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브론테의 1847년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에메랄드 페넬 Emerald Fennell 감독의 <폭풍의 언덕>이 개봉 이후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황폐한 요크셔를 배경으로 등장인물들의 사랑과 집착, 광기를 담아내며 음울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는 평이다. 영화 전반에 형성된 이 분위기는 무엇보다도 프로덕션 디자이너인 수지 데이비스 Suzie Davies의 공이 컸다. 영화 <콘클라베>, <솔트번>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총괄하며 오스카 후보에도 올랐던 데이비스가 이번에는 고딕 양식의 부활이 유행하던 19세기 영국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먼저 주인공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성장하는 언쇼 가의 저택, ‘워더링 하이츠 Wuthering Heights’를 보자. 사나운 바람과 추위, 거친 돌밭 언덕 위에서는 나름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저택도 그저 유약한 인간의 구조물일 뿐이다. 데이비스는 여기에 불균형과 불완전함을 더했다. 먼저 주방의 천장에 불안과 억압을 설치해 두었다. 히스클리프 역을 맡은 제이콥 엘로디 Jacob Elordi 의 키가 196cm인 점에 착안해 그의 키보다 정확히 3cm 낮게 천장을 만든 것. 이는 히스클리프가 집에 완전히 속하지 못해 늘 불편함을 느끼고, 똑바로 서있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반면 거실의 천장은 3층 정도의 높이로 지나치게 확장했다. 이것은 재정 상태는 파탄에 가깝지만 귀족이라는 계급의 자부심을 고집하는 언쇼 가의 허영을 나타낸다. 이처럼 워더링 하이츠는 스크린 속에서 지나치게 낮거나 높은 공간으로 축소, 확장되며 보는 이가 미묘한 불편함을 느끼도록 한다.



돌무더기 언덕 위의 워더링 하이츠와는 반대로, 캐서린이 결혼하는 에드가 린턴의 저택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 Thrushcross Grange’ 는 인형의 집처럼 아름답다. 실제로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인형의 집 모형을 먼저 만든 후 이에 맞춰 영화 세트 속 저택을 지었으므로 화려하면서도 비현실적이다. 핏빛의 바닥, 압도될 정도로 길다란 식탁을 가득 채운 호화로운 양식들, 끊임없이 등장하는 캐서린의 아름다운 드레스들 사이로 권태가 스민다. 수지 데이비스는 이 공간에 압화된 꽃, 꽃병 속에 갇힌 금붕어, 그리고 저택을 압축해놓은 인형의 집 등을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결국 이 화려한 저택이 감옥임을 은유했다. 무엇보다 데이비스는 어긋난 비례로 이곳을 설계했는데, 방과 창문은 지나치게 크며 침대를 비롯한 협탁과 가구들은 이에 비해 작은 것으로 배치했다.

특히 캐서린의 방은 영화 속에서 ‘피부의 방’으로 불리는데, 연한 핑크의 벽지는 실제로 피부를 연상시킨다. 이 벽면이 굉장히 흥미로운데, 실제 마고 로비의 팔을 고해상도로 촬영한 후 이를 3~4배 크기로 확대해 제작했다. 실제 벽면의 무늬가 캐서린의 혈관이자 피부 그 자체인 것이다. 심지어 바닥에 깔린 카펫조차도 캐서린의 피부와 혈관, 주근깨를 상징한다.


원작과는 다르게 각색된 <폭풍의 언덕>에 다양한 평이 쏟아지는 가운데,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설치한 곳곳의 억압과 불안과 불균형을 찾아보는 재미는 충분히 보장할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