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한 결 속에 숨겨진 뜨거운 진심. 멕시칸 퀴진의 낯선 아름다움을 단단한 언어로 빚어내는 진우범 셰프.

옥수수 반죽의 꾸덕한 느낌을 살린 관자 소페. 북해도 관자를 큐어링한 후 사과나무로 훈연해 올렸다.

아즈텍 분위기를 풍기는 에스콘디도 매장 전경.

에스콘디도의 진우범 셰프.
지난 2월,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25 리스트에 ‘에스콘디도’의 이름이 새롭게 등재됐다. 아시아 최초로 멕시칸 레스토랑이 미쉐린 스타를 받은 순간이었다. “막연히 꿈꾸던 일이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냥 내 음식을 하자’는 마음으로 일해왔는데, 그동안의 노력을 인정받는 것 같아 정말 감사했죠.” 진우범 셰프의 에스콘디도는 한국에서는 생소한 멕시칸 파인다이닝을 선보이는 레스토랑이다. ‘멕시칸 퀴진의 확장’을 모토 삼아 메뉴를 개발하고, 레스토랑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거듭해오던 중 들려온 반가온 소식은 에스콘디도의 음식 철학을 계속해서 전개해갈 동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미쉐린 스타를 받은 후 멕시코 음식의 미식적 가치를 더욱 풀어내기 위해 메뉴를 개편하기도 했다. 셰프 입장에서는 두려움이 따르는 시도였지만, 현지 음식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손님들이 좋아할 것으로 예상되는 자신 있는 음식이 있는가 하면,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음식도 있어요. 멕시코 음식은 절대 타코만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손님들이 지금 당장은 우리 맛을 이해해주지 못할 수 있지만, 이를 설득하는 것 또한 우리 몫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이라 해도 결국 손님들이 공감해주셔야 우리 음식에 가치가 생긴다고 믿거든요.” 그렇게 코스의 피날레를 장식하던 몰레 요리는 이제 코스 중반부부터 시작해, 세 가지 버전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몰레는 과일, 고추, 향신료 등 30여 가지 재료를 사용해 만드는 멕시코 전통 소스로서, 재료 하나하나의 특징을 섬세하게 살리는 통상적인 다이닝 메뉴와는 거리가 있다. 옥돔, 한우, 닭고기 등 제철에 따라 몰레에 곁들이는 재료가 달라지지만, 프로틴은 일종의 가니시 역할만 할 뿐 메인은 소스 그 자체다. 멕시코 요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이들에겐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요리인 만큼, 코스에서 몰레의 개수를 늘린 것은 과감한 도전이었다. “음식을 말할 때 문화적인 해석도 필요해요. 우리가 멕시코 음식에서 생각하는 중요한 요소와 철학을 한국에 풀어내기 위해서는 몰레의 비중을 늘리는 게 옳다고 판단했어요.”

도미 알파스톨 타코. 멕시코 열매 아치오때의 산미를 살린 소스를 숙성시킨 도미에 발라 숯에 구웠다.

매장 한쪽엔 대기하는 손님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가장 멕시코다운 음식’ 몰레 네그로에는 멕시코 칠리와 향신료, 초콜릿 등을 포함한 30가지 이상의 재료가 사용된다.
에스콘디도에서는 여러 종류의 옥수수를 직접 갈고,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토르티야를 굽는 ‘프레시 토르티야’를 고집한다.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지만 맛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옥수수라는 생각으로 꾸준히 지키고 있는 방침이다. 멕시코 음식의 기본 요소가 옥수수라면, 맛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러스틱함이다. “파인한 음식이든 스트릿 타코이든 그 특유의 투박함과 러스틱함, 날것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해요. 미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퀴진은 분명 존재하지만, 멕시코 음식에서 추구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에요. 멕시코 음식에서 전통적으로 해오던 방식, 투박하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맛과 미가 있어요. 에스콘디도 매장을 아즈텍스러운 분위기로 꾸민 것도 이 때문이에요.” 어둡고 투박한 분위기를 내는 매장의 테이블은 카운터 다이닝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멕시칸 퀴진을 낯설어하는 손님들이 음식의 가치를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메뉴마다 설명을 곁들이기 위해서다.
멕시칸 음식을 논할 때 데킬라도 빠질 수 없다. “데킬라나 메즈칼 모두 아가베 스피리츠인데, 증류주 중 원재료에 이처럼 시간을 많이 들이는 증류주는 없습니다. 발효주도 마찬가지고요. 아가베는 종류에 따라 자라는 데 20년 가까이 걸리기도 해요. 가장 오랜 시간 땅에서 자라는 원물인 거죠. 데킬라는 독하기만 한 술이라는 편견이 있는데, 원물 그 자체만 보면 가장 뛰어난 술이에요. 아가베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맛과 향, 그리고 그 증류 과정에 따라 스펙트럼이 여러 갈래로 나뉘고, 이것이 음식하고 페어링되면 아주 좋은 시너지가 납니다.”
진우범 셰프는 에스콘디도 외에 멕시칸 레스토랑 두 곳을 더 운영하고 있다. 성수동의 엘몰리노는 멕시코 음식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곳이고, 신당동 중앙시장에 위치한 라까예는 현지 스트릿 타코를 구현한 매장이다. 6월 초에는 해산물을 메인으로 한 레스토랑 페스카데리아 데 라까예의 오픈을 앞두고 있다. 멕시코 음식에 대한 장벽을 낮추는 동시에 좀 더 폭넓은 선택지를 제공하고, ‘멕시칸 퀴진의 확장’이라는 모토를 몸소 실현해가는 중인 셈이다. “이 과정이 즐겁기만 한 건 아니지만, 꼭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었어요. 이젠 나만의 니즈와 성취를 위해 무언가 하는 단계는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성취를 이뤄온 팀원들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우리의 방향성을 정하고 계속해서 성장하고 싶어요.” 미쉐린 1스타부터 새로운 매장까지, 2025년 상반기가 채 지나기도 전에 많은 것을 일궈냈음에도 여전히 출발선에 서 있는 마음으로 성장을 갈망하는 진우범 셰프다.

프라이빗한 식사를 위한 별도의 공간.

‘멕시코식 세비체’라고 불리는 아구아 칠레에는 할라피뇨를 첨가해 매콤한 변주를 준 것이 특징.

다양한 종류의 데킬라가 진열되어 있는 에스콘디도.

매장에서 직접 만드는 에스콘디도의 옥수수 토르티야는 재료마다 다른 맛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