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희망

고요한 희망

고요한 희망

간단한 송년회부터 성대한 크리스마스까지 12월의 밤은 분주하다.

↑ 고서를 핸드메이드로 엮고 리넨 갓을 씌워 만든 이탈리아 브랜드 보르고 델 토바글리 조명은 메종드파리에서 판매. 형광 핑크빛 비너스 캔들은 챕터원에서 판매. 깃털이 달린 펜은 푸에부코 제품으로 팀블룸에서 판매. 심플한 밤색 캔들 홀더 ‘키비’는 이딸라에서 판매.

간단한 송년회부터 성대한 크리스마스까지 12월의 밤은 분주하다. 잠시나마 시끌벅적한 무리에서 벗어나 이른 아침 책상 앞으로 몸을 당겨 앉는다. 동쪽 하늘에서 해가 떠오르고 서쪽 하늘로 해가 지는 평범한 일상의 순환 속에서 위대함을 깨닫는 순간,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지만 면포를 뚫고 나오는 아스라한 불빛 속에서 2015년의 희망을 찾아본다.

에디터 박명주 | 포토그래퍼 차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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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에 취하리

취리히에 취하리

취리히에 취하리

스위스에서 가장 큰 도시인 취리히는 부유한 소도시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호수 주변을 한가롭게 거닐며 알프스의 자연을 감상하거나 다양한 인종이 머무는 대도시다운 매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이곳은
50여 개가 넘는 미술관과 문화센터 그리고 예술가의 개성 넘치는 부티크가 있어 볼거리가 풍성하다.

↑ 라퍼스빌 호수의 물가에 가면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다. 과거 하일리히 후슬리 Heilig Hüsli 성당으로 가는 역사 깊은 이 순례 길은 총 길이가 840m나 된다. 방문객들이 멋진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도록 목재를 사용한 재정비 공사를 시작해 2001년에 완공되었다.

취리히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보험 회사와 은행이 밀집한 도심을 바삐 오가는 양복 입은 직장인들의 모습? 혹은 깨끗하게 정돈된 길거리와 강렬한 디자인의 멋진 자가용들 그리고 눈길을 끄는 화려한 쇼윈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취리히는 출발과 도착 시간이 정확하고 완벽한 이동 시스템을 자랑하는 대중교통과 구글의 유럽 지사가 위치한 첨단 도시이다. 또 멀리 보이는 알프스 산맥과 호수가 어우러진 장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취리히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있다. 평균 일조량이 비교적 높고 날씨가 온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겨울에도 기온이 영하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이런 날씨 덕분에 길거리 곳곳에는 풀과 나무들이 잘 자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함부로 이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주말이면 풀이 난 길을 따라 산책을 즐기며 색다른 도시의 풍경을 즐기기 위해 모여든다.

↑ 맥주병으로 만든 샹들리에와 수천 권의 책으로 장식된 B2 호텔의 와인 라이브러리에는 과거 맥주를 만들었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주류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그 역사를 되짚어볼 수 있다.

오래된 철교는 취리히 서쪽 지역을 나타내는 하나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이 철교 밑에는 패션 브랜드 부티크와 디자인 상점들이 즐비해 있는데 유행에 민감한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쇼핑 장소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트램이 개통되어 훨씬 더 편리해졌다. 이곳은 과거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구역이었지만 몇 십 년이 지난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했다. 그 옛날 공업 지대였던 곳에는 현재 고급 레스토랑과 호텔이 들어서 있다. 자연미를 강조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식당에서는 뢰스티 Rösti(스위스식 감자전) 요리를 맛볼 수 있고 호텔에서는 로비에 마련된 두 대의 탁구대에서 친구와 내기를 할 수도 있다. 전위적이면서도 세련된 스타일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도 많다. 트럭의 화물 덮개나 현수막을 재활용하는 브랜드 프라이탁의 본점도 이곳 취리히에 있는데 총 4층으로 된 매장은 컨테이너 박스가 쌓인 듯한 구조물로 지어져 강렬한 개성을 뽐낸다.

1 오래된 철교는 보수공사 후 세련된 갤러리로 재탄생했다. 2 라퍼스빌 Rapperswil의 변두리에 자리한 쿤스트 하우스와 그 부속 건물인 도서관은 꼭 한번 들러볼 만하다. 3 취리히 서쪽에 위치한 옛 조선소 부지에 들어선 문화센터 ‘쉬프바우 Schiffbau’. 4 부티크 스파 B2 호텔의 복도. 5 그룰리히 호텔 Greulich Hotel에 있는 일본풍 자작나무 정원. 6 뢰벤브로이 Löwenbrau에 있는 이 맥줏집은 취리히의 명소로 손꼽힌다. 7 비아둑트 Viadukt 식당의 테라스의 모습. 오래된 철교의 흔적이 남아 있는 다리 밑에서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다.

취리히에서 서쪽 지역으로 가면 예술 갤러리를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화려한 골목을 만날 수 있다. 멋진 스케이트보드 전문 부티크, 몸에 문신을 한 미용사들이 운영하는 미용실 등 개성 넘치는 숍이 즐비해 있다. 이곳을 지나다 보면 최근 유행하는 스타일로 치장한 멋쟁이들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또 노인들은 자기의 손재주를 젊은 괴짜들에게 전수해주기도 한다. 이는 디자인 컨셉트 스토어에서 세대 간의 교류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자리를 마련한 덕분이다. 때문에 남녀노소 모두 이곳에 오면 각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 연극 무대, 재즈 클럽, 테크노 파티, 즉흥 프로그램이 마련된 미술관 전시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이곳 취리히는 동네 구석구석마다 예술이 살아 숨 쉰다. 때문에 취리히에서 권태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곳을 찾는다.

1 길거리 야경을 보면 스위스가 그래픽디자인에 일가견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2 레이탈 레스토랑은 과거에 마구간이었다. 3 컨테이너 박스를 층층이 쌓아놓은 듯한 구조의 건물은 프라이탁의 본점이다. 4 오래된 가구로 가득한 부티크 티슈 운트 스툴 Tisch und Stühl. 5 도자기와 가구를 전시하고 있는 웨스트풀르겔 Westflügel 스페이스. 6 길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푸른 초목이 우리를 반긴다. 7 옛날에 제련소로 사용했던 공간을 개조한 식당. 8 남성복 부티크 르 마조르돔 Le Majordome. 9 빈티지 스타일로 연출한 미용실. 10 항구도시였던 취리히의 옛 모습을 복원하고자 세운 30m 높이의 항구용 기중기.

에디터 다니엘 로젠스트로쉬 Daniel Rozensztroch│ 앙-세실 상세 Anne-Cécile Sanchez│포토그래퍼 제롬 갈랑 Jérome Gal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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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쁜 젊은 날

우리 기쁜 젊은 날

우리 기쁜 젊은 날

불황의 탄식이 곳곳에서 새어나오지만 젊은이들은 그들의 특기인 패기와 야망으로 새로운 일에 도전해야 한다.
대학을 갓 졸업한 신인 아트 디렉터 젯 스완이 자신의 갤러리숍 ‘인 하우스’를 오픈하고 프로젝트를 만들어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 레드처치 스트리트에 자리한 인 하우스의 외관.

나는 가구 수집가로 오랫동안 디자인계에 발 담그고 있으면서 마르셀 반더스, 하이메 아욘 등 젊은 디자이너들이 제 역량을 발휘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모습을 지켜봤다. 가능성 있는 젊은 디자이너가 성장하도록 돕는 일은 내 삶에서 또 다른 즐거움이기에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일에 흥미를 느낀다. 가을의 중턱인 지난 10월 중순, 런던 동부에 위치한 쇼디치의 레드처치 스트리트를 지나다가 갤러리인지 카페인지 가늠할 수 없는 독특한 공간 ‘인 하우스 In House’를 발견했다. 가정집 1층에 자리한 이곳에서는 ‘더 애플 스토어 The Apple Store’라는 주제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3평 남짓한 작은 공간을 빨간 사과로 가득 채워놓고 바구니, 그릇, 칼 등 사과에 관련한 모든 사물을 전시, 판매하고 있었다. 이 전시를 기획한 인 하우스의 주인이자 아트 디렉터인 젯 스완 Jet Swan은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20대 초반의 숙녀였다. 그 곳에서 자연스럽게 그녀를 만나 대화를 자연스럽게 나누게 되었다. 인 하우스가 있는 건물은 7년 전 영국 북부의 요크셔 지방에서 런던으로 이주한 젯과 그녀의 가족이 사는 집으로 건물 2층에 자리한 작은 방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후 졸업과 동시에 건물 1층에 자신의 갤러리숍인 인 하우스를 열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들을 수 있었다.

↑ 인 하우스의 젊은 아트 디렉터 젯 스완.

인 하우스는 매달 새롭게 변신하는 특이한 공간이다. 가게를 채운 소품들과 데커레이션은 그녀의 미적 취향을 반영한 것들로 각각의 물건마다 재미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추상적이고 예술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전시 방법, 즉 하얀 선반 위에 단정하게 물건을 올려놓는 갤러리나 진열장을 빼곡히 채운 리빙숍과는 차원이 다른 신선함이 느껴졌다. 이러한 방식을 택한 이유가 ‘판매’를 위한 것이라는 그녀의 대답도 정말 흥미로웠다. 이런 식으로 진열하면 예술가, 공예가가 만든 작품을 고객이 더욱 쉽고 친근하게 느끼게 된다는 점에서 나는 이 젊은 친구에게 한 수 배웠고 앞으로 더욱 훌륭한 아트 디렉터로 성장할 재목이라는 가능성도 읽었다. 새로운 개념의 숍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시간을 두고 천천히 키워나가겠다는 젯 스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3평 남짓한 숍에서 시작한 패션 디자이너 폴 스미스가 떠올랐다. 아직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말하는 삶에 대한 철학은 지금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이 살아가야 하는 방향을 내다보고 있는 듯했다.

↑ 첫 번째 프로젝트였던 <인 프린트> 전시 모습.

갤러리숍 `인 하우스`를 열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이곳은 7년째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이다. 1층은 가게로 매우 적합한 공간이었는데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곳을 활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대학 졸업 후 인 하우스를 만들게 되었다. 나는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패션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면서 시각적인 감각을 이용한 다양한 생각과 접근 방식을 배울 수 있었는데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싶었다. 그래서 인 하우스를 매달 다른 컨셉트로 공간이 완전히 바뀌는 방식의 갤러리숍으로 계획했다. 나는 물건을 어떻게 배치하거나 어떤 방식으로 설명할 때 사람들을 매혹할 수 있는지 고민했으며 아트 디렉터로서 나의 생각을 이곳에서 가감 없이 보여주고 싶다.

아트 디렉터이자 큐레이터로서 당신만의 접근 방식이 궁금하다. 나는 전시된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주제 안에서 통일되도록 신경 쓴다. 12월 한 달간 진행되는 <인 화이트 In White> 역시 색상이나 사물의 의미 등 어느 하나 어긋남 없이 서로 녹아들도록 계획했다. 전시를 큐레이팅하면서 얻는 즐거움 중 하나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나의 미학적 관점이 관객들과 소통할 때 작은 공간은 대화로 가득 찬다.

↑ 지난 11월에는 사과를 주제로 한 <더 애플 스토어> 전시를 한 달간 선보였다.

전시 기획 시 무엇에서 영감을 받으며 아이디어를 구현하기까지의 과정은 어떠한가? 본능적인 직감에 따르는 편이다. 첫 번째 프로젝트였던 <인 프린트 In Print>전을 마치고 새로운 기획을 세워 이 공간이 완전히 변화되는 곳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사람들이 가을을 사과의 계절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과 함께 컬러와 공간 분위기, 계절의 느낌 등에 대한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두 번째 전시였던 <더 애플 스토어>는 그렇게 이틀 전에 기획을 하고 전시를 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평소 나의 미적 취향과 잘 맞는 이들을 찾아 협업에 대한 계획을 나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떤 작업을 함께 하고 싶은지에 대해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그래야 진정성 있는 관계가 형성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신뢰로 바뀌게 된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일이기에 나의 작업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아름다운 예술의 형태로 물리적인 공간에서 구현되고 또 다른 사람들과 이어지는 이 모든 과정이 정말 흥미롭다.

↑ 다음 전시인 <인 화이트>를 준비 중인 모습.

예술, 디자인을 공부한 사람으로 예술가와 큐레이터가 지닌 관점의 차이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둘은 때때로 보완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하나보다는 둘일 때 서로의 강점이 커지면서 더욱 강력한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술가와 큐레이터는 동일한 관점일 수는 없다. 예술가는 창조에 대한 열정과 의무감으로 분투하는 데 집중하지만 큐레이터는 그들의 추상적인 생각과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그것을 나눔으로써 좀 더 현실적인 방법으로 사람들과의 연결점을 만들어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런 의미에서 인 하우스는 특별한 것 같다.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면서 예술가의 생각을 공유한 기획 전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이곳은 단순한 숍이 아니다. 갤러리와 상업 공간 그 중간쯤이라고 해야겠다. 이곳에서는 많은 대화가 오고 간다. 방문객들은 아트 디렉터인 나와 대화를 나누고 나는 그들의 반응을 통해 또 다른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이는 대부분의 갤러리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것이다. 색다른 공간과 분위기를 창조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머릿속에만 있는 생각을 현실화하는 것은 휠씬 힘든 일이었다.

↑ 레드처치 스트리트에 자리한 인 하우스의 외관.

당신은 스스로 일거리를 찾았다. 그건 아마도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역할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직업을 갖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교에서 오랜 시간 교육을 받아오면서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간접적으로 접해왔다. 하지만 졸업과 함께 우리에게 닥친 상황은 그야말로 현실이다. 지난 1990년대와는 경제적으로 다른 상황이지만 그 당시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창의성을 발휘해 돈을 벌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 점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건지에 대해서 말이다. 특히 지금은 경쟁에 내몰려 있어 무척이나 힘든 것이 현실이지만 우리는 더욱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가? 하우스를 운영하는 일 외에도 다양한 프로젝트에 아트 디렉터로 참여하고 있다. 수작업으로 예술 서적을 만들고 있는데 주문, 제작한 책을 내년 3월에 선보일 예정이다. 또 내년 런던 패션위크 때 선보일 센트럴 세인트 마틴의 MA 패션쇼와 관련한 아트 디렉팅을 맡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세인트 마틴의 루이스 윌슨 교수가 세상을 떠난 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쇼라서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하고 있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과 협업해서 새롭고 흥미로운 작업을 계속해서 선보이고 싶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나 스스로를 한 발짝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조금씩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안정권에 진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에디터 최고은 | 인터뷰 김명한(aA디자인뮤지엄) | 사진 레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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