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코스메틱 브랜드 이솝 코리아의 사무실은 이른 아침 말간 숲을 거닐 듯 고요해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엄격한 룰에 따라 디자인된 공간이다. 삶의 균형을 강조하는 창립자 데니스 파피티스의 철학이 깃들여 있는 ‘이솝 스타일’로 꾸민 사무실을 찾았다.
↑ 시계를 다는 위치의 통념을 깬 아이디어.
“저희 사무실에서는 볼펜은 검정색, 형광펜은 노란색만 허용됩니다.” 이솝 코리아의 홍보 담당자 임윤정 과장의 말은 처음부터 남달랐다. 공간 투어를 하며 설명을 듣고 있자니 볼펜 하나에서부터 물 마시는 컵, 마감재에 이르기까지 엄격하게 세워둔 가이드라인에 따라 만들어진 사무실이라는 것을 알고 흠칫 놀랐다. 어찌 보면 사무실까지 이런 룰을 적용한다는 것이 강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전쟁터와 같은 화장품 업계에서 남다른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일관성 있는 디자인 철학을 고집스럽게 지켜온 노력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이솝 코리아의 사무실은 제품 디자인에서 느껴지는 자연적이고 간결함이 고스란히 적용되어 있다. 설계와 디자인은 이솝 본사의 디자인팀이 맡았고, 시공은 한국의 디자인 스튜디오 투 래빗이 담당했다. 전 세계 60여 개국에 있는 이솝 매장은 본사 디자인팀과 각 나라의 건축가나 디자인 사무소가 협업해 완성하는데, 이솝 코리아의 사무실도 이런 룰을 따른 셈이다. 2개월간의 공사 끝에 완성된 사무실은 165㎡에 불과하지만 시공부터 가구를 들이는 마무리 과정까지 어려운 점이 많았다.
본사에서 원하는 나무 수종이 없어 흡사한 자재를 찾아 다녔고, 의자나 조명 하나를 선택할 때도 본사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 그런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기에 소품 하나도 만만한 것이 없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 작은 주방 앞에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리드미컬한 계단이 있다.
– 이솝 코리아 사무실 입구.
– 좋은 글귀를 정갈하게 장식한 컵.
– 10명의 직원들이 일하는 사무실.
입구에 들어서면 정갈하게 늘어선 갈색 병들이 이곳의 정체성을 알려준다. 그리고 유리로 마감한 비스듬한 천장 구조에서 내려오는 부드러운 햇살이 비추는 밝은 실내와 마주한다. 브랜드에서 추구하는 내추럴한 컨셉트를 공간에 적용하기 위해 가공하지 않은 나무 합판을 벽체로 사용했고 바닥은 오크와 부분적으로 자갈을 깔았다. 직사각형으로 기다란 구조를 띤 공간은 사무실과 라운지, 회의실, 작은 주방, 스토리지 룸으로 구성된다. 10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사무실에는 반듯하게 짠 책상과 창립자가 애용하는 허먼 밀러의 에어론 체어를 놓았고 친환경적인 LED 조명을 달았다.
사무실과 벽을 사이에 두고 만든 라운지는 직원들이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 있게 편안한 빈티지 체어와 올루체 쿠페 조명을 설치해 아늑한 분위기를 더했다. 사무실과 주방 가운데에 위치한 회의실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2개의 문을 열어 확장이 가능하다. 여러 명이 함께 앉을 수 있는 원목 테이블은 스탠다드 A에서 맞춤 제작한 것이고 덴스크를 통해 공수한 한스 웨그너의 GE902 빈티지 의자는 라운지에 배치했다. 또한 포개서 수납할 수 있어 유용한 카스텔리 체어와 루이스 폴센의 PH 조명을 회의실에 두어 편안한 스타일로 꾸몄다. 작은 테이블이 있는 주방은 직원들과 지사장이 함께 요리하는 이솝의 문화를 위해 만든 공간. 주방에서 사용하는 가전제품은 모두 수납장 안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위 회의실에는 필요에 따라 개폐가 가능한 2개의 문이 있다.
아래 허먼 밀러의 에어론 체어가 놓여 있는 사무실.
“일과 휴식을 엄격하게 분리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도록 디자인한 공간입니다. 창립자 데니스 파피티스는 질서정연하면서도 단순화된 공간이 집중도를 높이는 한편, 불필요한 낭비를 막는다고 생각합니다.” 설계를 담당한 본사 디자인팀의 말대로 공간 곳곳은 일과 휴식을 분리하면서도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효율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뷰티 브랜드 이솝은 용도에 충실한 뷰티 제품만을 내놓는다. 공간 역시 마찬가지. 데니스 파피티스는 균형 잡힌 물건이 우리 일상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어주는지 간파하고 전 세계의 매장과 사무실을 원칙에 따라 디자인하고 있다. 이솝 코리아 사무실 또한 그러한 철학을 공간으로 구현한 결과물 중 하나다.
↑ 한스 웨그너의 GE902 빈티지 체어가 놓인 라운지.
에디터 박명주 | 포토그래퍼 이과용
출처 〈MAISON〉 2014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