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아이콘은 단순히 기록에 머물지 않는다.
잊혀진 아카이브에서 되살아난 오브제는
오리지널을 존중한 리에디션으로,
또는 동시대 디자이너의 아이디어와 지속가능한 소재로 확장, 변형되어 다시 태어난다.
과거의 유산이 오늘의 감각 속에서 새롭게 빛나는 흥미로운 순간.


곡선의 실험, 조 콜롬보
1964년, 조 콜롬보는 세 개의 구부린 합판 조각만으로 이탈리아 디자인의 미래를 예고했다. 암체어 No.4801은 나사나 금속 부품을 전혀 쓰지 않고 간단한 이음 방식으로만 연결된 의자였다. 넉넉한 형태는 인체공학적 편안함을 제공하면서도, 작은 크기와 가벼운 무게 덕분에 다양한 공간에 쉽게 놓을 수 있었다. 당시 카르텔은 플라스틱을 중심으로 한 혁신적 제품군으로 유명했지만, 이 암체어는 유일하게 전목재로 제작된 사례였다. 빨강, 흰색, 검정의 대담한 색상으로 선보인 의자는 알바 알토, 찰스 & 레이 임스의 합판 실험을 잇는 동시에, 조 콜롬보 특유의 미래 지향적 감각을 담아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2011년 카르텔은 이 작품을 다시 불러내며 리에디션을 선보였다. 원작과 동일한 치수로 제작하되, 소재는 블랙, 화이트, 투명 PMMA로 교체해 브랜드의 정체성과도 연결했다.


사진 속에서 되살아난 기억, 안나 카스텔리 페리어리
지난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카르텔 뮤지엄 25주년을 기념해 열린 전시 〈GASTEL@KARTELL〉은 브랜드와 사진가 조반니 가스텔의 오랜 우정을 되돌아보는 자리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이어진 협업 속에서 그는 가구를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패션처럼 연출하며, 이미지에 시적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번 프로젝트에 공개된 아카이브 속 사진들은 오늘날 복원 디자인을 바라보는 흥미로운 단초가 된다. 그 가운데 1967년 처음 선보인 안나 카스텔리 페리어리의 콤포니빌리 Componibili는 원형 모듈을 층층이 쌓아 다양한 쓰임새로 변주되는 수납장으로서, 시대를 초월한 카르텔의 클래식이다. 지름 32cm의 콤팩트한 형태와 다양한 마감은 여전히 현대적인 감각을 전한다.


모듈의 언어, USM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USM의 사무실은 이미 미래를 닮아 있었다. 규칙적인 모듈과 선명한 컬러 블록으로 채워진 아카이브 사진은USM이 어떻게 근대적 오피스 풍경을 새로 썼는지를 단번에 보여준다. 1965년 스위스에서 시작된 USM 할러 시스템은 단순한 가구를 넘어 모듈 디자인의 언어를 정의했다. 몇 가지 기본 구조체만으로 책상, 선반, 파티션까지 확장되는 구조는 주거와 오피스 모두에 적용되며, ‘유연한 구조가 곧 디자인’이라는 명제를 증명했다. USM의 시스템은 이후 다양한 컬러와 조합으로 확장되며 현대적 라이프스타일 속에서 끊임없이 변주돼왔다. 이 철학은 올해 공개된 USM 할러 소프트 패널로 이어진다. 프랑스 디자이너 마르크 베노와 케빈 존스의 협업으로 탄생한 이 패널은 마그네틱 방식으로 간단히 탈부착되며, 내구성 있는 폴리에스터 패브릭과 40% 해양 재활용 플라스틱 코어로 지속 가능성을 더했다. 60년 넘게 진화해온 USM의 모듈 시스템은 오늘날에도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가장 견고한 언어로 남는다.




합판의 혁신, 폴 케흘름
1952년, 폴 케홀름이 프리츠한센에서 처음 선보인 PK0 체어는 의자라기보다 조각에 가까웠다. 합판이라는 예기치 못한 소재로 불필요한 것을 덜어낸 곡선을 만들었고, 단 두 개의 몰드 합판과 간결한 스페이서만으로 전통적 구조를 대신했다. 그 파격은 이후 케홀름의 디자인 세계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오리지널 디자인은 1997년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처음 복각되며 PK0™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2022년, 더욱 견고한 구조와 세밀한 디테일로 재탄생한 버전이 바로 오늘날의 PK0 A™다. 오레곤 파인과 블랙 애시로 제작된 이 의자는 예술성과 기능성을 아우르며, 공간에 놓이는 순간 하나의 조각 작품처럼 존재감을 발휘한다.


빛의 폭발, 찰스 & 레이 임스
1949년, 찰스 & 레이 임스는 황동 튜브와 자동차 부품을 나무 구 안에 조립해 전혀 새로운 조명을 만들어냈다. ‘갤럭시 Galaxy 팬던트’라 불린 이 작품은 같은 해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열린 에서 공개되며, 근대 디자인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아카이브 속에 머물던 갤럭시는 2024년 까시나에 의해 처음으로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임스 오피스와 긴밀히 협업해 원작의 실험적 과정을 존중하면서도 현대적 기술과 소재를 접목했다. 구체적으로는 중심 구를 둘러싼 36개의 길이가 다른 금속 막대 끝에 각각 LED 광원을 장착해, 별빛이 흩뿌려진 하늘을 연상시키는 구조를 완성했다. 여기에 ‘플러그 앤 플레이’ 시스템을 더해, 막대를 간단히 삽입해 조립할 수 있게 했고, 완성품의 크기에 비해 포장 부피를 극도로 줄이는 혁신도 이뤄냈다.



잊힌 사진에서 태어난 말, 프리츠한센
1946년, 장인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흔들 목마 한 점이 오래도록 아카이브 속에 묻혀 있었다. 정식으로 출시되지 않았던 이 작품은 단 두 장의 사진으로만 남아 있었고, 오랫동안 잊힌 기록이었다. 그러다 2021년, 헤리티지 팀이 사진을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프리츠한센은 이 흔들 목마를 복원하기 위해 수많은 실험과 시제품 제작을 거쳤다. 첼로와 바이올린 제작 방식에서 착안한 곡률 연구, 몰드 합판과 로프, 남은 가죽을 활용한 디테일 등은 장인정신을 고스란히 이어낸 과정이었다. 전통과 현대 기술을 오가며 완성된 오늘날의 ‘록킹 홀스 Rocking Horse’는 과거의 잊힌 흔적이 세심한 복원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그 결과 한 세기를 건너온 유산은 다시금 공간 속에서 호기심과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킨다.





강철로 쓴 유산, 마르셀 브로이어
1920년대 바우하우스 식당 한편에 심플한 스툴 하나가 놓였다. 언뜻 소박해 보이지만, 자전거 핸들바에서 착안한 마르셀 브로이어의 발상은 당시 혁신적이었다. 금속 파이프를 구부려 만든 B9 스툴은 곧 일상의 테이블과 의자로 확장되며 ‘튜브 강철 가구’라는 전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토넷은 그 시작을 잊지 않는다. 컬러와 소재를 달리한 스페셜 에디션, 야외에서 쓸 수 있도록 변주된 아웃도어 버전, 그리고 같은 아이디어에서 탄생한 B97 네스팅 체어까지 한 세기를 건너온 계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여기에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는 패션 디자이너 질 샌더가 S64 체어를 재해석하며 바우하우스 정신에 현대적 감각을 더했다.




세 거장의 약속, 르 코르뷔지에 – 피에르 잔느레 – 샬롯트 페리앙
1965년 르 코르뷔지에, 피에르 잔느레, 샬롯트 페리앙이 생존해 있던 시절, 까시나는 이들의 가구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파리 살롱 도톤 Salon d’Automne에서 선보인 혁신적 전시 <주거 내부 장비(L’Équipement intérieur d’une habitation)>의 도면과 원작 가구를 면밀히 분석한 끝에 장인의 수작업은 대량 생산의 기반이 되었고, 이는 곧 세계적 성공으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60년, 까시나는 여전히 세 디자이너의 재단과 협력하며 컬렉션을 발전시켜왔다.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는 네 가지 모델을 유광 레드, 블루, 그린 프레임과 모헤어 벨벳, 새들 가죽 조합으로 새롭게 선보였다. 또한 테일러링 하우스 키톤과 협업해 포퇴유 그랑 콩포르, 그랑 모델, 뒤라블 Fauteuil Grand Confort, Grand Modèle, Durable의 한정판을 선보였다. 블루와 버건디 컬러의 캐시미어로 마감된 이 버전은 각각 60피스만 제작되었으며, 글로시 블루 프레임과 지속 가능한 소재가 더해졌다.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 조명, 조제프 앙드레 모트
1959년, 조제프 앙드레 모트가 디자인한 랑프 아 포제 Lampe à poser J13은 오랫동안 컬렉터들의 꿈의 오브제였다. 일본식 등롱에서 영감을 받은 미니멀한 조명은 희소성과 시적 정서를 함께 품으며, 20세기 프랑스 조명 디자인의 정점으로 꼽혀왔다. 당시 공항과파리 메트로 등 상징적 프로젝트를 맡았던 모트는 기능성과 조형성을 겸비한 작품을 남겼다. 절제된 곡선과 단호한 발명 정신이 담긴 J13은 오늘날에도 시대를 초월해 거실, 침실, 서재 어디에 두어도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빛을 선사한다.



돌아온 아이콘, 아프라 & 토비아 스카르파
1969년, 아프라 & 토비아 스카르파가 디자인한 소리아나 Soriana는 풍성한 곡선과 패브릭을 거대한 금속 브레이스로 고정한 파격적 구조로 주목받았다. 이 작품은 1970년 콤파소 도로를 수상하며, 여유롭고 비공식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상징하는 가구로 자리매김했다. 리에디션되어 출시한 컬렉션은 토비아 스카르파와 협력해 원작의 정통성을 존중하면서도 순환 소재로 새롭게 태어났다. 블랙, 블루, 버건디, 그린, 화이트 등 다양한 프레임 컬러와 패브릭, 가죽 조합이 추가되었고, 원작 팬들을 위해 크롬 버전도 유지됐다.




꽃의 빛, 올리비에 무르그
1967년, 올리비에 무르그는 알루미늄 꽃잎을 금속 줄기에 고정해 다양한 형태로 변주할 수 있는 꽃 모양 조명을 완성했다. 새롭게 등장한 은색 캡 전구를 사용해 빛을 반사시키는 방식은 혁신적이었고, 독창적인 조명 효과를 만들어냈다. 파리에서 태어나 에콜 불과 국립장식미술학교에서 수학한 무르그는 일찍부터 실험적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가구와 조명을 탐구하며, 20세기 프랑스 디자인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조명은 단순한 빛의 도구가 아니라, 조형과 기술이 만나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