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티지 캐비닛의 첫 번째 서랍을 열면 함은혜 씨가 모은 연필이 가득하다. 이미 연필 수집가로 전시에도 참여하고, 인터뷰도 했을 만큼 유명한 그녀다.
집주인 함은혜 씨는 문을 여는 순간, 거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이 집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집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됐고, 아이와 함께 자연을 찾아다니다 보니 녹색 식물이 주는 에너지도 새삼 느꼈다. 거실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연세가 있는 부부가 살던 단독주택은 소위 말해 공주풍의 집이었다. 붉은색 외관은 독특해서 그대로 두었지만, 곡선의 계단 난간을 비롯해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요소를 걷어냈다. 스튜디오 에디의 이지연 대표는 함 은혜 씨의 바로 이전 집을 디자인했는데, 이번 단독주택의 내부 리모델링으로 다시 만났다. 인테리어와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집주인은 글로벌 IT 회사의 마케터이지만 2500자루의 연필을 보유하고 있는 연필 수집가로도 유명하다. “이 집에서는 1인 2개의 방을 사용하는 것 같아요(웃음).

보이저호가 태양계를 벗어나면서 촬영한 작은 지구의 모습을 담은 사진 작품에서 함은혜 씨의 관심사를 느낄 수 있다. 광교 스트롤 오픈 당시 받은 옥승철 작가의 작품이 그려진 쇼핑백과 컬러별로 정리한 책장에서 그녀의 취향을 읽을 수 있었다.

집 안에 들어서는 순간, 거실 창문 너머의 자연 풍경을 보고 이 집을 선택했다. 아직 여름의 기운을 만끽하고 있지만, 사계절 내내 작품 같은 자연을 보여줄 창문이다.
곤충을 좋아하는 아이가 마당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아요. 층간 소음에 신경 쓰지 않고 집에서 편하게 생활할 수 있고, 빛이 잘 들어와서 아침 일찍 눈이 떠질 때 단독 주택으로 이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함은혜 씨 가 집을 소개했다. 이 집의 꽃은 찰스&레이 임스 부부를 좋아하는 함은혜 씨의 애정이 담겨 있는 주방이다. SNS를 통해 그들이 살았던 집을 매일 볼 만큼 임스 부부를 좋아하는 그녀는 임스의 시그니처 컬러를 주방에 적용했다. 이지연 대표는 동그랗게 뚫은 손잡이까지도 일일이 맞췄을 만큼 공들인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래픽 작업처럼 깔끔하게 구획이 나뉜 주방 가구와 꼭 적용해보고 싶었던 천장에서 내려오는 선반까지, 평소 생각했던 것을 실제로 주방에 적용했다. 별다른 장식 없이도 이미 창밖 풍경이 사계절 내내 훌륭한 인테리어 요소가 될 거실은 원래 사용하던 빈티지 소파와 TV만 간결하게 두었다.

새로운 인테리어와 어울리도록 계단과 중문도 교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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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조지 넬슨 디자인의 테이블과 의자를 둔 다이닝 코너.
컬러가 많은 주방과 균형을 이루는 미니멀한 거실이다. 난간을 새로 바꾼 계단을 오르면 2층의 작은 서재가 먼저 보인다. 창밖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만든 윈도 시트를 제작한 서재에는 디터 람스의 선반과 원래 집에서 식탁으로 사용하던 테이블을 책상으로 두었다. “요즘 제가 우주 공부에 꽂혔어요. 그래서 화성을 표현한 스노볼과 아인슈타인 오브제,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우주 행성 같은 모빌 등을 장식했어요. 하지만 3층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요”라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계단을 올랐다. 다락방 같은 3층은 아이와 함은혜씨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취향의 집합체 같은 곳이다. 삼각 지붕이 아늑한 방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만화책부터 우주 관련 아이템, 레고 그리고 오랫동안 모아온 연필과 문구류가 가득하다. 그녀는 이곳에서 북바인딩 작업도 하고, 연필로 필사를 하기도 하고 아이와 함께 레고를 조립하기도 한다.

마치 문구점에 온 듯 연필뿐만 아니라 각종 책과 문구를 정갈하게 정돈했다.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3층 책상은 그녀가 취미 활동을 하거나 필사를 하는 소중한 자리다.
손으로 하는 작업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 분명하다. 빈티지 캐비닛의 긴 서랍을 열면 엄청난 개수의 연필에 놀랄 수 밖에 없다. “지금은 연필의 인기가 시들해졌지만 과거에는 정말 좋은 흑심과 나무를 사용해 연필을 만들었어요. 연필도 생산 시기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그런 점이 재미있죠. 이 연필로 한번 써보세요.” 함은혜 씨가 건넨 블랙윙의 연필로 글씨를 쓰자 흑심이 종이에 부드럽게 리며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빨간색 상판의 책상에는 최근 필사하고 있는 과학 도서인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연필로 쓴 씨가 빼곡한 노트가 놓여 있었다. 함은혜 씨 가족은 이 집을 아주 충실하게 즐기고 있다. 지하부터 3층 까지 허투루 사용하지 않고 층마다 역할을 부여했다. 덜컥 저질러버렸다는 단독주택으로의 이사는 성공한 셈이다. “동네가 좋아서 집이 더 좋은 것도 있어요. 집마다 개성 있게 마당을 꾸미고, 집을 매만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져요. 정말 동네에 살고 있다고 느껴지고요.” 그녀의 말처럼 아파트 생활보다 더 부지런하고 해야 할 일도 많지만 그것마저도 기쁨이라고 느끼는 이들에게 단독주택은 언제나 매력적인 선택지다. “꼭 하고 싶었던 스타일이 있어서 세탁과 건조실을 만들고 있어요. 그 옆에는 홈트와 영화감상을 위한 방이 꾸며질 거고요.” 이사한 지 2주 만에 촬영을 해서 미처 담지 못한 공간이 많지만 연필 수집가의 집은 그녀의 끊이지 않는 호기심과 취미 덕분에 계속 새로운 쓰임새를 갖게 될 것이다.

1층 거실 벽에 매입식으로 만든 파란 선반에도 좋아하는 소품을 장식했다.

2층 서재 벽에 설치한 비초에 선반 시스템 위에는 최근 관심사인 우주와 관련된 오브제와 책 등을 장식했다. 햇빛이 닿으면 아인슈타인의 손이 움직여서 더욱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