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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 있던 김중업의 유산이 다시 시간의 흐름 속에 들어섰다.
복원과 재해석을 거쳐 지역의 삶과 문화를
품어내는 복합문화 공간으로 새롭게 자리한 연희정음 이야기.

김중업의 ‘원(圓)’의 언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중심 계단.

한국 현대건축 1세대 김중업 건축가의 말년 작업을 대표하는 장석웅 주택은 오랫동안 그가 남긴 유산의 일부로 존재해왔다. 건물 속원형 계단, 스테인드글라스의 빛, 붉은 벽돌의 표면, 완만한 곡선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리듬감은 모두 김중업이 한국 근대건축의 언어를 정리한 방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였다. 그러나 주거에서 상업 공간으로, 그리고 다시 방치된 건축물로 기능이 변하며 건물은 점차 훼손되어갔고, 본래 구조와 재료는 흐트러진 채 남아 있었다. 건물이 복구를 마치고 40여 년의 세월을 지나 대중에 문을 열게 된 것은, 쿠움파트너스 김종석 대표의 집요한 의지 덕분이었다. 연희동은 그에게 오랜 기간 삶의 터전이자 치열한 창작의 흔적이 머문 동네다. 1988년 연희동에 처음 정착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는 30년 가까이 동네의 활성화를 개인적인 사명처럼 여겨왔다. 그런 김종석 대표에게 이 건물은 건축적 유산인 동시에 주민들의 네트워크를 활성화할 수 있는 훌륭한 지역 거점이 될 수 있는 장소였다. “김중업 건축가에게 ‘삶을 위한 건축’이 ‘가정의 삶’을 뜻했다면, 저는 ‘동네의 삶’을 생각하며 이 장소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기존 건물의 오리지널리티를 유지한 적벽돌의 원형 구조 옆에 투명한 유리 파사드를 새롭게 세웠다.

연희정음의 내부 구조는 원형 축을 중심으로 한 김중업의 설계를 존중하면서 새 쓰임을 위한 최소한의 조정만 더했다. 지하는 카페 ‘푸어링아웃’과 문구소품숍 ‘올 라이트’, 패션 브랜드 ‘메종 스테디 스테이트’ 쇼룸과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는 커뮤니티 룸으로 구성했다. 가게들은 모두 연희등을 기반으로 성장해온 곳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 깊다. 특히 모든 장소는 중정을 중심으로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사방으로 연결되게 설계했다. 1, 2층은 스테인드글라스와 곡선 벽이 만들어내는 건축적 경험을 전면에 드러내는 문화 공간으로 자리한다면, 3층은 강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용하는 라이브 홀로 구성했다. 그중에서도 김종석 대표가 연희정음을 복원할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그린 공간은 사랑방. “연희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인 동시에, 동네의 중심에 위치한 곳이다 보니 거점이 될 수 있겠다 싶었죠. 창작자, 골목 상인, 지역 주민이 모여 이야기와 지식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김종석 대표와 윤태훈 소장.
벽돌 매스의 곡선과 유리 파사드의 직선이 대비를 이루며 건축의 시간성을 강조한다.
지하에 자리한 ‘메종 스테디 스테이트’의 쇼룸.
건물의 중심을 관통하는 원형 계단은 김중업의 조형 언어를 응축한 핵심 구조다.

복원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김중업의 조형적 언어를 가능한 한 그대로 복구하는 것이었다. 가장 큰 난관은 삼각 전타일이었다. 이미 단종된 재료라 동일 제품을 구할 수 없었고, 결국 김종석 대표는 전벽돌을 절단해 삼각 모듈 6000여 장을 직접 제작해야 했다. 지하에서 발견된 적벽돌 조각들은 유실된 부분을 보완하는 데 쓰였고, 손상된 스테인드글라스와 꼭 대기 층의 샹들리에 또한 원형을 유지한 채 정교하게 보수됐다. 누수로 훼손된 적삼목 천장 역시 같은 수종으로 재시공하는가 하면, 한때 철거됐던 2층 발코니 또한 과감히 되살려 원래 형태을 회복했다. 김중업 건축의 핵심인 ‘원(圓)’의 흐름을 복구하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었다. 원형 계단은 지하에서 3층까지 건물을 관통하며 공간의 축을 형성하고, 반원형 거실과 곡선의 입구, 마당의 원형 타일은 각각의 장면을 매끄럽게 연결한다.

스테인드글라스는 기존 형상을 유지한 채 자리를 지킨다.
다시 복원한 2층 발코니와 출입구 아치.
개관전 <대화: 두 건축가의 운명적 만남> 전시 전경.

개관전 <대화: 두 건축가의 운명적 만남>을 기획한 건축사사무소 사티 SATHY의 윤태훈 소장은 김중업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해석 축을 제공한다. 사실 전시는 연희정음 개관 전부터 윤태훈 소장이 별도로 준비해오던 작업이었다. 과거 조민석 건축가와 함께 주한 프랑스대사관 리모델링을 주도한 그는 한국-프랑스 수교 140주년 기념 전시를 기획하던 중 자연스럽게 김종석 대표와 연이 닿았고, 그 인연이 본 전시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건축을 업으로 삼아온 윤태훈 소장은 한국 건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김중업 건축가의 작품이 적절히 보존되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현실을 누구보다 안타깝게 여겨왔다. “옛 제주대학교 본관이 철거된 일도 그렇고, 김중업 건축가의 작품들이 하나둘씩 훼손되는 게 너무 아쉬웠어요. 건물들이 더 망가지기 전 사진으로라도 기록하며 경각심을 일깨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김종석 대표를 만나게 된 거죠.” 윤 소장은 사진 작가 김용관과 마누엘 부고의 작업, 박종선 디자이너의 가구를 통해 르 코르뷔지에와 김중업의 사유를 현재 공간 안에서 다시 펼쳐놓고자 했다. 이 세 작가의 작업은 서로 병치되며 복원된 공간의 구조와 자연스럽게 맞물리는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3층의 반원형 적삼목 천장은 방수, 단열, 흡음 성능을 보강해 동일 수종으로 재시공했다.
김중업 특유의 ‘원’ 모티프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지하 공간은 지역 커뮤니티를 위한 사랑방으로 운영하고 있다.
지하에 자리한 카페 ‘푸어링 아웃’.
문구와 생활 소품을 다루는 숍 ‘올 라이트’의 지하 전경.

연희정음은 한 시대의 건축을 되살리는 데서 더 나아가, 오래된 건물이 어떻게 다시 오늘날의 건축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증명해낸 장소다. 하지만 이 건물의 의의는 과거를 기억하는 것보다 미래를 준비하는 방식에 있다. “이곳은 우리가 의도를 설정하고 이끌려고 하기보다는, 방문객들이 찾아와서 만들어가는 공간인 것 같아요. ‘삶의 건축’이라는 김중업 선생님의 철학이 건물과 함께 다시 의미를 찾았다고 느껴져요. 그게 가장 행복하죠.” 시간을 품은 건축이 새로운 쓰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두 사람의 신념이 오랜 건물을 지탱하며 첫 출발점에 섰다. 이후의 이야기는 이곳을 찾는 이들이 채워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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