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봉인되었던 추억을 무장해제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영국과 한국, 너무 다른 두 나라를 하나로 묶어준 10월의 감자 이야기.

요리사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요리를 표현하는 데 적합한 식재료를 찾아 다닌다. 그것은 미지의 식재료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어린 시절 즐겨 먹던 향수 어린 식재료일 수도 있다. 나에게 감자는 향수를 자극하는 식재료이다. 강원도가 고향인 나에게 어린 시절 찰옥수수와 감자는 즐겨 먹었던 간식거리였기 때문이다. 언제나 주방에는 할머니가 쪄주신 뜨거운 감자와 찰옥수수가 있었으니 너무나 흔해서 그 가치를 잘 몰랐던 것도 사실이다.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하면서부터 지방의 시장에 가거나 해외에서도 새로운 식재료를 찾아 다니며 무수히 많은 새로운 식재료를 눈으로 보고, 맛보았다. 때로는 같은 품종이라도 기후와 토양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감자 역시 나라마다 맛에서도 차이가 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영국 역시 감자가 유명하다.

감자는 영국인들의 주식이기도 하기 때문에 우수한 품질의 감자가 많다. 우선 알이 굵고 속이 꽉 차 있다. 그에 반에 식감은 아주 부드럽고 색과 모양이 좋다. 영국정부는 우수한 품종의 감자를 유지, 개발하기 위해서 감자협회를 운영하며 영양 정보나 해충 및 질병, 레시피 등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최근 영국의 감자협회가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껍질째 삶은 감자 하나에 들어 있는 섬유소는 바나나 하나의 5.5배, 비타민 C는 아보카도 3개 분량에 가깝다고 한다. 또한 셀레늄 역시 각종 씨와 견과류에서 섭취하는 총량보다도 많다고 한다. 다이어트와 성인병에 좋은 감자의 가치가 알려지게 된 것이다.

강원도의 감자가 유명해진 이유는 고유한 식감 때문이다. 어린 시절 먹었던 독특한 강원도 감자의 맛은 지금도 선명하다. 지금도 우리나라 감자 생산량의 4분의 1정도가 강원도에서 생산된다. 감자는 여름에 재배하는데, 고랭지의 서늘한 기온 때문에 감자가 서서히 자라 속이 단단하고 조직이 곱다.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강원도 감자는 분감자(분질감자)이다. 조리 후에 분이 많이 나는 분감자는 그냥 쪄서 먹거나 샐러드용으로 좋다. 요즘에는 수확량이 많지 않아서 예약 주문을 해야 할 정도로 귀하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지천이었다. 반면 수미감자는 점질 감자이기 때문에 쫄깃한 식감이 특징이다. 밑반찬을 만들거나 감자칩 등을 만드는 데 적합하다. 병충해에 강하고, 사계절 재배가 가능하다는 장점으로 지금은 한국의 감자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강원도의 감자 맛이 예전과 다르다고 말하는 이유가 이러한 품종의 변화 때문이다.

영국에 와서 느끼게 된 건 영국의 감자가 너무 맛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를 찾다 보니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이유는 분질감자가 미국에서 개발되었고, 영국을 통해서 우리 땅에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강원도의 토종감자는 이제 강원도가 아닌 영국에서 맛보기 쉬워진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지금 살고 있는 런던에서 먹는 감자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 먹었던 그 맛과 흡사하다. 물론 영국 사람들은 피시 앤 칩스 등의 요리처럼 튀김이나 오븐에 굽는 방식을 즐기는데, 그대로 쪄 먹으면 예전의 맛 그대로를 느낄 수 있다. 한번은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영국 사람들에게 찐 감자와 김치를 함께 맛보라고 권한 적이 있었는데, 너무나도 호의적인 반응에 ‘이 맛이 한국의 옛맛 중에 하나’라고 설명한 적이 있었다. 영국 사람들이 감자를 즐겨 먹는 이유 중 하나는 비싼 물가에 비해 싸고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모든 식재료를 통틀어 감자가 가장 저렴할 정도이므로 마트에서 여러 방식으로 커팅과 조미가 된 감자들이 서민들에게 주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감자만큼 다양한 변신이 가능한 식재료도 드물다. 그대로 찜, 볶음, 튀김, 구이 등 거의 모든 조리법으로 가능하다. 흔한 재료이지만 조리법을 다양하게 함으로써 얼마든지 새롭게 즐길 수 있다. 단, 찌거나 삶을 때는 껍질을 제거하지 않고 깨끗이 씻은 채 조리하는 것이 좋다. 감자의 전분이 물에 녹아서 영양분이 손실되고 조리하는 동안 감자에 수분이 많이 스며들어 맛이 떨어지게 된다. 볶음 요리의 경우, 익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미리 삶거나 쪄서 볶아주는 게 좋다. 볶음을 위해 가늘게 채를 쳤다면 물에 담가두었다 볶아야 서로 달라붙지 않는다. 튀김을 할 때는 껍질을 벗겨내는 것이 좋은데, 전분이 빠져나와야 더욱 바삭한 식감의 튀김을 조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 번에 튀겨내는 것보다 저온(150도)에서 한 번 튀겨낸 후 고온(180도)에서 두 번 튀겨내면 좋다. 서양에서는 주로 오븐구이를 많이 하는데. 주로 육류와 함께 구우면 고기의 육즙과 어우러져 맛이 한층 고조된다. 조리 시간을 단축하고 싶다면 굽기 전에 젓가락 등을 이용해서 감자를 찔러주면 된다. 보통 크기의 감자는 고온(200도) 정도에서 40분 정도 조리하되 포일 등으로 싸서 치즈, 버터 등과 함께 구워서 많이 먹는다. 쉽고 간편한 방법은 전자레인지를 이용하는 것인데, 감자를 껍질째 랩으로 싸서 전자레인지에서 5분 정도 익힌 다음 껍질을 제거한 후 으깨서 우유나 크림 등과 함께 부드럽게 섞어서 소금과 후춧가루 간하면 그대로 훌륭한 감자 요리가 된다. 반죽을 되게 해서 모양을 잡아 팬에 구우면 그대로 고소한 감자전이 된다. 갓 쪄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뜨거운 감자에 김치를 얹어 호호 불며 어린 손자의 입에 넣어주시던 할머니를 기억하며 오늘은 오랜만에 감자를 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