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색채와 유쾌한 텍스트, 직관적이고 유쾌한 작품들. 개념이나 논리 대신 ‘미술이 곧 즐거움’이라는 철학으로 작업하는 이명미 작가의 삶은 그 자체로 예술이 된다.


이명미 작가의 대구 작업실 전경.
“나는 생각나는 대로, ‘이게 참 재미있다’ 싶으면 그림을 그려요.” 이명미 작가를 만나기 위해 대구에 있는 작업실을 방문해, 한 시간가량 두꺼운 도록들을 넘겨 보며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때는 가정에 대한 생각밖에 없어서 그림 가운데 ‘토킹 어바웃 디너 Talking About Dinner’라는 글을 써넣었고, 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빠져 있었어요.”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 있잖아요, 최백호가 부른 그 노래가 진짜 좋더라고요. 그래서 그림에 가사를 넣어 봤어요.” “여기 ‘1’이라는 숫자는 카카오톡의 ‘1’을 생각하며 쓴 거예요. 어느 날 조카가 카톡에서 ‘1’이 안 사라지면 상대방이 안 읽은 거라고 얘기해줬는데, 너무 가슴 아프게 확 꽂혀서.” 너무 평범해 때로는 존재조차 희미한 일상 속 소재들은 이명미 작가에게 작업의 영감이 된다. 가끔 경쾌한 색감의 작품 뒤엔 서정적으로 표현된, 작가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담겨 있다. “내가 위암 수술한 지 6개월 만에 딸이 시한부 6개월 판정을 받았어요. 그 후로 2년을 더 살긴 했는데, 딸 간병을 하느라 내가 환자인 줄도 모르고 살았어요. 딸 간호하고 작업실 와서 캔버스에 물감을 부어놓고, 완전히 몰입하진 못했지만 이렇게 눈물방울 같은 그림을 그렸어요.” “이거는 <내 사랑 나의 누이>. 보들레르의 시에서 나온 글이면서도, 세상을 떠난 언니 이향미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어요.” 한국의 1세대 작가 이명미가 처음 작품 활동을 시작한 1970~80년대엔 단색화라는 지배적인 사조가 있었다. 반복적인 행위와 최소한의 표현을 통해 물질의 본질과 작가의 정신성을 탐구하던 때였지만, 이명미 작가에겐 사유와 논리라는 틀보다는 직관과 감각으로 그리는 ‘놀이’로서의 미술이 더 중요했다. 강렬한 색채와 톡톡 튀는 텍스트, 단순명백하면서도 주관적인 작업들을 이어오며 어떤 미술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축을 형성해온 이유다. 도록에 수놓인 각 작품에 얽힌 사연을 들은 뒤, 이명미 작가의 작업실에 앉아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작업 중인 캔버스 뒤에서 웃어 보이는 이명미 작가.

거침 없는 붓놀림으로 여백을 채우는 이명미 작가의 손.
다채롭고 뚜렷한 색채와 그림 위에 쓰인 단어와 문장들은 작가님의 작업의 근간인 것 같습니다. 작가님에겐 이 두 요소가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1972년 당시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앙데팡당>이 열렸는데, 그때부터 한국에 백색으로서의 단색화가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학교 다닐 때부터 색채에는 쭉 관심이 있었는데, 백색만으로 작업을 하기 싫었던 거지. 꽃밭에는 여러 가지 꽃이 피어야 되는데, 백합이나 흰 꽃만 꽃 취급을 받는 것 같은 마음에 색채를 더 열심히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이전의 사실화는 주제와 등장 인물이 있었고, 잭슨 폴록은 형식적인 그림의 틀을 깨기 위해 바닥에 캔버스를 두고 물감을 흩뿌리는 작업도 했는데, 갑자기 단색화 바람이 부니까 통제를 받는 듯한 느낌도 조금 들었어요. 그래서 1977년 그로리치 화랑에서 첫 개인전 <놀이>를 할 때는 일부러 화면을 다 분할하기도 했어요. 처음부터 계획해서 그린 게 아니고 이만큼씩 분할해둔 다음에 즉흥적으로 그렸지. 어떻게 보면 어렸을 때 위인전을 너무 읽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반골 기질이 생긴 게.

작업실 한쪽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물감과 붓들.

독서 중인 이명미 작가.
작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동물과 식물, 생활용품, 숫자와 문자 등 일상적인 요소에서 작업 소재를 찾으시죠. 우리나라 민화를 보면 색부터 소재까지, 서민적인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잖아요. 또 궁궐에 있는 병풍들을 보면 오색찬란한 그림들이 있고요. 나는 양쪽을 다 그리고 싶었어요. 내 그림의 주제는 내가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계속 나올 거예요. 이 생활이라는 게, 나이 칠십이 넘어서 보니 10대 때 어느 강가에서 본 강 풍경이 훅 생각날 때도 있고, 31세에 처음 했던 경험이 올라올 때도 있고 그래요. 나이가 든다는 건 소재의 창고가 훨씬 더 넓어졌다고 생각하면 돼요. 나는 30대 때부터 그 창고에서 내 안의 경험을 뽑아 써왔어요. 나이가 들면서 더 많이 내려놓기도 하고, 삶에서 쇼크가 올 때는 그 충격의 주파수를 더 올리거나 내리는 기능을 더 발달시키기도 하고요. 그러니 내 그림은 비슷하면서도 그때그때 바뀔 수밖에 없어요.

작업실 한쪽엔 작가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CD 앨범들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다.
어쩌면 논리와 이성보다 앞서는 게 직관과 감각이고, 작가님 또한 거기에 기반해 작업하니 세대를 초월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란 생각도 드네요. 개념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샤르트르나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들을 언급하지 않으면 무지한 걸로 취급받았거든요. 데리다니 라캉이니, 이런 말을 해줘야 ‘책 좀 봤네’ 쳐줬어. 물론 두뇌 역할도 중요하지만, 우리 그림쟁이들은 그림을 재료로 표현하잖아요. 개념미술 쪽에서는 1960~70년대에 성능경 작가나 이건용 작가가 퍼포먼스를 통해 기존 미술 체계에 반하는 제스처를 보였는데, 그것이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했어요. 나도 분야와 추구하는 바는 다르지만, 그런 흐름을 품어야 된다 생각도 했고, 당시 여성 작가들은 남성 작가의 두 배 이상 노력해야 인정받는 분위기도 있었으니 그런 것에 대한 저항 정신이 생겼죠. 전 시대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을 해야 된다는. 나는 내 고유한 것들을 유지하면서 작업해도 할 게 너무 많은데, 기왕 그럴 거면 오색찬란한 걸로 다 하고 싶었어요. 한때는 그런 말도 했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하는데, 물냉면 고를 때는 비빔냉면과 갈등하다 고른다.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과 짬뽕 중 선택해야 하면 반씩 섞어달라’ 한다고. ‘내 그림도 그렇게 그리면 되겠네’ 하는 생각을 일찍부터 했어요. 다 들어갈 수 있는 그림. 내가 그리고 싶은 걸 그릴 때 그게 가장 강한 힘이 되고, 그게 가장 강한 자기만의 향수가 될 수 있어요.

작업 중인 작품들.

조은숙 아트앤라이프스타일 갤러리에서는 이명미 작가의 개인전 을 2024년 12월 28일까지 전시한다.
197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끊임 없이 개인전과 그룹전을 열며 새로운 작품을 그리고 계십니다. 지금 작업실 캔버스에도 여러 개의 작업이 진행 중인데, 바닥의 물감 자국을 보면 작가님의 치열한 창작열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는 있잖아. 눈 뜨면 제일 먼저 그림에 대한 생각들이 비몽사몽 떠올라요. 나이가 들수록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싶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어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작품도 많이 쌓이니까 이 작업실도 작게만 느껴져요. 나는 이런 방이 몇 개 더 있으면 돌아다니면서 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하나님이 나한테 제일 좋은 걸 주셨어요. 아이디어가 한 번도 궁한 적 없어. 2004년 위암으로 위 일부를 절제했거든요. 한 3~4년 전엔 안과를 생애 처음 갔더니 망막이 떨어지고 있다고, 이대로 두면 몇 년 내로 실명한다고 해서 그때 망막 붙이는 수술도 했어요. 이 화실 앞에서 미끄러져 팔이 부러져서 팔 수술도 받았는데, 사실 팔이나 위 수술보다 망막이 떨어진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가 더 충격이었어요. 실명이 되면 아무것도 못 하잖아요, 눈으로 확인해야 되는데. 앙리 마티스는 대장암으로 건강이 나빠지니 색종이를 오려서 콜라주 작업을 하기 시작했잖아요. 나는 그 자세는 돼 있어. 그래서 이제는 조수를 붙여야 되나 생각도 하고 있죠. 아이디어는 자꾸 나오는데, 내 작업 속도가 그걸 따라가지 못하니까요. 내가 해야 될 게 너무 많은 거야. 앞으로도 해야 될 게 너무 많아요.
작가님의 작업물을 보면 세상의 모난 점을 애써 모르는 척하지 않고, 그것까지 유쾌한 시선으로 포용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때로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가족이 먼저 세상 떠나는 걸 지켜봐야 했고, 인생 경험이 쌓일수록 역경도 많이 겪으셨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젊은 저보다도 따뜻하신 것 같습니다. 따뜻해. 왜냐하면 내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림을 그리면, 거기에 내 고통이라든지 아픔도 상쇄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림은 내가 숨는 장소이기도 해요. 내 가슴속에서 그 슬픔을 끄집어내고, 뚜렷이 볼 수 있게 되는 곳. 돌이켜 보면 내 부모님이 아주 맑은 사람이었고, 나하고 결혼한 애들 아빠도 아주 맑은 사람이었어. 살면서 주변에 많은 사람을 안 두는 편이기 때문에 맑은 사람만 택하고 그 사람들만 본 거 같아요. 그리고 나는 내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치유되기 바라면서도, 그걸 억지로 드러내거나 강요하고 싶진 않아요. 그러니까 그 슬픔을 배분하는 거죠. 캔버스 위에 그걸 표현하는 건 감정을 조절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자기 감정을 어느 선에서 표현하는 일종의 균형이 필요하기 때문에, 작가가 세계를 보는 세계관도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완전히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그럴 때는 이런 그림 못 그려요. 운동 선수들도 자기 몸 컨디션을 조절하듯이, 작가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컨디션을 만들어야지.
작가님 작업에 꽃이나 별, 혹은 생명력이 있는 물체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까요? 별이나 꽃은 추악한 것이 아니잖아요. 아름다운 것이고. 별은 결혼 전인 1970년대에도 그렸어요. 이 꽃이나 별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지, 무서운 건 아니잖아요. 또 작가로서 보면 리얼리즘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시점, 그 변화의 과정에서 디자인적으로 압축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세 번째 이유로는, 그리기가 쉬워요.(웃음).

회화부터 설치작품까지, 작가님의 작업에는 의자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1997년 작품 <그 곳으로 갈게>에서는 평면 캔버스 위 그림으로 나타났다면, 2013년 강정 대구현대미술제에서 선보인 의 의자는 캔버스 밖을 벗어나 거대한 조형물로 나타났죠. 이는 이후 <앉으시오>라는, 5m가량의 두 개 설치물로 디벨롭되어 대구미술관에 전시한 후 소장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조형물은 초등학교 시절 쓰던 의자를 배로 확대해서 만든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앉으라고 쓰여 있는데, 크기가 너무 커서 앉을 수 없지. 일종의 블랙 유머예요. 그런데 나중에 전시회가 끝나고 찾아가보니까 어떤 개구쟁이가 여길 올라갔더라고. 발자국이 찍혀 있었어요. 처음 전시하면서 원래는 평면으로 시작을 했다면, 이제는 전시 공간이 점점 거대해지고 확장하면서 작품도 점점 디벨롭된 거죠.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이 처음 작업한 1970년대 초기엔 드로잉으로 등장하다가 이제는 FRP 조형물로 진화한 것처럼, 제 작품 세계와 전시 공간이 확장하면서 표현 영역도 점점 넓어지고 있어요.
근 50년간 쉬지 않고 작업하셨는데, 그것보다 앞으로의 20년이 중요하다고 말하신 적 있죠. 내가 68학번이니 이 일을 한 50년 했는데, 나는 톨스토이나 푸시킨 같은, 산맥 같은 화가가 되고 싶어요. 우리가 문호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산맥 같은 글을 남긴 것처럼 설악산, 지리산 이런 거 말고 태백산맥 같은 산맥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 되려면 더 많은 걸 이뤄야 한다는 생각이 있죠. 아직까지는 이런 나를 보고 웃는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진짜 산맥을 꿈꾸려면 내가 20년을 더 열심히 해야 돼. 그냥 앞산이나 남산 이 정도로 끝나고 싶지는 않아. 일단 꿈은 커야 되잖아. 처음 그림을 시작한 젊을 때는 이런 생각을 안 했어요. 그냥 단순히 그림을 그리고 싶다에만 꽂혔다가, 육십이 넘어서부터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나는 산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대세를 따르지 않고, 개념이나 논리 대신 ‘미술이 곧 즐거움’이라는 철학 아래 감성과 직관에 의지해 작업하는 선생님의 삶 자체가 어쩌면 미술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초반엔 불교 미술 같은 다른 작업도 했지만, 1977년 첫 개인전 <놀이>를 하면서부터는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어요. 너무 확고하고 지금도 해야 될 게 너무 많아요. 나는 작가가 된 게 진짜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업실이, 캔버스가 완전히 제2의 창조 공간이잖아요. 여기서는 내가 새로운 창조를 할 수 있고, 조물주나 다름없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내가 그리는 우주를 만들 수 있어요. 내 작품들은 이명미가 만든 우주고, 내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어릴 때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이기도 해요. 이 우주에 내가 생각하는 도덕감, 선악에 대한 생각 등 모든 게 들어가는 거잖아. 내가 창조주가 돼서 할 수 있는 거고, 기쁠 때는 여기서 기쁨을 표현할 수도 있고, 슬플 때는 여기서 눈물도 말릴 수가 있는 큰 운동장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