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추고, 가리면서도 멋을 낸다.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걷어내고 공간에 여백을 살리면서 실속을 챙기기란 쉽지 않은 법. 여기에 집주인의 감각이 드러나는 가구와 소품까지 더해져 보는 즐거움이 있는 집을 만났다.
↑ 부부를 위한 콤팩트한 다이닝 공간. 주방에는 빌트인 형식의 수납장을 짜 넣어 그릇과 커트러리 등을 수납했으며 주방 싱크대 쪽 벽에 창문을 만들어 단독주택 같은 느낌을 살렸다.
눈에 익숙한 북유럽 브랜드의 가구 몇 점만으로 이 집을 ‘북유럽 스타일’이라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스타일로 규정짓기엔 아까운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푸드 스타일리스트인 아내와 패션 업계에 몸을 담고 있는 남편, 출장이 잦은 부부의 직업상 해외에 나갈 때마다 카페나 숍 등 멋진 공간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리고 결혼한 지 2년이 지나 새로운 집을 갖게 되면서 그동안 머릿속에만 담아뒀던 그들의 취향을 반영한 집을 꾸미기로 결심했다.
푸드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적인 특성 때문에 주방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집주인 김지현 씨. 그런데 시중에 출시된 주방 시스템 가구는 주로 화이트나 블랙 컬러 계열로 나뉘는 것이 문제였다. 그레이 컬러를 좋아하는 그녀는 그레이 톤의 주방 시스템을 갖춘 집을 우연히 보게 됐고, 그 집을 디자인한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 김은정 실장과 연을 맺게 됐다. “디자이너와 저의 취향이 비슷해서 깜짝 놀랐어요. 서로 동시에 같은 가구 사진을 보냈을 때도 있었죠. 원래 미니멀한 스타일을 좋아했는데 이번에 이사하면서 클래식한 느낌으로 집을 꾸며볼까 고민했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보낸 시안은 화려한 몰딩과 앤티크한 가구들이 어우러진 사진들이었죠.” 하지만 김은정 실장은 그녀가 정말 좋아하는 스타일이 미니멀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마음에 들었던 가구가 대부분 심플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가구와 소품을 베이식한 디자인으로 고르되 집이 차가워 보이지 않도록 바닥을 헤링본 패턴으로 시공하고, 걸레받이도 일반적인 높이보다 높게 만들어 클래식한 요소를 가미했다.
1 직업 특성상 그릇이 많은 아내를 위해 주방 곳곳에 수납장을 만들었다.
2 헤링본 패턴의 바닥재와 북유럽 스타일의 가구들이 어우러진 거실. 다이닝 공간이 좁기 때문에 손님이 왔을 때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식탁 용도의 테이블을 거실에 두었다.
3 입구에서 바라본 현관. 오른쪽 문을 열면 보이는 ㄷ자형 선반에 신발을 수납한다.
4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위한 방은 남편이 종종 사용하는 전자피아노와 사이즈가 큰 모빌을 달아 사용하고 있다.
40평형대인 이 아파트는 방이 4개다. 입구 쪽 2개의 방은 드레스룸과 서재로, 하나는 침실로, 남은 방은 앞으로 생길 아이를 위한 방으로 남겨뒀다. 공사를 진행하면서 모든 방과 공간이 새롭게 바뀌었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구조의 주방이었다는 사실은 의뢰인도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삼각형 모양의 싱크대 구조가 독특한 주방에는 창문도 만들었다. 집 안 어딘가에 매트한 느낌의 블랙 프레임 창문을 만들고 싶었던 집주인의 바람이 실현된 공간이다. “그레이 톤의 주방 가구, 매트한 블랙 프레임의 창문을 달고 싶었는데 이를 반영한 김은정 실장님 댁의 주방과 아이 방 사진을 보고 쾌재를 불렀죠. 두 가지 요소를 반영한 꼭 맞는 사례를 찾았으니까요. 주방 벽에 창문을 달았을 뿐인데 창문을 통해 서재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고, 단독주택 같은 느낌도 들어서 여러모로 만족스럽습니다.”
식탁 맞은편은 깔끔한 우드 패널 벽처럼 보이지만 문을 열면 그 안에 수많은 그릇과 커트러리, 패브릭이 정갈하고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사를 하면서도 차마 버리지 못한 애정 있는 아이템들이어서 어떻게든 수납하기 위해 선반을 더 짜 넣기도 했다. 밖에서는 전혀 눈치챌 수 없는 반전 있는 코너로 문을 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고. 남편이 좋아하는 서재는 자유롭게 꽂은 책들이 멋스러운 오픈형 책장과 캔들과 조명, 꽃을 꽂은 벽 수납함 등이 산뜻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다. 가구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제작했고, 대신 소품과 조명에 예산을 투자했다. 맞은편의 드레스룸 또한 군더더기가 없다. ㄷ자형 드레스룸은 문에 전신 거울을 달아 편리하며 공간이 넓어 보이는 반사 효과도 누릴 수 있다.
↑ 일반 매트리스의 2배 정도 되는 높이의 침대. 안방에는 클래식한 디자인의 창문을 달고 황동 소재의 사이드 조명을 달아 고급스러운 분위기다.
집주인이 처음에 생각했던 클래식한 느낌이 반영된 곳은 침실. 높이가 높은 매트리스도 그렇고 창살이 빼곡한 화이트 컬러 창문, 대리석과 원형 거울로 마무리한 욕실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침실의 자투리 공간도 알차게 사용했다. 헤드보드와 같은 컬러로 칠해진 슬라이딩 도어를 열고 들어가면 간이 드레스룸이 나오는데 옷과 액세서리가 많은 부부를 위한 또 하나의 숨은 공간이다. 여행용 가방처럼 어딘가에 세워두기에도 애매한 아이템을 감쪽같이 수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처럼 김지현 씨네 집은 겉으로 보이는 가구와 소품은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하면서도 실생활을 고려한 실용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집 안이 뭔가 허전해 보인다고 하는 분도 있지만 살면서 여백은 필요한 것 같아요. 바닥이나 벽, 몰딩 등을 베이식한 컬러와 디자인으로 시공했기 때문에 언젠가 다른 스타일의 가구가 들어와도 잘 어울릴 수 있죠. 북유럽 가구를 특별히 좋아해서 고른 것은 아녔어요. 최대한 심플한 것을 예산에 맞춰 찾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 정말 마음에 들었던 소파는 아주 고가여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다 보니 북유럽 브랜드 가구들이 많아졌네요.” 집주인은 공사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변하는 집의 모습을 지켜보며 집을 가꿔가는 재미를 알게 됐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 기쁨과 재미를 잊지 못해 다시 이사 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라고. 하지만 부부는 그런 즐거움을 곱씹으며 취향과 비움의 미학을 이유 있게 실현한 이 집에서 한동안 행복할 것이다.
1 대리석과 타일로 마감한 욕실. 블랙 펜던트 조명으로 포인트를 주고 헤이의 거울을 달아 깔끔하게 연출했다.
2, 3 아기자기한 요소가 있는 서재. 책상과 책장은 모두 제작했다. 주로 아내가 즐겨 보는 요리 관련 책을 꽂았으며 좋아하는 캔들, 소품 등으로 책상을 꾸몄다. 벽에는 자석으로 붙일 수 있는 수납함을 달아 식물을 꽂거나 스테이셔너리를 보관한다.
4 양 옆으로 평행하게 설치한 옷장 시스템. 문에 거울을 달아 공간이 넓어보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에디터 신진수 | 포토그래퍼 김덕창(스튜디오 다) | 디자인 및 시공 스타일리스트 김은정(Blog.naver.com/0612kim)
출처 〈MAISON〉2013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