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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투어리즘의 시대, 관람객이 넘쳐나는 지금의 미술관은 ‘작품 보는 법’을 어떻게 다시 가르칠 수 있을까.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작품을 촬영하기 위해 몰려든 관객들.

미술관에 관람객이 너무 없던 때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미술관으로 오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조사해보니,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대체로 그 문화를 즐길 만한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온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들은 박물관에서 많은 정보를 접하고 사고의 폭을 넓힘으로써 좀 더 수준을 높이게 되며 사회 엘리트층이 된다. 반면 박물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세계가 낯설고 지루해 다시는 찾지 않게 되고, 그래서 정보와 사고의 확장성을 갖지 못하게 되어 사회적 성취가 제한된다는 것이다.

1960년대 프랑스에서 진행된 피에르 부르디외의 연구 <예술에 대한 사랑(L’Amour de l’art)>의 주요 내용이다. 부르디외는 연구를발전시켜 취향은 곧 자기가 속한 계급의 반영이라는 ‘아비투스 Habitus’라는 개념을 내놓았다. 이는 곧 프랑스 문화 정책의 기본 토대가 되었다. 소외된 계층에게도 문화적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경제 자본의 분배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이다. 문화의 접근성을 높임으로써 사회 계층의 이동이 자유롭고 사회 자원이 평등하게 배분되는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루브르 미술관을 지하철과 연결하고, 유리 피라미드를 통해 입구를 다원화하고, 청소년이나 소외 계층을 배려한 입장료 정책, 학교와 연계된 매개 프로그램을 확장한 것 등이 박물관의 문턱을 낮추기 위한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서 아비투스는 마치 자기계발의 절정인 듯 변질된 형태로 소개되고 있는 듯하다. 경직된 사회의 해법이 아니라, 계층 간 갈등을 심화하고 조장하는 형태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게다가 이를 드러낼 수 있는 방편이 생겼으니 바로 SNS 미디어다. 엘리트 문화인의 취향과 네트워킹을 증명하기 위한 콘텐츠가 많아지면서, 미술관은 늘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게 되었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영국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와 루브르 박물관. © ianartconsulting

이제 미술관의 과제는 새로워졌다. 사람들을 오게 하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이 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가 문제다. 루브르 미술관 직원들이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겠다며 파업을 벌인다는 소식이 흥미로웠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연일 관광객이 몰려든다고 한다. 야간 개장이나 분관 설립, 수장고형 미술관 등은 관람객을 분산시키기 위한 대안 중 하나다. 둘째로, 좀 더 진정한 과제는 미술관 방문의 효과를 높여주는 일이다. 이번 아트 위크에서도 사진만 찍어대는 이들을 많이 목도했고, ‘우리 이제 다 봤지? 나가자’라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루브르 미술관에서 모나리자가 있는 방까지 빨리 걸어가서 이제 봤으니 나가자는 말투였다. 이렇게 해서는 아비투스를 얻기 위해 미술관에 간 목적을 결코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누구나 미술관을 가는 시대가 되었으니, 그것이 그리 대단히 고상한 취향일 것도 없는데다가, 작품을 ‘봤다’고 체크하는 것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일 뿐 감상과는 거리가 먼 태도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바로 작품을 ‘보는’ 것이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천천히 보기’를 제안하며 그림 감상을 음악에 비유하기도 했다. 음악에 대해 잘 말할 수는 없지만 그저 들으면 되는 것처럼, 그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도 즐길 수 있고, 그 방법은 한 그림을 오랫동안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미술관에서 작품 하나를 보는데 평균 8초를 소비한다고 하니, 시도해보면 분명 변화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는 오래 보기가 힘들 수 있다. 오래 보든 짧게 보든, 궁극의 과제는 방금 본 작품을 끊임없이 나와 관계 짓는 것이다. 짧게 봐도 생각은 계속할 수 있다. 꼭 작품 앞에서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하는 식으로 삼천포를 수만 리 나갔다 들어왔다 하며 작품을 끊임없이 해석하다 보면 어느 새 평소와는 다른 많은 생각을 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술 작품은 그 지점을 보이지 않는 패턴으로 그려놓은 퍼즐이고, 이를 푸는 과정이 바로 감상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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