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너머의 이야기

식탁 너머의 이야기

식탁 너머의 이야기

맛, 감각, 공간이 빚어낸 미식의 새로운 단면. 강릉 신라모노그램 호텔에 문을 연 이욱정 PD의
‘더 그로브 테이블’은 미식 너머의 문화적 경험을 선사한다.

높은 층고와 콘크리트 구조가 돋보이는 건물은 김용덕 대표가 설계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이욱정 대표.

미식 경험은 단순히 음식 맛이나 공간이 주는 분위기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재료에 대한 집요한 탐구로 완성된 맛의 구조, 공간이 건네는 감각, 그 안에서 흐르는 시간의 밀도까지. 모든 요소가 교차할 때 감각은 쌓이고 경험은 비로소 완성된다. 수십 년간 요리 다큐멘터리 <요리인류>, <누들로드>, <신의 술방울> 등을 제작하고, 르 꼬르동 블루 런던으로 유학을 떠날 정도로 음식에 열과 성을 바쳐온 이욱정 PD가 미식 경험에 대한 집념을 실천에 옮겼다. 테라로사를 창립한 김용덕 공동대표와 함께 공간 기획 & 디자인 회사 마카랩을 설립하고, 강릉 신라모노그램 호텔에 복합미식 공간 ‘더 그로브 테이블’을 선보인 것이다. IFC몰을 기획한 안혜주 대표까지 합류해 완성한 더 그로브 테이블은 단순한 푸드홀이 아닌, 음식과 공간과 문화가 유기적으로 엮인 공간을 지향한다. “예전부터 공간에 대한 관심이 있었어요. 서울시와 함께 ‘요리를 통한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진행할 당시 런던, 파리 등의 대도시에서 버려진 공간이 푸드마켓이나 F&B 시설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취재한 적 있어요. 그것을 지켜보며 지역이 활성화되려면 F&B 시설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입점한 레스토랑 또한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럭셔리 치킨 펍 ‘마 코코트’, 오마카세와 로바다야키를 즐길 수 있는 ‘스시 츠키요와’와 ‘갓포 츠키요와’, 정통 이탤리언 레스토랑 ‘버터빌라’, 타이 레스토랑 까폼을 고급화한 ‘까폼 리저브’, 퓨전 누들 전문점 ‘팔복정’, 미트컬처에서 파생한 해산물 다이닝 ‘피쉬컬처’, 와인바 ‘ATC’와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 ‘테라로사’, 그리고 이욱정 대표가 직접 운영하는 아이스크림 숍 ‘라이프이즈 소프트’까지, 전 세계 미식의 다양성을 한자리에 모았다. 직접 개발한 메뉴를 하나하나 설명하는 이욱정 대표의 모습에선 달뜬 설렘마저 느껴졌다. “아이스크림은 가장 창의적인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먹을 때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의미로 가게의 이름을 지었어요.”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풍기는 라이프 이즈 소프트의 외관.

퓨전 누들 전문점 ‘팔복정’의 국밥과 수육.

‘버터빌라’의 피자는 직접 화덕에서 구워 내온다.

갤러리 같은 외관을 자랑하는 더 그로브 테이블 건물 모습.

아이스크림 숍 ‘라이프 이즈 소프트’에서는 강원도 제철 과일을 활용해 수제 아이스크림을 만든다.

기존 호텔 안의 F&B 시설이 투숙객을 위한 폐쇄적 공간이었다면, 더 그로브 테이블은 그 경계를 과감히 허문다. 오픈형 구조로 설계된 이곳은 호텔 투숙객은 물론 지역민과 관광객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공간 중심에 배치된 중정을 둘러싸고 네 개의 건물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각기 다른 동선과 분위기를 연출한다. 2층 한편에는 앤더슨씨 가구들이 큐레이션되어 공간에 온기를 더한다. 갤러리 형태의 외관과 노출 콘크리트 구조에 높은 층고를 가진 건물은 김용덕 대표의 손끝에서 탄생한 결과물이다. ‘도시는 건축으로 말한다’는 일념으로 건축적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집중한 것이다. 공간에 문화적인 요소를 녹여내는 것 또한 이들의 숙제였다. 산과 바다가 밀접한 ‘휴양의 도시’ 강릉에서 공연을 즐기고,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게 하고 싶었다. “문화가 없으면 일반적인 푸드코트가 될 뿐이잖아요. 괜찮은 식음료를 팔면서 문화적인 체험을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적인 요소를 구현하고 싶었어요. 마을 사람이 모여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유럽의 광장처럼요.” 실제로 더 그로브 테이블은 전시, 공연, 토크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통해 맛의 경험을 문화적 맥락으로 확장하고자 한다. 숲을 뜻하는 ‘그로브 Grove’에 식탁을 의미하는 ‘테이블’을 더해 완성된 이름처럼, 더 그로브 테이블은 숲속 광장, 사람들이 모여 앉아 감각을 나누며 일상의 풍경을 바꾸는 미식의 장이 되어갈 것이다. ADD 강원 강릉시 해안로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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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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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차의 시간

말차의 시간

말차의 시간

유행보다 깊이를 택한 뉴욕의 말차 전문점을 소개한다.

밝고 산뜻한 분위기의 1층 카운터에는 맞춤형 정수 시스템이 마련돼 있다. © Michael Carbone

뉴욕은 요즘 말차 열풍이 불고 있다. 미국에서 말차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15년 무렵, 소위 ‘힙스터’ 카페들이 말차를 활용한 음료와 디저트를 앞다투어 선보이면서부터다. 팬데믹 이후에는 소셜 미디어를 타고 ‘젠지 세대’의 트렌디한 음료로 떠오르며 도심 곳곳에 말차 전문점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그럼에도 차의 본질에 충실한 곳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맨해튼의 노호 NoHo에 지난 4월 문을 연 12말차 12Matcha는 유행과 조금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교토 근교 우지에서 5대째 차를 재배해온 홋타 가문과 일본 최고의 차 감정사 하루히데 모리타가 손잡고 차 한잔에 담길 맛과 향을 빚어냈다. ‘12’라는 숫자는 별자리와 영적 상징, 그리고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는 12Hz 뇌파에서 착안했다. 매년 첫 수확한 찻잎만 손으로 따서 섬세하게 볶아, 차 본연의 풍미와 향을 지키는 데 집중한다.

지하 테이스팅 룸. 은은한 조명 속에서 집중도 높은 시음을 즐길 수 있다. © Michael Carbone

말차 바스크 치즈 케이크. © Michael Carbone

시그니처 말차 라테. © Michael Carbone

공간 설계는 파리의 디자인 스튜디오 시귀 Ciguë가 맡았다. 19세기 말 지어진 주철 건물을 개조하며, 번잡한 도시 한가운데에서도 차를 마시는 고요함과 집중의 미학을 젠 Zen 감각으로 담아내고자 했다. 하나도 쉽게 얻어지는 것이 없는 말차 제조 과정처럼 이들 역시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시귀 팀은 직접 우지를 찾아가 차밭과 생산 현장을 둘러보고 다도에 참여했다. 그렇게 몸으로 익힌 경험을 설계에 녹여 불필요한 장식 대신 맛을 최적화하는 공간을 완성했다. 밝고 산뜻한 분위기의 1층에는 표면을 매끄럽게 마감한 짙은 녹색 라바 스톤 바 카운터가 길게 놓이고, 그 위 차 사발과 차선이 가지런히 자리한다. 옆에 나란히 놓인 대형 유리 용기 안에는 활성탄을 이용해 물맛을 조율하는 맞춤형 정수 시스템이 마련됐다. 지하에는 원목 가구 좌석을 넉넉히 배치했고, 은은한 조명의 테이스팅 룸에서는 한층 집중된 시음을 즐길 수 있다. 빠른 유행을 좇아 겉모습만 흉내내는 말차 스토어가 늘어나는 가운데, 12말차는 우지에서 보고 익힌 맛과 과정을 느리고 진득하게 지켜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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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뉴욕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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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뒤의 레스토랑

그림 뒤의 레스토랑

그림 뒤의 레스토랑

갤러리 뒤 숨겨진 미슐랭 다이닝, 프레보.

갤러리처럼 꾸며진 레스토랑 프레보의 입구는 그림 뒤 숨은 문으로 이어진다. © Max B

짙은 녹색 벽과 연갈색 가죽 의자가 어우러진 프레보의 메인 다이닝 룸. © Max B

뉴욕 로컬들이 사랑하는 그리니치 빌리지의 한 골목에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프레보 Frevo가 자리한다. 통창 너머로는 작은 갤러리처럼 보이지만, 한 벽면에 걸린 페인팅 뒤 감춰진 문을 열면 단 16석으로 이루어진 다이닝 바가 모습을 드러낸다. 공동 설립자 베르나르도 실바 Bernardo Silva는 뉴욕의 스피크이지 문화에서 영감받아 이 비밀스러운 구조를 구상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다 알 수 없는 도시가 뉴욕”이라며, 그는 “이 도시의 진짜 재미는 숨겨진 장소를 하나씩 발견해가는 데 있다”고 말한다. 프레보는 실바와 브라질 출신 셰프 프랑코 삼포냐 Franco Sampogna가 함께 만든 공간이다. 두 사람은 17세에 프랑스 남부에서 처음 만나, 언젠가 뉴욕에 둘만의 레스토랑을 열자는 약속을 했다. 이후 각자의 자리에서 커리어를 쌓은 후 약 10년 만에 그때 약속을 현실로 옮겼다.

다이닝 룸 내부에 걸린 Mr.StarCity의 페인팅. © Max B

할라피뇨 가스파초와 캐슈 크림을 곁들인 방어 요리. © Evan Sung

인테리어를 맡은 세계적인 건축 스튜디오 록웰 그룹 Rockwell Group은 금속과 목재, 컬러의 균형을 섬세하게 조율해 절제된 감각을 구현했다. 천장과 벽면은 짙은 청록색으로 통일해 공간의 몰입감을 높였고, 바 좌석에는 연갈색 가죽을 사용해 따뜻함을 더했다. 와인 디스플레이 캐비닛은 백라이팅과 짙은 베이지 톤의 석재를 활용해 기능성과 미감을 동시에 살렸고, 갤러리와 다이닝룸 사이를 잇는 벽면은 감쪽같이 색을 입혀 하나의 평면처럼 매끄럽게 연결했다.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프레보의 음식은 전 세계의 재료와 조리법을 유연하게 엮어낸다. 초콜릿과 와사비, 꿀 아이스크림과 콩테 치즈 같은 의외의 조합을 소개하는 테이스팅 메뉴는 시즌마다 새롭게 바뀌며, 와인 셀렉션 역시 내추럴부터 클래식 빈티지까지 폭넓게 구성된다. 입구를 겸하는 갤러리에서는 신진 작가부터 유명 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시가 수시로 교체된다. ‘끓다(Ferver)’라는 뜻의 포르투갈어에서 이름을 딴 프레보. 이곳은 그 이름처럼 늘 새로운 무언가로 들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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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뉴욕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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