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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공예트렌드페어는 ‘손끝의 미학’을 주제로 전통과
예술의 경계를 오가는 장면이 전시장 곳곳에 펼쳐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었던 작품과 부스를 중심으로
공예의 현재를 보여준 순간을 선별했다.

01. 케이블 타이가 만든 유영
더 마스터 기획관에서 가장 인상 깊게 남은 작품은 박수이 작가의 설치 작업이었다. 붉은 물고기 형상이 한 방향으로 이어지며 전시 공간을 가로지르고, 관람자는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따라 이동하게 된다. 가까이에서 살펴보니 이 유기적인 형상을 구성한 재료는 다름 아닌 케이블 타이였다. 공업적이고 비생물적인 소재를 하나하나 연결해 생명체의 움직임으로 전환한 과정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은은한 빛을 머금은 동양적인 배경 또한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지 특유의 부드러운 질감과 절제된 분위기는 물고기 형상의 실루엣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며, 작품의 조형적 긴장감을 한층 강화한다. 전통적 재료와 산업 소재의 대비가 자연스럽게 맞물린 박수이 작가의 이 작업은 더 마스터 기획관에서 단연 눈에 띈 작품으로 기억된다.

02. 나무로 빚은 형상
공예공방관에서 눈길을 끈 작업은 ‘플러스 수’가 선보인 목제 조형 작품들이었다. 피나무와 참나무혹, 국산 호두나무, 오동나무, 참나무, 다릅나무, 탄화 목재 등 다양한 수종을 사용해 화병과 항아리, 볼의 형태로 풀어냈다. 표면에 고스란히 드러난 나무의 결과 개성 있게 갈라진 흔적들은 관람자의 걸음을 자연스럽게 멈추게 했다. 작업 방식을 살펴보니 흙 대신 나무를 올려 물레 성형하듯 다루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목공 작업에 쓰이는 목선반 기법을 기반으로 한 이러한 조형 방식은 작품의 높은 완성도를 뒷받침한다. 재료의 물성을 숨기기보다 오히려 드러내는 태도는 공예공방관이라는 기획관의 성격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03. 유리가 포착한 빛
더 마스터 기획관에서 이규홍 작가의 유리볼을 보자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빛을 머금은 투명한 덩어리들이 공간 안에서 조용히 숨 쉬는 듯했다. 이규홍 작가는 유리를 단단한 오브제가 아닌, 빛이 흐르고 시간이 스며드는 공간으로 다루며 공예와 조형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든다. 블로잉과 캐스팅, 건축 유리 작업을 오가며 만들어낸 작품 속에는 기포와 층위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는 장식이라기보다 그가 지나온 시간의 흔적에 가깝다. 나뭇가지 끝에 주렁주렁 맺힌 열매처럼, 유리볼 안에는 빛이 차오른다. 작품 아래에 놓인 원형 거울은 반사를 통해 깊이를 더하고, 시선을 아래로 끌어당긴다. 관람자의 움직임과 자연광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는 투명한 조각들은, 바라보는 순간마저 작품의 일부로 만들어버린다.

04. 전통 부채의 바람
2025 우수 부스상을 수상한 죽호바람은 ‘전통의 현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전라남도 구례에서 대나무 숲을 가꾸며 3대째 전통 부채를 이어온 김주용 장인의 공방은, 사라져가는 전통의 보존에 머무르기보다 현재진행형의 생활 문화로 다가온다. 태극선, 곡두선, 합죽선 등 다양한 부채의 형태를 한자리에서 살필 수 있어 의미 있었다. 또한 구찌 같은 유명 브랜드와의 협업이나 그래픽 패턴을 더한 부채들은 전통에 현대적 감각을 자연스럽게 접목한 사례로 흥미를 더했다. 특히 현장에서 직접 펼쳐진 부채 제작 라이브 시연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젓가락처럼 가늘게 떠낸 대나무살 하나하나가 모여 부채선을 이루는 과정은, 70년의 시간이 응축된 장인의 손의 기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빠른 소비와는 정반대의 속도로 완성되는 이 작업은, 오래 쓰고 곁에 두는 물건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05. 렉서스와 공예
공예 작가를 꾸준히 지원해온 자동차 브랜드 렉서스의 렉서스 크리에이티브 마스터즈 어워드가 2025년에 8회를 맞았다. ‘공예의 내일: 경계를 허물다’를 주제로 소개된 수상작 다섯 점은 재료와 쓰임, 완성의 기준까지 자연스럽게 흔들며 공예의 현재와 다음을 함께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시선을 오래 붙잡은 것은 2025 위너 최선혜 작가의 <깨진 그릇>이었다. 파손된 그릇의 조각을 위태롭게 이어 붙인 구조는, 불완전함과 취약성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더 드러내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기능적인 아름다움 그 이후의 공예가 어떤 얼굴을 가질 수 있는지를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설득하는 장면이다. 비록 전시장에 놓인 작품은 실제 수상작은 아니었지만,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06. 큐레이션의 힘
서촌의 공예 편집숍 일상여백의 부스는 얼마 전 열린 <운유월행>의 연장선에 놓인 공간을 재편집한 형태로 구성되었다. ‘구름이 놀고 달이 흐른다’는 제목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둘러보게 만드는 리듬이 있는 공간을 연출했다. 도자, 한지와 섬유, 소목과 유리, 금속, 국가장과 기능장에 이르기까지 네 개 분야에서 작가 25명과 디자이너가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낸 공예는, 전통과 동시대성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풍경을 만든다. 박강용 장인의 옻칠 합, 서석근 장인의 대나무 바구니, 이기훈 작가의 유리잔, 남지현 작가의 한지 조명까지. 일상여백만의 큐레이션을 만나볼 수 있었다.

07. 한지 위에 새긴 기록
인쇄소 긷은 한국적인 미감을 바탕으로 종이에 인쇄 작업을 이어가는 곳이다. 수제 전통 한지에 활판 인쇄를 적용하고, 포스터 작업에는 컬러 피그먼트 프린트를 사용해 인쇄 방식부터 차별을 둔다. 우리 전통을 모티프로 해 현대의 쓰임새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시작한 ‘계절력’은 한 장씩 손으로 떠낸 한지에 활판 인쇄를 더한 작업으로서, 음력을 기준으로 한 보름과 그믐, 절기를 함께 병기해왔다. 12년째 같은 사양과 디자인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부스에서는 계절력과 함께 호랑이 부적, 삼두일족, 삼재부 등 전통 상징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인쇄물을 선보였다. 특히 즉석에서 받은 이미지를 한지에 인쇄해주는 이벤트도 눈길을 끌었다. 연초 소중한 이에게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써서 건내보면 좋을 듯.

섬유의 연결과 빛의 흐름을 표현한 황준호 작가.
불이 바람을 맞이하는 찰나의 움직임을 구현한 김윤배 작가.
2025 공예트렌드페어의 최웅철 감독.
‘아트퍼니처의 개척자’라 불리는 최병훈 작가의 작품.
한국계 캐나다인 금속작가 손계연의 금속 작품.

08. 공예 생태계를 구축하는 플랫폼
공예트렌드페어가 2025년 20주년을 맞았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제시하고 싶었던 방향성은 무엇이었나요? 2025년에는 공예를 단순히 전시의 결과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유통 관점에서 접근했습니다. 공예가 이제는 생활 속 오브제를 넘어 파인 아트에 근접한 예술 형태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20주년은 그런 흐름 속에서 공예가 리빙 공간 안에서 예술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올해 주제인 ‘손끝의 미학’에 담긴 의미를 설명해주신다면요? ‘손끝의 미학’은 작가의 손길이 예술로 이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공예는 그릇을 만드는 기술에 그치지 않고,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하나의 예술이자 창작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더 마스터’, ‘더 넥스트’, ‘더 컬렉션’이라는 세 개의 기획관이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이 구조를 통해 한국 공예의 어떤 흐름을 보여주고자 했나요? 한국 공예의 세대적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게 구성했습니다. 더 마스터는 각 분야의 장인정신과 완성도를 보여주는 대가들의 공간이고, 더 넥스트는 40세 이하 젊은 작가들의 실험과 가능성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공모를 통해 200여 명 중 23명을 선별했는데, 10년 후 더 마스터로 성장할 수 있을 만한 작가들이죠. 더 컬렉션은 갤러리들이 전속 작가의 작품을 직접 선보이는 관으로, 공예의 유통 구조와 시장성을 보여줍니다. 공예가 단순히 창작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갤러리 시스템 안에서 작가와 시장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도록 기획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공예의 현주소와 앞으로의 방향을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해외에서 한국 공예를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성’입니다. 전통적인 미감이 자연스럽게 현대적으로 표현되는 부분이 세계적으로 인상 깊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단순히 미적 개념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적 관념을 바탕으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 작가들이 늘어나면서 한국 공예가 세계 무대에서 더 확장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0년간 이어진 공예트렌드페어가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하길 기대하시나요? 이제 공예트렌드페어는 단순히 판매의 장이 아니라, 공예 생태계를 구축하는 플랫폼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지금은 작가관과 갤러리관이 함께 존재하지만, 앞으로는 두 영역이 좀 더 명확히 구분되면서도 서로 보완적으로 작동해야 합니다. 작가가 스스로 판매하는 구조를 넘어, 갤러리가 작가의 작품을 픽업하고 시장으로 확장시켜주는 방식이 자리 잡는다면 한국 공예계 전체가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페어를 찾은 관람객들이 꼭 느꼈으면 하는 지점이 있다면요? 공예를 생활용품이 아닌, 예술의 한 장르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이번 페어는 공예가 미술품처럼 감상되고 소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리였습니다. 공예를 ‘손끝에서 피어나는 예술’로 느끼며, 그 안에 담긴 작가의 시간과 태도를 함께 발견해보시기 바랍니다.

09. 옛것과 새것의 조화
페어 취재를 위해 드넓은 행사장을 분주하게 움직이던 중, 어싱 웨이 Earthing Way의 부스를 마주하자 절로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오랜 골동품을 취급하는 앤티크 숍 같기도, 손때 묻은 공예품을 전시하는 갤러리 같기도 한 광경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을 연출했다. 대만의 전통과 현대 공예를 함께 소개하는 어싱 웨이는 2016년 대만에 설립된 셀렉트 숍 겸 전시 공간이다. 쇼룸의 특성에 걸맞게 꾸며진 부스에서는 대만 작가인 강리성 Kang Li Sheng, 린시위 Lin Xi Yu, 황원촨 Huang Wen Chuan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꾸지나무 가지의 수피, 종이섬유 등 자연에서 유래한 소재의 질감에서는 시간의 흔적에서 비롯된 대지의 아름다움과 본래의 가치를 보존하려는 이들의 철학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10. 경계 없는 예술
국내외 갤러리들이 소장한 공예품을 선보이는 ‘더 컬렉션’에서는 공예 재료와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에 주목한 갤러리 SP의 부스가 유독 시선을 사로잡았다. 평면 매체와 함께 조각, 공예, 디자인 베이스의 입체 작품들을 아울러온 갤러리 SP는 하성욱, 레나 쿠도 Rena Kudoh, 김하나미 등 작가 5인의 현대미술 작품을 선보였다. 기능과 실용 위주로 머물던 공예의 틀이 예술로 확장하며 물성, 시간, 공간이 서로를 비추는 장면을 만들어낸 자리였다. 여러 작가의 작품이 한데 어우러진 부스는 마치 미술관 속으로 들어온 듯한 광경을 연출했다. 하성욱 작가의 이 가죽 자투리와 종이로 압축된 도시 풍경을 제시했다면, 김하나미 작가의 <금>은 한지를 켜켜이 쌓아 빛과 바람, 기억의 흔적을 담아내며 감각의 층위를 드러냈다. 공예적 감성을 쌓아 완성한 작품이 오늘날의 예술적 언어로 읽히며, 현대미술과 공예는 결국 불가분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와 닿게 했다.

11. 명주의 아름다움
함창명주 ‘작가의 방’ 부스에 들어서자 섬유 특유의 온기가 먼저 전해졌다. 이곳은 지역성과 동시대 디자인이 만날 때 생기는 힘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함창명주 리브랜딩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아워시선과 함창명주 진흥재단, 그리고 현대 섬유 작가와 디자이너 8개 팀이 협업해 전통 명주를 지금의 라이프스타일로 풀어냈다. 무섭기보다 정겨운 표정의 호랑이가 누빈 명주 이불, 누에고치에서 출발한 나비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제비 모빌, 명주 가리개와 초롱을 재해석한 리빙 오브제까지.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깃들어 있지만, 결코 부담스럽지 않다. 서영희 예술감독, 김영은 침선작가, 김성미 섬유작가 등이 참여한 이번 프로젝트는 섬유 위에 쌓인 시간과 기억을 ‘지역의 것’에 머물지 않게 만든다. 전통을 어렵게 만들지 않는 태도, 그래서 누구의 일상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든다는 점이 이 부스의 가장 큰 매력이다.

12. 찰나를 붙잡는 조형
박승일, 이정은 작가가 전개하는 도자 공예 브랜드 ‘백암요’는 고정된 사물과 함께,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림자에 집중했다. <그림자 시리즈>는 사물과 그림자 사이의 관계를 조형 언어로 풀어낸 작업으로, 실체 없는 형상에 색과 물성을 부여하며 작품의 일부로 확장해냈다. 바닥에 놓인 도자 조형물은 그림자 형태를 닮았지만, 그 자체로 독립적인 성질을 지닌 기물로 존재한다. 사물의 형태와 그 아래의 그림자는 서로를 비추고 설명하는 구조 안에서 감각적 긴장을 만들어냈고, 관람자의 입장에 선 채 그림자와 실체의 개념에 스스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고정된 사물의 개념에 질문을 던지며 시선의 방향 자체를 전환시킨 작업이었다.

13 명상적 울림
‘마스터’, 즉 ‘대가’라는 수식어는 결코 가볍게 붙지 않는다는 걸 실감했다. 20년 넘게 자신만의 작업 세계를 차곡차곡 쌓아온 황란 작가는 단 하나의 작품으로도 깊은 울림을 전하며 보는 이들을 압도했다. 단추, 실, 핀 등 작고 사소한 재료를 두드리고 고정하며 삶에 대한 성찰을 담아온 작가는, 이번 페어에서 선보인 <숭고함의 파편>을 통해 다시 한 번 우리를 명상과 치유의 세계로 이끌었다. 멀리서 보면 반짝이는 듯 보이던 작품은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크리스털, 비즈, 핀이 촘촘히 겹쳐 있었다. 오랜 시간 수행하듯 쌓아올린 작가의 집요한 몰입을 느낄 수 있는 풍경이었다. 말 그대로 숭고한, 감정의 결이 촘촘히 배어 있던 광경에서는 ‘공예가 감정과 서사를 품을 수 있는 예술’임을 명확히 증명해냈다.

14. 한지, 과거에서 현재로
전통 한지가 다채로운 형태로 확장했다. KCDF 사업홍보관과 북촌의 한지문화홍보관 ‘한지가헌’이 함께 선보인 ‘한지관’ 부스는 한지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복합적인 무대로 구성됐다. 오랜 시간 전통을 지켜온 한지 장인들과 현대적 시선으로 한지를 재해석한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지 고유의 질감과 물성이 지닌 조형적 가능성을 드러냈다. 한지가헌은 그간 한지 전시와 아카이빙을 통해 축적해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지를 예술과 생활의 접점에서 재조명하는 데 집중해왔다. 이번 부스에서는 이진 작가의 한지 민화 모빌 카드 <호작도: 평안, 장수, 소망>을 비롯해 ‘2025 한지문화상품 디자인 공모전’ 수상작들이 전시되었다. 한지를 활용한 오브제와 생활용품, 장식품 등이 전통과 동시대 감각의 경계를 넘나들며 한지의 변주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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