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인한 폐허 위에 세운 실험의 도시, 로테르담. 예술과 삶이 공존하는 공간 속에서 새로운 도시 미학이 피어났다.

거대한 아치형 구조물 위로 디지털 아트워크가 펼쳐지는 마켓홀은 로테르담의 상징적 공간. © Wikimedia

천장 전체를 수놓은 꽃과 과일의 이미지는 마치 현대판 시스티나 천장을 연상케 한다. © Wikimedia

지그재그로 펼쳐진 계단이 인상적인 데포 미술관. © Ianartconsulting
1940년, 폭격으로 많은 것을 잃은 로테르담은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기꺼이 ‘건축의 실험실’이 되기로 했다. 건축가그룹 MVRDV의 마켓홀과 데포 미술관은 로테르담을 대표하는 명소로 손꼽힌다. 마켓홀이 있는 비넨로테 지역은 운하를 통한 상업 활동의 거점지였으나, 폭격을 맞은 후로 약 60년 동안 비어 있었다. 도심 중심지의 낙후된 노천 시장을 개발하기 위해서 민관이 협력해 현대적인 시장과 주거가 결합된 공간을 기획하게 되었다. 총 예산이 1억7500만 유로(약 2740억원) 들고, 10여 년의 과정을 거쳐 2014년에 현재의 마켓홀이 문을 열었다. 지하층은 주차장과 슈퍼마켓, 1층은 푸드 코트, 그 위로는 228세대의 아파트가 들어선 주상복합 구조이며, 거대한 아치 형태가 특징이다. 축구장 두 개 크기만 한 내부는 거대한 빈 공간을 예술품으로 채웠다. 벽부터 천장을 따라 천공 알루미늄 패널에 인쇄된 디지털 미술 작품이 그것이다. 17세기 네덜란드 정밀화를 연상시키는 꽃과 곤충의 이미지가 도심 이미지와 합성된 것으로서, 로테르담의 ‘시스티나 벽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물 옆에서 보면 평범한 아파트인데, 중앙 아치를 통해 보면 완전히 색다른 건축물인 것이다. 천장 곳곳에 뚫린 창문은 실제 위에 거주하는 아파트와 연결되어 있다. 집 안에서 마켓홀을 내려다볼 수 있다니! 이곳이 왜 인기 주거지로 손꼽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켓홀이 들어서며 밀려난 재래시장은 정기장 형태로 여전히 광장에서 열리고 있다. 이 광장 주변도 볼거리가 가득하다. 기울어진 정육면체 형태를 이어 붙인 큐브 하우스, 흔히 ‘연필 타워’ 라고 불리는 주상복합형 아파트는 모두 피트 블롬 Piet Blom의 작품인데, 도시 속 숲 개념을 실현한 통합 프로젝트다. 그 옆으로는 중앙도서관이 자리한다. 이는 윔 퀴스트 Wim Quist의 건축으로서 설비와 구조를 외부로 드러내어 마치 퐁피두 센터를 연상시키는데, 하이테크 건축의 영향을 보여준다. 모두 1970~ 80년대에 지어진 로테르담 재건 프로젝트의 일부다. 마켓홀에서 트램으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뮤지엄 파크는 1990년대 도시 문화 중심지를 위해 조성되었다. 조경가 이브 브루니에 Yves Brunier가 구성한 거대한 가든 사이로 현대미술관과 보이만스 판 뵈닝언 미술관, 자연사 박물관 등이 있다. 보이만스 판 뵈닝언 미술관은 수집가 보이만스와 판 뵈닝언의 기증을 시작으로 이어진 수많은 기증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본관은 1935년 개관한 네덜란드 모더니즘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현재는 보수 휴관 중이다.
그 대신 2021년 문을 연 데포 미술관이 전 세계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6층 규모의 둥근 항아리 형태의 작은 미술관이지만, 미술품 15만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관람도 가능하다. 이 덕분에 관람객은 시대별 혹은 주제별로 구성된 통상적인 미술관의 전시 형태를 넘어 ‘재료’를 중심으로 구분된 각 작품을 수집, 정리된 모습 그대로 관람할 수 있다. 또한 작품을 복원하는 과정을 창문 너머로 들여다볼 수 있다. 어린이 관람객이 작품을 손톱으로 긁어 손상시킨 마크 로스코의 작품도 현재 이곳에서 수리 중이다. 건물 옥상에는 그린 셰프의 레스토랑이 있는데, 옥상 가든 덕분에 밤이 될수록 마치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한때 미술관이 ‘작품의 무덤’이라는 혹평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미술관은 작품 수집 터에 가까운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지그재그로 펼쳐진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적극적으로 작품을 탐색하는 관람객들 덕분에 그 어떤 미술관보다 역동적이며 에너지가 넘친다. 로테르담은 젊은 건축가들의 실험 덕분에 지금은 건축만으로도 충분히 여행할 가치가 있는 문화도시로 우뚝 섰다. 멋진 건축물일수록 사람이 없을 때 찍은 사진이 멋있고 또 막상 현장에 가면 사진만 못한 경우가 많은데,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있을 때 더욱 생생해지는 건축과 도시를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