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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경험은 언제나 사방에서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것은 전시의 오프닝과 클로징, 혹은 패션 브랜드 론칭 같은 공식적인 자리는 물론, 결혼과 장례, 생일과 제사 같은 인륜지대사의 순간에도 늘 중심에 있다. 식경험은 모임의 성격을 완성하고 훗날 그 자리를 특별히 기억하게 만드는 방식이기도 하다. 눈으로 보고, 입 안에 넣고, 온몸으로 퍼지는 감각으로 공간의 분위기까지 디자인하는 케이터링 작업자들을 소개한다.

푸드 디자이너 변산노을(@physicsnatura)

충남 홍성에서 디자이너 변산노을이 운영중인 레지던시 ‘테스트키친 홍성’에서의 작업.

푸드 디자이너, 푸드 아티스트,… 여러가지 이름이 있는데 이중 변산노을을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까?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이 분야에서 일해오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의 단어로 정의하기가 어렵다. 강연을 할 때는 주로 ‘음식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이라 소개하고, 편의상 ‘푸드 디자이너’라는 직함을 사용한다. 물론 푸드 디자이너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안상수 개인전 <날개이상, 홀려라 홀리리로> 오프닝을 위한 케이터링
문학가 이상의 작품 세계를 안상수 디자이너의 조형 언어로 재해석한 전시. 안상수 디자이너로부터 음식에 관한 몇 가지 특별한 요청이 있었다. 전시 개막일인 4월 17일이 이상 시인의 기일이었기에, 그를 기리는 ‘제사’를 주제로 상을 차려달라는 제안이었다. 특히 이상의 임종 직전 일화인 “레몬 향기를 맡고 싶소”, 혹은 “센비키야의 멜론이 먹고 싶소”라는 문장을 언급했고, 그로부터 착안해 레몬과 멜론이 테이블 양끝에서 무게감을 잡는 실험적인 제사상을 구현했다. (멜론과 레몬 중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분분한 의견이 있었으나, 훗날 아내 변동림이 멜론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케이터링 현장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일들이 빈번할 것 같다. 대부분 임기응변으로 대응한다. 쌓으려던 음식이 무너지면 아예 해체된 장면으로 연출하거나, 재료가 떨어지면 즉석에서 남은 재료들을 모아 새로운 레시피를 만들기도 하고. 비정형적이고 흩뿌려진 느낌, 혹은 덩어리감을 강조하는 나의 작업 스타일이 오히려 이러한 변수들을 해결하기도 하는 것 같다. 만약 내가 아주 정갈하고 규칙적인 스타일을 지향했다면 현장에서 꽤 고전했을 것이다. 이런 일화도 기억난다. 안상수 개인전<날개이상, 홀려라 홀리리로다>를 진행할 때, 안상수 디자이너가 전시장에 레몬 향이 나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레몬 에센셜 오일을 준비해 갔다. 하지만 전시장의 공조기가 너무 강력해서 향이 바로바로 사라졌다. 급하게 작은 스프레이통에 에센셜 오일과 물을 섞어 수백 명의 관객 사이를 돌아다니며 바닥에 몰래 레몬향을 뿌렸다. 관객들이 ‘어디서 계속 레몬 향이 나지?’라고 궁금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더라.

일의 의뢰가 들어오면, 어떤 작업부터 시작하나? 의뢰가 들어오면 가장 먼저 작가와 작품, 혹은 기획 의도를 서적과 인터넷을 통해 심도 있게 조사한다. 주로 전시 케이터링을 진행하다 보니 이 과정에서 도출된 개념이나 역사적 사실, 감각적인 인상들을 키워드로 무질서하게 나열해 본다. 이후 해당 키워드들을 음식으로 시각화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며 여러 장의 스케치를 그리고, 그 위에 맛의 요소를 층층이 쌓아 올린다. 아이디어가 막힐 때는 평소 기록해 둔 사진들을 온종일 살펴보기도 한다. 길을 걷다 마주친 흥미로운 형태나 웅장한 풍경을 포착해 두는 습관이 큰 영감이 된다. 때로는 고전 명화나 여행 다큐멘터리 속 장면에서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작업의 핵심은 선정된 키워드를 자연물이나 식재료로 치환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땅’이라는 키워드가 주어지면, 흙의 형상을 구현하기 위해 ‘과자를 부술지, 콩가루를 뭉칠지’ 고민하며 떠오르는 재료들을 가감 없이 기록한다. 구체적인 스케치에 앞서 재료 탐색이 우선되어야 하기에 감정, 문장, 장소, 색상 등을 마인드맵 형식으로 풀어나간다. 현장의 빛이나 공간감에 따라 당일 레이아웃을 즉흥적으로 변경하기도 한다. 작업 스케치는 보통 하나의 완성된 장면으로 그려내기에, 그사이의 중간 과정들은 주로 텍스트 형태의 기록으로 남는 편이다.

양평문화재단의 <문화로운 양평 씨네페스타-삶과 음식>
<문화로운 양평 씨네페스타-삶과 음식> 중, 고(故) 임지호 셰프의 다큐멘터리 영화 <밥정>을 모티프로 한 케이터링. 양평문화재단에서 시민들을 위한 영화상영회를 진행하였는데, 영화 상영 후 그 여운을 음식으로 이어가는 전시 기반의 케이터링을 진행했다. 자연 재료를 직접 채취해 요리하던 ‘방랑식객’ 임지호 셰프의 철학, 즉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자연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를 담아내고자 했다. 특히 행사장인 양평은 토종 종자를 지키는 농부들이 많은 곳이라, 이들의 작물을 함께 소개하고 싶었다. 한 달간 양평의 농가 워크숍을 다니며 토종 종자의 의미를 인터뷰하고, 씨앗 채종법과 콩 고르기 등을 직접 공부하며 음식을 구상했다.

음식으로 작업할 때 변산노을이라서 가장 자신있는 건 뭔가? 나는 한 번 관심이 생기면 거기에 한동안 매몰되어 있다. 장점이자 단점인데, 디깅 작업을 오래 거친다. 무엇을 하든지 깊게 파고 드는 편이라 자료를 수집하고 키워드를 도출해 음식으로 형상화하는 프로세스 자체를 즐긴다. 조사 기간이 길수록 더 흥미로운 결과물이 나오기에, 양평 작업 당시에는 왕복 5시간 거리를 한 달 내내 오가며 농부들을 인터뷰하고 책을 뒤졌다. 반면 단기간에 결과물을 내야 하는 작업에서는 충분한 탐구가 어려워 아쉬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변산노을의 작업을 가장 잘 설명하는 묘사나 문장은 뭐라고 생각하나? 자주 쓰는 표현은 음식의 이야기, 음식의 장면이라는 말이다.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음식을 하나의 무대나 극이라고 생각하기도 해서 해당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서울시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서용선 프로젝트: 암태>
서용선 작가의 개인전 오프닝을 위한 케이터링. 1923년 전남 신안군 암태도 소작인들이 일으킨 ‘암태도 소작쟁의’를 다룬 전시. 개막연도인 2023년은 항쟁 100주년이 되는 해였기에, 음식 자체가 농민들의 삶을 증명하도록 기획했다. 실제 농사에 쓰이는 모판과 육묘판(모종을 기르는 판)을 활용해 음식을 설치하고, 항쟁의 핵심 요소인 쌀, 흙, 신안의 소금을 함께 배치했다. 육묘판에는 부추를 활용한 메뉴를 담아 마치 볍씨가 자라나는 모습을 재현했으며, 관객들이 음식을 통해 밭과 작물, 농업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도록 구성했다.

좋아하는 푸드 디자인 관련 인스타그램이나 틱톡 계정 같은 것이 있나? 푸드 디자인보다도 건축이나 설치미술 쪽을 많이 참고한다. 발효를 연구하는 작가들도 좋아한다. 프랑스의 레지던시인 @boisbuchet를 통해 작가들을 알아보고 그들의 작업물들을 많이 즐겨본다. 최근 가장 좋아하는 스튜디오는 @alea_work.

<2024 아트다이닝 프로젝트 : 기대어 깃든> 共進化 발효 CO-EVOLUTION

작업을 이어오며 가장 깊게 파고들었던 고민이나, 그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가 있다면 무엇인가? 케이터링 작업을 이어오며 ‘내가 혹시 시각적인 화려함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음식의 본질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근본적인 고민이 있었다. 음식에 얽힌 서사와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 농부들이 있는 지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틈틈이 해외 푸드 레지던시를 경험하며 작업의 결을 다듬어 왔다. 그 과정에서 한국에도 창작자들이 머물며 음식을 탐구할 수 있는 장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충남 홍성에서 푸드 레지던시 ‘테스트키친 홍성(@test.kitchen.hs)’을 직접 운영하게 되었다. 전문 기획자로서 시작한 일은 아니기에 서툰 부분도 많지만, 음식에 애정을 가진 작업자들과 교류하며 함께 배우는 기쁨이 크다. 현재는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위해 재정비 중이며, 앞으로 더 많은 분과 음식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앞으로 작업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 어떤 프로젝트를 기다리고 있나? 자연 속에서 온전히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경험을 설계하고 싶다. 흔히 말하는 ‘팜 투 테이블(Farm-to-table)’ 다이닝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의 산물을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방식으로 대면하는 미식 경험을 꿈꾸고 있다. 현재 시골에 거주하며 자연과 맞닿아 있지만, 이를 온전히 구현해낼 마땅한 공간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아 꾸준히 고민하고 있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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