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 시대의 새로운 대안, 뉴욕 와인

기후 위기 시대의 새로운 대안, 뉴욕 와인

기후 위기 시대의 새로운 대안, 뉴욕 와인

뉴욕 와인은 기후 위기를 직면한 와인 업계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조금은 생소하지만 그래서 더 궁금해지는 뉴욕 와인 이야기.

기후 위기가 세계 와인 산업의 지형을 재편하고 있다. 2020년 스페인 알칼라대학의 이그나시오 모랄레스 카스티야 Ignacio Morales-Castilla가 PNAS에 발표한 논문은 이를 수치로 요약한다. 지구 평균 기온이 2℃ 상승할 경우 현재 포도 재배지 중 56%가 재배에 부적합해질 수 있으며, 4℃ 상승 시에는 그 비율이 85%에 이를 수 있다는 것. 이런 변화의 중심에서 예상 밖의 지역인 뉴욕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아직 많은 소비자가 낯설게 느끼고 있지만, 사실 뉴욕은 미국 내 세 번째로 큰 와인 생산지다. 지리적 특징에서 비롯한 뉴욕 와인만의 특성과 역사, 그리고 기후 위기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는지에 대해 뉴욕와인생산자협회와 이야기를 나눴다.

뉴욕에서 와인을 생산한다는 사실이 대중에게는 조금 생소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다른 국가 또는 생산지와 비교했을 때 뉴욕 와인만이 지닌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뉴욕 와인의 가장 큰 매력은 고유한 기후가 빚어낸 독특한 맛의 균형에 있습니다. 뉴욕주는 북위 40~45도의 위도에 위치해 스페인의 북부와 비슷한 위도이지만, 대서양과 오대호, 긴 호수와 해풍의 영향으로 기후는 그보다 훨씬 서늘합니다. 이처럼 시원한 환경에서 자란 포도로 생산된 뉴욕 와인은 산도가 살아 있고 풍미가 우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일의 풍부한 향미와 산뜻한 산미가 조화를 이루어 자칫 무겁거나 과숙하기 쉬운 다른 산지의 와인들과 차별화됩니다. 실제로 현지 양조자들은 뉴욕의 최고 레드 와인은 신세계 다른 지역에서는 찾기 힘든 풍부함과 절제가 공존하는 균형미를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알코올 도수나 과일 단 이 과도하게 높지 않아 산뜻하고 깨끗한 과일 풍미가 두드러지며, 이는 뉴욕만의 독특한 테루아(자연환경)를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각기 다른 기후와 지형을 지닌 400개 이상의 와이너리가 존재한다는 것 또한 뉴욕주만이 지닌 특징이라 들었습니다. 각 지역별 특징은 어떻게 되나요? 뉴욕 와인은 다양한 품종과 스타일로 그 매력을 발산합니다. 특히 핑거레이크 지역의 리슬링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품질로, 잘 익은 복숭아나 감귤류의 향기에 청량한 산미와 미네랄 느낌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한편 롱아일랜드에서 재배되는 메를로와 카베르네 프랑 같은 레드 와인은 과일 풍미가 풍부하면서도 탄탄한 구조감이 돋보입니다. 롱아일랜드 노스포크의 메를로는 캘리포니아산처럼 잼과 같은 진득한 과실 맛보다는 절제되고 우아한 스타일을 가져, 산미와 과일, 흙내음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특징입니다. 실제로 한 와인평론가는 롱아일랜드산 메를로를 프랑스 보르도의 유명 산지인 포므롤 와인과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맞먹는 점수를 주었을 정도로 높이 평가했죠. 그 밖에도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생산지 중 하나인 허드슨 밸리의 완만한 구릉과 점토질 토양에서 생산되는 화이트 와인은 은은한 과실 향과 산뜻한 미네랄감을 지니는 것이 특징입니다.

뉴욕의 와인 양조 역사 또한 흥미롭습니다. 미국 최초로 상업용 와인을 생산한 브라더후드 와이너리 또한 뉴욕에 있다고요. 뉴욕의 와인 양조는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되어, 금주법 시대 등 여러 역사적 굴곡을 겪으며 조금씩 성장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전통을 지키면서도 혁신을 더해 뉴욕 와인의 품질을 끌어올린 주역들도 함께 등장했죠. 브라더후드 와이너리는 금주법 시기에도 가톨릭 미사주를 만들며 명맥을 이어온 곳으로, 지금도 19세기 와인 저장고 등 유서 깊은 시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또한 핑거레이크 지역의 닥터 콘스탄틴 프랭크 와이너리는 1950년대 ‘비니페라 혁명’을 이끌며 뉴욕 와인의 위상을 새롭게 정의한 곳입니다. 콘스탄틴 프랭크 박사는 케우카 호숫가의 가파른 셰일 경사면에 유럽 품종인 리슬링과 샤르도네를 심어, 뉴욕에서도 비티스 비니페라 Vitis Vinifera 포도 재배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도전은 뉴욕 와인을 지역 특산주에서 세계 수준의 프리미엄 와인으로 이끌어 올린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후 변화가 포도 재배까지 영향을 미치며 전통 와이너리들이 도전에 직면한 와중에, 업계는 뉴욕을 ‘기후 피난처 Climate Refuge’로 정의했다고 하죠. 실제로 세계 최대 와인 기업 중 하나인 E.&J. 갤로와 나파밸리의 주요 와이너리들이 뉴욕에 포도밭을 조성하거나 확장을 검토 중입니다. 여름 기온이 상승하며 생육 기간이 길어지고, 과거보다 자주 ‘포도가 완벽히 익은 해’가 등장하며 뉴욕 와인의 품질은 꾸준히 향상되고 있습니다. 한 세대에 한두 번 나올까 말까 하던 수준의 우수한 빈티지가 이제는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핑거레이크의 경우 2016년, 2020년, 2022년처럼 우수한 빈티지가 잇따랐습니다. 이는 온난화로 생장기가 길어지고 생육 적산온도(GDD)가 상승한 덕분인데, 포도가 당도를 충분히 올리면서도 뉴욕 특유의 산도와 균형은 유지되는 이상적인 성숙도를 달성하는 해가 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후 변화로 인한 타격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기후 변화의 명암은 분명 존재합니다. 늦서리와 곰팡이 질병 발생 위험이 증가하는 등, 포도 재배 관리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소가 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이러한 도전 속에 포도나무 개체별 생육 데이터를 수집해 관리하는 소프트웨어와 자율주행 로봇을 도입해 미세한 환경 변화를 모니터링하고, 동해 예측 앱을 활용해 가지치기 시기를 조절하는 등 과학적 접근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품종 측면에서도 변화를 모색합니다. 뉴욕 와인 생산자들은 리슬링, 카베르네 프랑같이 이미 입증된 쿨 클라이밋 품종뿐만 아니라, 내병성과 내후성이 좀 더 강한 하이브리드 품종을 적극 시험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품종들은 급변하는 기후에도 안정적으로 수확량을 내줄 수 있어 ‘뉴욕 와인 산업의 미래를 지탱할 열쇠’로 불립니다. 실제로 몇몇 와이너리는 비니페라 순종 포도나무 대신 이런 신품종으로 과원을 꾸려가며 기후 리스크를 분산하고 있으며, 소비자들의 입맛 변화에도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와인 생산에 적합한 서늘하고 습한 곳을 찾아 포도밭이 이동할 것이다. 뉴욕 같은 곳이 기후 피난처로 각광받을 수 있다”는 전망이 점차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행 상승하고 있는 와인의 품질입니다. 뉴욕산 와인은 최근 각종 품평회와 시상식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전문가들은 “뉴욕의 테루아가 해마다 더 훌륭한 와인을 빚어내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한 와인 양조학 교수는 “만약 최근 몇 년 뉴욕의 여름처럼 따뜻하고 건조한 조건이 지속된다면, 뉴욕 포도 재배는 분명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2023년은 포도 생육에 이상적인 기후 조건을 보인 덕분에 “뉴욕 와인 역사상 손꼽힐 만한 최고의 빈티지”라는 찬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기후 변화의 도전에 맞서 탄탄한 연구 기반과 유연한 대응 전략을 갖춘 뉴욕 와인 산업은 앞으로 세계 와인 시장에서 품질과 스토리를 겸비한 신흥 강자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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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조리서에서 피어난 부엌

오랜 조리서에서 피어난 부엌

오랜 조리서에서 피어난 부엌

고조할머니의 손때 묻은 조리서 한 권에서 시작된 세대와 세대,
기억과 맛을 잇는 작은 공간 이야기.

문을 열면 부엌의 형태를 갖춘 바 공간이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공간 디자인은 엔알디자인팩토리의 김나리 소장이 진행했다.

막걸리를 재료로 한 증편과 약편을 정성스럽게 차려냈다.

청주부엌의 강신혜 대표.

윤형근 화백의 화폭에서 영감을 얻은 공간의 색과 옻칠한 한지로 만든 한지 문살이 한국적인 느낌을 살린다.

취미로 시작한 요리가 어느새 업이 되었다. 1988년부터 30여 년간 <싱글즈>, <쎄씨>, <여성중앙> 등 다양한 잡지에 몸 담으며 일해온 ‘1913 청주부엌’(이하 청주부엌) 강신혜 대표의 이야기다. 이름에 쓰인 ‘1913’은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고조리서 <반찬등속>이 편찬된 연도를 의미한다. <반찬등속>은 충북 지역 유일한 고조리서이자, 총 46가지 음식의 조리법이 기록된 귀중한 자료다. 이를 편찬한 진주 강씨 집안 며느리 밀양 손씨는 청주부엌 강신혜 대표의 고조할머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강신혜 대표의 아버지는 잡지 일을 쉬고 있던 그에게 <반찬등속>과 관련된 일을 해보라 했고, 이는 곧 관련 저서 두권 출판에 이어 청주부엌 오픈으로까지 이어졌다.

40년 된 오랜 양옥을 개조한 청주부엌은 현대적인 동시에 한국적인 인테리어를 갖췄다.

대표가 오래전부터 한국전래음식연구회에서 요리를 배우고, 여러 자격증까지 취득할 정도로 음식에 진심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집안에 내재된 DNA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찍이 음식으로 정을 나누고, 추억 쌓는 법을 배운 그였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중학교 들어가던 날엔 뷔페에 데려가 식사하는 법을 가르쳐주셨고, 대학 들어가던 날엔 양식집에서 스테이크 나이프와 포크 쓰는 법을 가르쳐주셨어요. 당시엔 흔한 일이 아니었지요.” 외식으로 맛본 좋은 음식을 집에 있는 육남매에게 재현해준 것 또한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병상에서 남긴 말을 쉽게 떨칠 수 없었다. 그 이전부터 아버지와 친척 어른들의 이야기를 녹취해가며 <반찬등속> 관련 자료를 모으던 그는 본격적으로 공부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아침이 되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저녁부터 새벽까지는 배운 조리법을 실제로 만들어보는 일상이 3~4년간 반복됐다. 다른 고조리서들도 참고해가며 연도별 역사까지 세세하게 분석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래야만 오늘날과 다소 다른 옛 방식의 조리법을 이해하고, 그것을 재현하고 현대화한 과정을 담은 책을 쓸 수 있었다. 그렇게 각각 2022년과 2024년, <반찬등속, 할머니 말씀대로 하는 김치 이야기>와 <반찬등속, 할머니 말씀대로 하는 한과 이야기>가 세상에 나왔다.

간장과 꿀로 간한 떡가루에 호두, 대추, 밤 잣 등 포함한 5가지 소를 넣어 완성한 궁중 두텁떡.

곶감채가 들어간 수정과는 얼음을 갈아 그라니타처럼 시원하게 선보인다.

강신혜 대표의 취향이 묻어난 소품들이 가게 한편을 장식한다.

청주부엌은 그 흐름의 연장선에서 문을 연 것이다. 서울에 두 발 붙이고 살아온 그가 청주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어머니와 오빠밖에 없었지만 그 외 다른 지역에서 식당을 여는 것은 선택지에 없었다. 공간의 색은 청주 화가 윤형근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고, 식당 한쪽은 부엌 형태를 갖추기 원했다. 고조할머니가 반찬을 적어놓던 곳도, 아버지가 요리를 재현해주던 공간도 결국 부엌이었다. “생명을 이어가고, 세대를 이어가는 장소가 부엌이잖아요.” 공간의 구현은 엔알디자인팩토리의 김나리 소장이 진행했다. 40년 된 오래된 양옥에 현대적인 동시에 한국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현대적 분할이 들어간 유리창살과 옻칠한 한지로 만든 한지문살로 공간을 살렸다. 제대로 된 떡 만드는 것을 배우기 위해 짧은 기간이나마 명인의 가게에서 일하고 숙식을 해결해가며 조리법 또한 익혔다. 현재 가게에서 선보이는 화병은 <반찬등속> 속 레시피를 그대로 구현한 메뉴다. 길게 쳐서 늘인 인절미 위에 달걀 지단과 실고추를 꽃잎처럼 얇게 썰어 장식한 화병은 쫄깃한 식감과 고소한 맛이 어우러진다. 정갈하게 담긴 떡을 먹고 있으면 괜스레 마음까지 단정히 정돈되는 느낌이다. 떡이 고급 디저트가 되기 바라는 강신혜 대표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하다. 부담없이 즐기되 충분히 특별한, 기꺼이 대접받는 느낌이 드는 음식이 되기 바라는 마음이. 그래서인지 청주부엌에서 내는 떡 종류는 많지 않다. 양보다는 질에 집중한다. 두텁떡, 화병 등 ‘고정 칼럼’ 같은 메뉴 옆엔 살구, 초당옥수수처럼 계절과 시기에 맞는 식재료로 만든 ‘특집 떡’이 그 자리를 채운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잡지 출신인가 봐요. 이 공간도 잡지처럼 생각하게 돼요.” 습관처럼 흘러나온 농담을 건네면서도, 청주부엌과 <반찬등속>에 관해서라면 말투가 달라진다. 오래된 조리서를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는 이 작업은 단순한 복원이 아닌 세대와 문화, 감각을 잇는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낡은 조리서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오늘날의 감각으로 이어가는 살아 있는 공간. 잡지처럼 매 시즌을 기획하고 새로운 특집을 준비하는 이곳에는 한 사람의 일생과 가족사, 지역의 전통과 감각, 오랜 기록을 재해석하려는 기획자의 시선이 고루 녹아 있다.

<반찬등속> 속 레시피를 구현한 화병엔 달걀 지단과 실고추를 얇게 썰어 고물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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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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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맛, 가겐의 가이세키 이야기

계절의 맛, 가겐의 가이세키 이야기

계절의 맛, 가겐의 가이세키 이야기

제철 식재료 위에 차곡차곡 쌓아올린 정성.
정직한 한 끼로 전하는 가겐의 가이세키 이야기.

가겐의 여름 핫슨. 단호박 스리나가시, 한치와 오크라를 함께 담은 이카소면, 전갱이 초밥, 아나고 가라아게와 은은한 청매실로 차려냈다.

정돈된 분위기의 가겐 매장 전경.

가겐의 최현아, 원진희 셰프.

가겐은 정직하다. 메뉴 하나하나엔 제철 식재료 고유의 맛과 향이 배어 있고, 공간을 채운 식기와 도구엔 고민하고 고심해서 고른 흔적이 서려 있다. 원진희, 최현아 셰프의 특색을 조화롭게 녹여낸 메뉴들을 선보이는 이곳은 가이세키 레스토랑이다. “가이세키 요리를 한다는 데에 자부심을 느껴요. 제철 식재료를 제때 먹는 것이 가장 맛있고 영양도 풍부한데, 다양한 식기에 이를 정성스럽게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 가이세키의 가장 큰 매력이라 생각해요.” 2023년 가겐을 처음 열 때만 해도 ‘고급 일식’ 하면 대부분 스시 오마카세를 떠올렸다. 가이세키는 여전히 대중에게 생소한 단어였고, 일본 온천 료칸에서 접한 요리를 떠올리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도쿄의 유서 깊은 일식당 쿠로기와 (당시 기준) 16년 연속 미쉐린 3스타를 받은 칸다에서 경력을 쌓은 두 셰프에게도 한국에 가이세키 전문 레스토랑을 여는 것은 적잖은 도전이었다. “가이세키가 건강하고 맛있는 요리라는 인식을 주는 식당을 만들고 싶었어요. 가이세키 하면 보통 심심한 맛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은데, 비교적 강한 맛이 특징인 쿠로기와 재료 본연의 맑은 맛을 중시하는 칸다의 요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균형을 맞추고자 했죠.” 접객부터 ‘카리스마 넘치게’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 쿠로기의 방식이라면, 칸다의 분위기는 한층 차분하고 온화하다. 철이 바뀔 때마다 코스 메뉴를 새롭게 짜는 원진희 셰프는 각자의 스타일을 교차시키며 코스 전체의 강약을 조절한다. “슴슴한 건 확실히 슴슴하게, 강한 건 확실히 강하게. 그런식으로 구성해요.” 쿠로기 소면이 최현아 셰프의 오완 요리 이후에 서빙되는 것도 그런 계산의 일환이다. 강한 감칠맛을 자랑하는 소면을 먼저 내면 오완 본연의 깊은 맛이 묻히기 때문이다. 가겐의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인 ‘쿠로기 소면’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쿠로기에서 전수한 요리다. 우니와 캐비아, 소면, 냉육수라는 다소 익숙한 조합이지만, 한입 먹자마자 입안에 감도는 강한 감칠맛은 결코 뻔하지 않다. “손님들이 이 메뉴를 몇 배 정도 더 드시려고 대관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어요.”

매장 한쪽엔 프라이빗한 식사를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100% 고사리 전분만 사용해 만든 와라비 모치는 즉석에서 조리해 손님에게 대접한다

부산 출신인 두 셰프가 일본 요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식을 요리하던 원진희 셰프는 일본 특유의 음식과 도구를 대하는 태도에 매료되었고, 날 때부터 해산물과 요리를 좋아한 최현아 셰프는 로바타야키와 호텔 레스토랑을 거쳐 남편 원진희 셰프와 함께 도쿄행을 택했다. “매일이 꿈 같았어요. 첫 일본 레스토랑이었는데,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운 좋게 조리장이 된 이후 칸다 상한테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배웠죠.” 각기 다른 스타일의 레스토랑에서 경험을 쌓아온 두 셰프는 함께할수록 오히려 균형을 이루게 됐다. 칸다의 정갈함과 쿠로기의 강렬함 사이,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계절’이라는 키워드가 그 조화를 단단히 엮어준다. “계절 식재료를 다루는 일이 가장 어렵지만 동시에 가장 재미있어요. 특히 한국은 일본보다 위도가 짧아 같은 시기라도 식재료 나오는 시간이 한 달 정도 늦기도 하거든요.” 그 차이는 단순히 식재료 수급의 문제를 넘어 메뉴 전체의 흐름과 감각을 조율하는 법을 익히게 했다. “이제는 제철에 맞춰 무엇을 써야 할지 바로바로 떠올라요. 몇 해 해보니 대체할 재료들도 자연스럽게 보이고요.”

불 앞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화로를 다루는 최현아 셰프의 손길엔 오랜 시간 쌓인 내공이 묻어난다

시원한 감칠맛이 일품인 쿠로기 소면.

가겐의 식기는 대부분 일본 작가들에게서 직접 공수해온 것이다. 평균 6개월정도 기다려야 받을 수 있는 식기 중에는 주문한 지 2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다릴 정도로, 하나하나 장인의 손길이 깃들어 있다. 누군가는 지나친 수고를 감내해야 하는 일이라며 말렸지만, 요리 담는 그릇에까지 셰프의 손길이 닿아야 요리가 완성된다고 믿기에 이를 후순위로 미룰 수 없었다. 이런 세심함은 접객에서도 드러난다. 가겐은 고요하고 정돈된 분위기 속에서도 어느새 웃음이 흐르는 공간이다. “가끔은 긴장을 하는 손님들도 있어요. 그래서 손님이 좀 더 편하게 식사하시도록 요리뿐 아니라 공간 자체를 기분 좋게 하는 게 우리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고요한 품격과 여백의 미가 조화를 이루는 매장의 한쪽 구석.

제철 갯장어를 데쳐 가다랑어 육수로 완성한 여름의 오완은 육수를 붓는 타이밍과 그 온도에 따라서 맛이 미세하게 달라진다.

가겐의 최현아 셰프가 도쿄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칸다에서 조리장으로 근무할 당시 사용한 부채.

‘가겐’은 두 셰프의 이름 최현아의 ‘아(雅)’와 원진희의 ‘원(元)’을 일본식 발음으로 조합한 것이다. 그들이 익히고 배워온 요리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 작명이다. 레스토랑 로고 또한 한국어를 사용하고, 일본어 표기는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일본요리를 하되 한국에서, 한국 식재료로, 한국 사람들에게 선보이고자 하는 철학 때문이다. 2025년 미쉐린 가이드 서울에 새롭게 등재된 가겐은 곧 2주년을 앞두고 있다. 좋은 셰프의 자질에 대해 묻자 ‘정직’과 ‘건강’을 답한 이들은 그 기본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자 결국은 오래 가는 식당을 만드는 힘이라고 믿는다. “가겐을 통해 더 많은 분들이 가이세키를 경험하면 좋겠어요. 요리 하나하나의 순서와 흐름, 계절감, 식재료의 해석까지 담은 다이닝이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요.” 계절이 메뉴를 바꾸고, 기억이 손님을 다시 데려오는 곳. 그런 공간을 만들기 위해 두 셰프는 오늘도 같은 마음으로 재료를 손질하고, 조리하고, 정성껏 담아낸다. 계절과 요리, 그리고 사람의 온기가 교차하는 순간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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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그래퍼

차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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