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라 하면 딱히 떠오르는 대표 요리가 없지만 알고 보면 해산물 요리부터 땅속에서 나오는
자연 수증기로 익힌 항이 요리까지 의외의 요리가 있다. 별미가 가득한 뉴질랜드로 떠나는 미식 여행기.
나라 이름을 듣자마자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음식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개중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음식과 잘 연관이 되지 않는 나라도 있다. 영국 문화의 세례를 받은 나라들이 그렇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정치범들이 이민 역사의 첫 장을 장식한 뉴질랜드의 경우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뉴질랜드 이민을 준비 중인 지인이 ‘현지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은 가정식 월남쌈’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키위 Kiwi, 즉 뉴질랜드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렇게 항변하며 억울해할 것이다. “우리도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음식이 있다고! 어… 그러니까… 뉴질랜드 미트 파이 먹어봤어?”… 미안하다. 먹어봤다. 뉴질랜드에서 미트 파이는 연간 1인당 15개가 소비되는 ‘국민 음식’이다. 많은 부분에서 영국 요리와 궤를 같이하는 뉴질랜드 요리이지만 크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요리에서 ‘고기’가 차지하는 위치다.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영국에서 고기는 상류층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뉴질랜드에서는 거의 모든 계층이 매 끼니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그만큼 뉴질랜드는 식자재 면에선 풍성하기 이를 데 없는 땅이다. 해산물 면에 있어서도 빠지지 않는다.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이, 이 해역에서 잡히는 고기들의 크기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뉴질랜드 북섬, 베이 오브 아일랜즈의 아침은 일찍 시작된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아 검은색으로 출렁이는 바다를 향해 어선들은 경쾌한 엔진 소리를 울려대며 돌진해 간다. 붉은색에서 흰색으로, 기세를 되찾으며 떠오른 태양빛을 받아 바다가 눈이 시린 코발트빛이 되었을 무렵, 선장 버코 씨가 외쳤다.
“킹피시 King fish예요!” 그가 가리킨 쪽엔 물보라라고 하기엔 너무나 큰 은색 섬광이 번쩍였다. 방어의 일종인 킹피시가 수면 위로 뛰어오른 것이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과 달리 날랜 몸놀림으로 버코 선장은 낚싯대를 잡아챘다. 그러고는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의 메이저리그 투수처럼 팔을 흩뿌렸다. 포물선을 그리며 낚싯바늘이 날았다. 순식간에 20m를 비행한 바늘이 착수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버코 선장은 릴을 감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은 맹수와 똑같아요. 앞에서 도망가는 게 있으면 무조건 추격하고 보죠.” 낚싯줄 끝에 매달려 있는 것은 보통의 미끼가 아닌 슬랩 Slab이라고 하는 일종의 모조 물고기다. 중심에서 약간 어긋나게 낚싯줄과 연결된 덕에, 릴을 감으면 자동으로 꼬리를 흔드는 물고기와 같은 움직임을 보이며 딸려온다. 진짜 물고기처럼 등은 푸르고 배는 희게 채색된 것은 물론 눈과 꼬리지느러미까지 있다. 물론 그 꼬리지느러미 안쪽엔 날카로운 바늘이 감춰져 있다. “보세요!” 물살을 가르며 달려오는 슬랩의 뒤를, 1m는 족히 되어 보이는 킹피시 한 마리가 뒤쫓고 있었다. 물고기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 때의 그 녀석은 분명히 얼빠진 미소를 띠고 있었다. 소시지를 발견한 강아지와도 같은. 그날, 우리는 1m짜리 킹피시 두 마리와 1m가 약간 안 되는 빨간 퉁돔 세 마리를 낚았다. 석양이 내려앉는 해안의 모래사장 위에 세 남자는 지는 해를 담고 반투명으로 빛나는 생선살과 한 병의 간장 그리고 세 캔의 맥주를 두고 앉았다. 이빨이 닿자마자 입안 가득 퍼지는 남태평양의 맛. 어설픈 요리 따위로는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최고의 맛이었다. 눈물이 한 방울 흐른 것 같긴 한데 정신없이 먹느라 기억은 잘 없다.
입맛 면에선 청빈하기 이를 데 없는 영국계 이민자들과는 달리 뉴질랜드의 원주민, 마오리들은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요리를 즐겼다. 지금으로부터 600~1000년 전, 폴리네시아 제도로부터 카누를 타고 건너온 이들은 고향에서 고구마, 토란 등의 식용식물을 가지고 왔고 새 정착지에 지천으로 널린 고사리와 후후 풍뎅이의 애벌레를 재빨리 자신들의 식단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지금껏 천적이라고는 없어서 사람을 보고도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인 새들을 먹어치워 나갔다. 1770년 즈음에 멸종될 때까지 키가 3.6m에 달했던 모아새의 고기는 마오리들이 가장 선호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화산과 온천의 땅인 뉴질랜드 북섬에 사는 마오리들은 그에 걸맞는 새로운 요리법도 발전시켰다. 지구를 오븐이자 냄비로 이용하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거대한 화산 분화구이기도 한 로토루아 호수 근처의 화카레와레와 마을은 지열을 이용한 마오리의 전통 요리, 항이 Hangi를 맛볼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안녕하세요.” 코를 맞대는 마오리식 인사법을 마치자 가이드 마리아타는 우리를 마을 한가운데로 안내했다. 마을길을 따라 늘어선 수증기 자욱한 온천과 지열 지대가 이곳이 두 개의 대륙판이 맞부딪히는 지각 충돌의 현장임을 알게 해준다. “원래 우리 조상들은 아열대 지역에 살다가 온대에 속하는 뉴질랜드로 건너왔죠.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이런 지열 지대에 마을을 만들게 된 거예요.” 겨울에도 온수가 무한정 공급되는 이 마을의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온천은 샴페인 풀이라고 불리는데, 탄산이 섞인 물이 샴페인 같은 거품을 내뿜고 있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곳의 물은 거의 섭씨 100℃에 육박한다. 기분 좋게 몸을 담글 요량으로 들어갔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거대한 온천의 용도는 다른 데 있었다. “여긴 거대한 연회장이나 다름없어요. 마을 잔치가 열리면 모두에게 음식이 분배되고 이 온천가에 모두 둘러앉아 재료를 끓는 물에 넣어 익혀 먹었던 거죠.” 말인즉슨,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샤브샤브 냄비가 바로 이 풀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이 마을에선 이 샴페인 풀의 물로 익힌 옥수수와 땅의 갈라진 틈에서 새어나오는 유황 증기로 익힌 항이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마오리의 전자레인지입니다.” 유황 증기가 올라오는 틈에 항이 요리 전용으로 파묻어놓은 뚜껑 달린 상자를 가리키며 마리아타가 말했다. 이곳에 고기와 감자, 옥수수, 닭고기, 생선과 랍스터 등의 각종 해산물을 담고 한 시간 반 정도 놔두면 그대로 잘 익은 찜 요리가 완성된다. “항이 요리할 때는 어떤 조미료도 필요 없어요. 광물질이 섞인 유황 증기가 독특한 향을 더해주죠.” 완성된 항이 요리는 육즙이 촉촉하게 배어나올 뿐 아니라 아직 젊은 이 땅이 내뿜는 건강한 기운이 함뿍 배어 있었다. 남김없이 접시를 비우고 나자 대지의 더운 열기가 뱃속에서 은은하게 올라왔다. 300년 전 식사를 마친 마오리가 그러했듯이 온천을 찾아 느긋하게 몸을 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탁재형(다큐멘터리 PD) | 에디터 이경현 | 일러스트레이터 김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