한 질문 하나만 하고 끝내겠다. 사약은 무엇으로 만들었나? 이미 알려진 방법들이 많이 있지만. 사약은 언제나 쌍화탕! 요즘엔 색이 더 진한 종류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있다

이혜원 푸드 디렉터(푸드앤컬처코리아 대표) @ellie_kitchen
영화 및 드라마 푸드팀에서 활동하는 푸드 스타일리스트이자 셰프. 영화 <넘버원>,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애플 시리즈 <파친코>등 다양한 작품에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참여했으며, 한식의 세계화를 위한 활동과 푸드 클래스도 병행한다. koreanrecipe.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