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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오래된 도시들은 제각기 다른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한다.
그중에서도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은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중세도시라는 평가를 받는다.
곳곳에 남은 옛 건물들의 기억을 따라, 도시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본다.

칠이 벗겨지기는 했지만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 대문. ⒸMaisonkorea
구 시청사 건물 1층에 자리한 어느 레스토랑의 종업원이 전통 의상을 입은 모습. ⒸMaisonkorea

핀란드의 ‘헬싱키 Helsinki’를 출발한 크루즈가 유럽 대륙과 스칸디나비아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인 발트해를 느릿하게 나아갔다. 크루즈는 거대하고 육중했다. 배 안은 상당히 혼잡했다. 헬싱키와 ‘에스토니아Estonia’의 ‘탈린 Tallinn’사이를 오가는 배 한 편이 취소되는 바람에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승선했다. 승객의 대부분은 핀란드 사람이었다. 그들은 주말이면 두어 시간 배를 타고 탈린으로 건너가 면세품 술을 몇 상자씩 사 오곤 한단다. 핀란드의 물가가 워낙 비싼 탓이다. 승객들은 크루즈 안에 마련된 레스토랑 등을 오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찬바람을 쐴 겸 갑판으로 나갔다. 붉은 해가 수평선을 향해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배는 두 시간 만에 이웃 나라 탈린에 닻을 내렸다. 항구에서 옛 시가지 언저리에 자리한 호텔까지는 5분밖에 걸리 않았다. 중세로의 ‘타임 슬립’을 기대하며 어렵사리 잠을 청했다.

올드 타운에는 재미있는 모양의 간판을 내건 레스토랑이나 가게들이 많다. Ⓒ Maisonkorea
구시가지의 커피 전문점. 직접 볶은 신선한 원두를 판매한다. ⒸMaisonkorea
중세의 건물들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돼 있는 탈린의 올드 타운. ⒸMaisonkorea

안개가 지켜낸 탈린의 아름다운 고도

탈린의 올드 타운을 부지런히 걸어 다녔다. 도시에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옛 모습이 고스란했다. 그동안 수많은 유럽의 도시들을 가봤지만 탈린만큼 고도로서의 면모가 확실한 곳도 드물지 싶었다. 탈린이 옛 모습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던 데는 뜻밖에도 ‘나쁜 날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국의 폭격기들은 안개가 짙게 낀 탈린의 구도심이 아니라 발트해에 폭탄을 쏟아부었다. 안개가 오조준을 유발해 결과적으로 도시를 보호해낸 것이다. 오래된 도시답게 탈린에는 오래된 건물들이 즐비했고, 오래된 건물들은 하나같이 흥미로운 내력을 품고 있었다. 시청 광장 가장자리에 위치한 약국은 1422년에 지어졌다. 현존하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이다. 지금은 탈린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빼놓지 않고 들르는 명소가 됐다. “고양이의 피와 생선의 눈과 유니콘의 뿔로 만든 파우더를 정력제로 팔았는데, 그때 유니콘을 너무 많은 잡은 바람에 다 사라졌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이 약국에는 전설처럼 내려온다. 구 시청사에서는 두 번째 기둥을 눈여겨볼 만하다. 쇠고리가 걸린 기둥에 죄인을 묶어놓고 토마토 세례를 퍼부었다고 한다. 죄인들 중에는 예전 의회 의원도 포함돼 있다.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어기고 자신의 부인에게 회의 내용을 공개했는데, 결국 이 사실이 발각되는 바람에 광장을 세 바퀴나 기어다니는 형벌과 함께 사방에서 날아드는 토마토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수백 년의 세월을 버텨온 건물들은 탈린의 가장 눈부신 관광자원이다. ⒸMaisonkorea
러시아가 에스토니아를 지배하던 시절 건립된 러시아정교회 성당. ⒸMaisonkorea

1400년대에 세워진 유서 깊은 니콜라스 교회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점령군인 독일을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 측에서 폭격을 가해 일부가 부서졌던 것을 어렵사리 복원한 경우다. 여기에도 ‘스토리’가 깃들어 있다. 에스토니아를 강점하던 러시아 정부는 1960년대까지도 성당 수리에 미온적이었다. 각국으로부터 비난이 들끓자 1970년대에 들어서 마지못해 보수를 단행했다. 탈린 사람들이 외지인에게 니콜라스 교회를 꼭 보라고 권하는 이면에는 역사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알렉산드로 네브스키 교회는 제정러시아 시대인 1901년에 건립된 러시아 정교회 건물이다. 성당 건너편에는 카드 리오스 의회가 있는데, 스웨덴 강점기 시절부터 나라의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졌던 장소다. 지금도 의회 건물에 붙어 있는 성탑에서 에스토니아의 국기 게양식과 하강식이 거행된다. 에스토니아 최고 권력 기관 앞에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에스토니아 인들에게 복잡한 감정을 안겨줄 만하다. 성당 문을 열고 살며시 내부로 들어섰다. 성가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사람들이 경건한 자세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예수의 모습이 그려진 액자의 틀에 입을 맞추는 한 여인의 뒷모습이 간절해 보였다.

타운 월, 성벽 위를 걸어보는 이른바 테라스 투어가 가능하다. ⒸMaisonkorea

험난한 역사를 뚫고 일궈낸 독립의 흔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라 있는 탈린의 구시가지는 규모가 크지 않아 도보로 몇 시간이면 돌아볼 수 있다. 하지만 도시의 ‘미세 혈관’인 골목골목까지 찬찬히 뜯어보려면 하루가 짧기만 하다. 옛 시가지는 크게 고지대와 저지대로 구분할 수 있다. 높이의 차이는 곧 신분의 차이였다. 고지대에는 주로 영주와 귀족 등이, 저지대에는 상인과 일반인들이 거주했다. 지체 높은 양반들이 주로 드나들던 정치 및 행정 기관이나 각국의 대사관 등은 당연히 고지대에 자리를 틀었다. 고지대 중심에는 톰페아 언덕이 있다. ‘최고봉’이라는 뜻에 걸맞지 않게 높이는 해발 40m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도시 전체가 낮게 엎드린 탈린에서 이 정도면 고도 차이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톰페아 언덕에는 신화 한 토막이 똬리를 틀고 있다. 에스토니아를 건국한 거인 칼렙의 아내 린다는 남편이 세상을 등지자 그의 무덤을 표시하기 위해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돌을 산 위로 옮기고자 했다. 하지만 돌이 너무나 무거운 나머지 가는 도중 바닷가 근처에 떨어뜨리고 만다. 그 돌이 떨어진 자리가 지금의 톰페아 언덕이 됐고, 슬픔에 잠긴 아내가 흘린 눈물이 윌레미스테 호수가 됐다는 것이다. 언덕에는 13~14세기에 걸쳐 성과 성벽이 건설됐다. 한때 성곽의 길이는 4km에 달했으며, 원뿔 모양의 탑이 46개나 세워졌다. 지금은 약 1.9km의 성벽에 26개의 탑이 남아 있을 뿐이다.

중세를 테마로 한 상점인 올데 한자의 가죽 구두, 구두코가 인상적이다. ⒸMaisonkorea

광장 부근에 위치한, 중세를 테마로 한 숍인 올데 한자(Olde Hansa)에 들어가 보았다. 마법사들이나 신을 법한 구두코가 뾰족한 가죽 신발, 허리 부분은 잘룩하고 옷소매는 풍성한 에스토니아의 전통 의상, 각종 향신료와 중세 시대를 표현한 그림지도 등은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위한 촉매제였다. 선조들의 복장을 착용한 이곳 점원의 말투에서는 은근한 기품이 느껴졌다. 탈린의 거리를 걷다 보면 군것질 노점상들이 자주 눈에 띈다.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은 흑설탕으로 코팅한 다음, 시나몬 가루를 뿌린 아몬드와 호두를 즉석에서 볶아 판매한다. 우리 입맛에도 비교적 잘 맞기 때문에 자꾸만 손이 간다. 탈린의 구시가지를 벗어나면 현대사의 흔적이 아로새겨진 장소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중 송 페스티벌 그라운드는 혁명의 발상지로 일컬어진다. 소련이 아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전인 1980년대 후반, 에스토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에서는 독립을 염원하는 집회가 잇따라 열렸다. 특히 1988년에는 30만 명에 달하는 에스토니아 국민들이 광장에 모여 소련의 통치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한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1869년의 송 페스티벌에서 비롯된 전통을 되살린, 이른바 비폭력 저항 운동이었던 것이다. 에스토니아의 독립에 ‘노래하는 혁명’이라는 표현이 붙은 것도 이런 여유에서다. 지금은 송 페스티벌 그라운드에서는 5년마다 노래 축제가 개최된다. 좀 더 높은 곳에서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싶은 사람은 신시가지 외곽에 위치한 탈린 TV 타워 전망대를 찾으면 된다. 도시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장쾌한 파노라마 뷰가 일품이다.

탈린 TV 타워, 엘리베이터를 타면 49초 후 22층 전망대에 도착한다. ⒸMaison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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