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직조

고요한 직조

고요한 직조

태피스트리를 통해 깊은 내면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이현화 작가.

우란문화재단에서 진행 중인 단체전 <삶의 씨줄> 전경. 종이를 구긴 듯한 형태의 입체적인 태피스트리를 구현했다. ©우란문화재단

우리가 살아가면서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과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 감춰둔 문장들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스스로 대화하듯 거칠게 적어내던 글. 그러면서도 다시 지우거나 종이를 구기며 그 과정을 반복하곤 한다. 이현화 작가는 이러한 속마음을 태피스트리로 풀어내며 독특한 이야기를 선보이고 있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녀는 우연한 계기로 섬유예술을 접하게 되었다. 태피스트리, 직조, 자수, 염색 등 다양한 기법 중에서도 회화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태피스트리에 매료되었다. 얇은 한 줄의 실이 쌓여 하나의 큰 그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태피스트리 직조 방식 역시 가장 회화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전통 고블랭 Gobelin 기법을 사용한다. 가장 기본이 되는 평직 조직으로서, 긴장시켜 놓은 날실에 씨실을 번갈아 교차하며 짜 내려간다. 색을 혼합한 씨실만 보이기 때문에 표현하는 데 있어 자유도는 높지만 그만큼 손기술이 더 요구되는 기법이라 작업 시간이 오래 걸린다. 오랜 작업 시간은 작가에겐 자신을 태워 보내는 승화 과정과 같다. 작업에 몰입하고 떠나 보내며, 그 과정이 고스란히 시각적 화면에 드러나길 바란다.

내면의 이야기를 태피스트리로 구현하는 이현화 작가.

우란문화재단에서 진행 중인 단체전 <삶의 씨줄>에서 선보인 태피스트리 시리즈 는 그러한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3개 연작으로 이루어진 <0810>은 1년간의 긴 호흡으로 완성된 연작으로, 점차 종이가 구겨지고 텍스트는 사라지는 화면을 담고 있다. 작업 위 문장들은 나 자신에게 되뇌는 언어가 주로 많다. 자기 고백적인 편지인 것이다. 은 실제로 구길 수 있게 제작된 태피스트리다. 평면 형태가 대부분인 태피스트리지만, 종이가 구겨진 것처럼 보이게 구현했다. “입체적으로 작업한 태피스트리는 한 작품당 4~5개월 정도 시간이 걸립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작업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썼던 글 속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그리고 마지막 경사를 가위로 잘라내는 순간, 이제 보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래서 태피스트리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머리카락을 태운 잿가루로 그려낸 회화 작업.

2024 공예 트렌드 페어와 단체전 준비 등 다양한 전시를 준비하며 바쁜 일상을 보낸 작가.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작업을 이루는 큰 키워드로 ‘내 영혼의 제의’를 말한다. “개인적으로 내면의 변화가 컸어요. 삶과 죽음에 대한 의미, 그 과정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지 고민이 많았어요. 주위에 떠나가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새로운 인사나 만남보다는 떠나 보내는 일이 더 많아진다는 것 같아요.” 불안한 마음에 평안을 주기 위해서 방법을 찾은 건 결국 작업이었다. 작업이 나 자신에게 불안을 주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큰 위안을 준다고 전한다. 신작으로 선보인 비석 같은 돌탑 입체 작품이나, 자신의 머리카락을 나무와 함께 태운 잿가루로 그려낸 회화 작업 등 평안을 기원하는 작품들을 제작했다. 이와 함께 재료의 근원적인 상태를 많이 고민하고, 실험하며 작품 세계를 확장해가고 있다. “작품을 표현하고 만들어내면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스스로 작품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태도예요. 저는 이 세상의 소외된 것들을 깊이 바라보고, 안아주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인 것 같아요. 지금은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나의 소외된 마음을 되돌아보며 작업하고 있어요. 점차 나 이외의 것에도 관심을 가지며, 이 세상의 소외되고 잊힌 것들을 나만의 시각적 언어로 풀어내고 싶습니다.”

종이 위에 실을 수놓고 조명으로 연출한 <0412-1>.

2024 공예 디자인 페어에서 선보인 <기원의 돌>과 <여명>.

이현화 작가의 작업실.

SPECIAL GIFT

이현화 작가에게 증정한 끌레드뽀 보떼의 더 세럼 II은 피부에 고르고 빠르게 흡수되어, 피부 본연의 힘을 일깨워주고 짧은 시간 안에 피부 속부터 빛나는 결빛 광채를 선사한다. 50mL, 34만5000원.

CREDIT

에디터

포토그래퍼

류주엽

TAGS
The Heritage Continues

The Heritage Continues

The Heritage Continues

1978년부터 지금까지, 순수예술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해온 예화랑의 유산과 역사는 새롭게 문을 연 창덕궁점에도 계속해서 이어져오고 있다.

1층 정면에서 바라본 예화랑 창덕궁 입구. 개관전 <임응식: 아르스 포토그라피카>는 2025년 1월 24일까지 진행된다.

예화랑의 김방은 대표.

한국의 1세대 화랑 중 하나인 예화랑이 창덕궁에 새롭게 전시관을 열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개관전은 한국 1세대 사진작가 임응식의 개인전 <임응식: 아르스 포토그라피카 Ars Photographica>. 아르스는 ‘예술’을 뜻하는 라틴어로, 영어 아트(Art)의 어원인 동시에 1946년 피란 수도 부산에서 임응식 작가가 연 사진현상소 이름이기도 하다. 그 당시 ‘사진사’로 불리던 사진가들에게 예술가로서 자부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사진작가’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그였다. 인간의 기술 연마를 통한 미적 표현, 넓게는 인간의 창조적인 모든 활동을 뜻하는 ‘예술(Ars)’이라는 단어는 임응식의 삶 그 자체를 관통하는 말인 동시에 1978년 첫 개관부터 지금까지, 순수예술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해온 예화랑의 가치관과 많이 닮았다. 예화랑의 새로운 공간과 그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임응식 작가의 예술 세계에 대해 김방은 대표와 이야기를 나눴다.

<연인>, 1955.

1989년의 임응식 작가.

1978년 인사동에서 처음 문을 열고 1982년 신사동으로 이동한 뒤, 약 40년 만에 터를 이전했다. 창덕궁에 새로운 공간을 열기로 결정한 이유가 있는가? 42년 동안 운영하던 가로수길 건물이 리노베이션에 들어가는데, 이를 계기로 앞으로는 강남점과 강북점으로 나눠 운영할 계획이다. 그동안 새로운 지점을 어디서 운영할지 고민하던 차, 지난봄 친구 작업실을 방문하기 위해 이 동네에 왔는데 길을 쭉 걷다 보면 나오는 빨래터부터 창덕궁과 연결되는 길까지 모든 것이 좋았다. 마침 시기가 딱 들어맞아 처음 3층 자리를 사무실로 사용하고자 계약한 뒤, 1층, 2층 공간도 차례로 비게 되어 갤러리를 준비할 수 있었다. 석 달 간의 공사를 거쳐 2024년 11월, 현재 진행하고 있는 <임응식: 아르스 포토그라피카>를 개관전으로 문을 열었다.

임응식 작가가 사용하던 카메라와 그의 생전 사진.

3개의 전시실부터 옥상까지 층을 걸쳐 나뉘어 있다. 신사점보다 협소한 규모다 보니 공간 기획에 신경을 많이 썼을 것 같은데. 1, 2, 3층부터 옥상까지 모두 느낌이 다르다. 1층은 온전히 작품만 감상할 수 있게 준비했다. 1층에서 2층으로 향하려면 건물을 나와 옆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잠시나마 동네 정취를 느낄 수 있다. 2층에 올라오면 펼쳐지는 창덕궁과 자연 경관은 공간의 반전 역할을 하는데, 작품들이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2층에서는 창문을 통해 바깥 뷰가 공간 안으로 들어온다. 사실 자연을 이길 수 있는 아름다움이 쉽지 않은 터라 이 공간에서 작품을 건다는 것이 작가들에게도 챌린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과 작품이 이기고 지는 경쟁을 한다는 개념은 아니지만, 같이 놓였을 때 서로 잘 어우러지면서 각자가 돋보였으면 한다. 3층은 큐레이터와 관람객이 만나는 공간이다. 규모가 큰 가로수길점에서는 관람객과 커뮤니케이션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창덕궁점에는 3층에 사무실과 전시 공간이 함께 있어 관객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그 덕분에 작품을 보러 오시는 분들과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예화랑의 2층 공간.

창덕궁점 개관전으로 특별히 임응식 선생님의 사진전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2023년, 예화랑의 45주년을 준비하며 히스토리를 쭉 정리했다. 근대 시절부터 현대의 작가들까지, 예화랑과 함께 전시한 1세대 서양화가와 조각가들을 훑어봤는데 ‘풍모 시리즈’를 통해 그들을 굉장히 멋있게 사진을 찍어준 분이 임응식 선생님이었다. 의외로 작가들의 얼굴을 잘 모르는 관람객들도 있고, 전시를 준비하며 이런 멋있는 사진이 같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임응식 선생님의 아카이브를 관리하는 손자 분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렇게 임응식 선생님에 대한 역사를 쭉 정리해가며 공부해보니 새삼 대단한 분이라 느껴지더라. 언젠가 중요한 사진가도 예화랑에서 꼭 소개해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생겨 예술가를 찍은 ‘풍모 시리즈’ 외에도 다른 전시를 준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진행 중인 <아르스 포토그라피카>는 1930~50년대 작품 중심으로 우리나라가 6.25전쟁을 겪고 차츰 회복돼가는 시기를 담았다. 임 선생님의 작품이 많이 알려졌다 해도, 우리 나이나 젊은 세대들 중엔 선생님 사진을 직접 본 이들이 사실 많지 않다. 직접 보고 접하는 사진과 화면으로 보는 사진 간의 간격이 크지 않은가. 선생님의 사진을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전시를 준비하게 됐다.

임응식 작가의 카메라와 집필 서적, 매일의 기록을 빼곡히 적어둔 노트 등은 모두 3층에 전시되어 있다.

<나목(裸木)>, 1953.

개인적으로는 임응식 선생님이 우리나라 1세대 사진가인 동시에, 전시되고 있는 작품도 한국의 역사를 담은 사진이다 보니 창덕궁의 역사적인 특성과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다. 임응식 선생님에게 빠져 있을 때 이 공간을 만났고, 이 공간과 선생님의 사진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선생님이 생전에 작업하신 ‘고건축 시리즈’가 있는데, 그것을 담은 책들이 건축가 김수근 선생님의 건축잡지 <공간>과 함께 발행됐다. 현재 인근의 아라리오 갤러리가 위치한 곳이 과거 <공간>의 사무실이었다. 갤러리 뒤의 창덕궁과 비원도 임응식 선생님이 수없이 다닌 공간일 것 같아 의미가 크다. 선생님이 살아계셨으면 자신의 전시가 이곳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좋아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도 혼자 해봤다.

임응식 선생님이 생각하는 ‘아르스’는 결국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든, 추한 것이든 사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표현해야 한다”는 생활주의적 사실주의에 기반했지만, 선생님의 시선엔 피사체, 즉 한국인과 우리 민족성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는 것 같다. 2층에 전시된, 인천 답동성당을 담은 <초연 속의 성당>이 찍힌 1950년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다. 건물이 폭파된 장면을 찍은 사진인데, 그 신을 보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하면서 그때를 살던 분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정말 너무 힘든 시기를 겪었는데, 두 세대 정도 지나서 사진을 본 내가 이걸 아름답게 봐도 되나 하는 죄책감 말이다. 그것이 임응식 선생님의 눈에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사진 찍을 당시에는 그걸 느낄 시간도 없이 본능적 감각으로, 엄청 초를 다투는 시간 속에서 촬영했을 텐데 나중에 자신도 현상하면서 사진을 보고 놀랐을 것 같다. 참 예술이라는 게 묘하다. 무엇이라 하나로 단정지어서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직(求職)>, 1953.

갤러리의 내부 공간.

자연과 어우러진 예화랑 창덕궁의 모습.

사진을 보는 관람객의 나이대에 따라 느끼는 점도 다를 것 같다. 이미 현대화가 진행된 90년대에 태어난 사람으로서는 전혀 몰랐던 과거의 모습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볼 수 있어 감회가 새롭기도 하다. 연세가 드신 분들 중엔 사진을 보며 “이것이 다 나의 시대다” 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다 이렇게 살았다”고, “이게 완전 우리 시대”라고. 젊은 세대들은 이 시대를 전혀 안 살아봤고 지금의 도시 모습은 너무 달라졌지만, 불과 65년 전인 1960년의 사진도 있다. 유럽은 60여 년 전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우리나라는 이렇게 바뀐 거다. 슬프기도 하고, 과거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변해가면서도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도 있고, 변했어도 우리가 예전의 모습을 알았으면 하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사진의 역할이구나 싶었다. 변화는 어쩔 수 없겠지만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놓은 사진가가 있고, 그 기록을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임응식 선생님의 사진을 계속 전시해나갈 계획이라고 들었는데. ‘고건축 시리즈’나 ‘풍모 시리즈’도 있고, 추상적 표현을 담은 사진 등 작품 시리즈가 많다. 임응식 선생님이 인천상륙작전 때 종군기자로 활동하셨다 보니 역사적인 사진도 있었다. 손자 분과 의논하며 앞으로 하나하나 선보일 계획이다.

<초연 속의 성당>, 1950.

어느덧 예화랑의 47주년을 앞두고 있다. 2019년엔 순수예술의 대중화를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것처럼, 대중은 예화랑을 통해 지금까지 쉽게 접하지 못해본 예술을 접해왔고, 앞으로도 접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예화랑이 그려나갈 미래는 어떻게 될까? 2023년, 45주년 기념전을 준비하면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허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 과정에서 임응식 선생님도 알게 되었고, 이렇게 과거의 작업들을 돌아보면 의도치 않게 앞으로 가야 될 길을 만나게 되는 것 같다. 50주년을 기념할 때는 예화랑의 역사를 좀 더 많은 분들과 함께할 수 있게 정리해두고 싶다. 개개인의 가정부터 시작해, 저마다 다들 깊은 역사가 있다면, 내겐 예술가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결국 그 역사라고 생각한다.

INSTAGRAM @gallery_yeh ADD 서울 종로구 창덕궁길 100

CREDIT

에디터

포토그래퍼

임태준

TAGS
색으로 빚은 삶

색으로 빚은 삶

색으로 빚은 삶

강렬한 색채와 유쾌한 텍스트, 직관적이고 유쾌한 작품들. 개념이나 논리 대신 ‘미술이 곧 즐거움’이라는 철학으로 작업하는 이명미 작가의 삶은 그 자체로 예술이 된다.

이명미 작가의 대구 작업실 전경.

“나는 생각나는 대로, ‘이게 참 재미있다’ 싶으면 그림을 그려요.” 이명미 작가를 만나기 위해 대구에 있는 작업실을 방문해, 한 시간가량 두꺼운 도록들을 넘겨 보며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때는 가정에 대한 생각밖에 없어서 그림 가운데 ‘토킹 어바웃 디너 Talking About Dinner’라는 글을 써넣었고, 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빠져 있었어요.”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 있잖아요, 최백호가 부른 그 노래가 진짜 좋더라고요. 그래서 그림에 가사를 넣어 봤어요.” “여기 ‘1’이라는 숫자는 카카오톡의 ‘1’을 생각하며 쓴 거예요. 어느 날 조카가 카톡에서 ‘1’이 안 사라지면 상대방이 안 읽은 거라고 얘기해줬는데, 너무 가슴 아프게 확 꽂혀서.” 너무 평범해 때로는 존재조차 희미한 일상 속 소재들은 이명미 작가에게 작업의 영감이 된다. 가끔 경쾌한 색감의 작품 뒤엔 서정적으로 표현된, 작가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담겨 있다. “내가 위암 수술한 지 6개월 만에 딸이 시한부 6개월 판정을 받았어요. 그 후로 2년을 더 살긴 했는데, 딸 간병을 하느라 내가 환자인 줄도 모르고 살았어요. 딸 간호하고 작업실 와서 캔버스에 물감을 부어놓고, 완전히 몰입하진 못했지만 이렇게 눈물방울 같은 그림을 그렸어요.” “이거는 <내 사랑 나의 누이>. 보들레르의 시에서 나온 글이면서도, 세상을 떠난 언니 이향미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어요.” 한국의 1세대 작가 이명미가 처음 작품 활동을 시작한 1970~80년대엔 단색화라는 지배적인 사조가 있었다. 반복적인 행위와 최소한의 표현을 통해 물질의 본질과 작가의 정신성을 탐구하던 때였지만, 이명미 작가에겐 사유와 논리라는 틀보다는 직관과 감각으로 그리는 ‘놀이’로서의 미술이 더 중요했다. 강렬한 색채와 톡톡 튀는 텍스트, 단순명백하면서도 주관적인 작업들을 이어오며 어떤 미술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축을 형성해온 이유다. 도록에 수놓인 각 작품에 얽힌 사연을 들은 뒤, 이명미 작가의 작업실에 앉아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작업 중인 캔버스 뒤에서 웃어 보이는 이명미 작가.

거침 없는 붓놀림으로 여백을 채우는 이명미 작가의 손.

다채롭고 뚜렷한 색채와 그림 위에 쓰인 단어와 문장들은 작가님의 작업의 근간인 것 같습니다. 작가님에겐 이 두 요소가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1972년 당시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앙데팡당>이 열렸는데, 그때부터 한국에 백색으로서의 단색화가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학교 다닐 때부터 색채에는 쭉 관심이 있었는데, 백색만으로 작업을 하기 싫었던 거지. 꽃밭에는 여러 가지 꽃이 피어야 되는데, 백합이나 흰 꽃만 꽃 취급을 받는 것 같은 마음에 색채를 더 열심히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이전의 사실화는 주제와 등장 인물이 있었고, 잭슨 폴록은 형식적인 그림의 틀을 깨기 위해 바닥에 캔버스를 두고 물감을 흩뿌리는 작업도 했는데, 갑자기 단색화 바람이 부니까 통제를 받는 듯한 느낌도 조금 들었어요. 그래서 1977년 그로리치 화랑에서 첫 개인전 <놀이>를 할 때는 일부러 화면을 다 분할하기도 했어요. 처음부터 계획해서 그린 게 아니고 이만큼씩 분할해둔 다음에 즉흥적으로 그렸지. 어떻게 보면 어렸을 때 위인전을 너무 읽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반골 기질이 생긴 게.

작업실 한쪽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물감과 붓들.

독서 중인 이명미 작가.

작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동물과 식물, 생활용품, 숫자와 문자 등 일상적인 요소에서 작업 소재를 찾으시죠. 우리나라 민화를 보면 색부터 소재까지, 서민적인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잖아요. 또 궁궐에 있는 병풍들을 보면 오색찬란한 그림들이 있고요. 나는 양쪽을 다 그리고 싶었어요. 내 그림의 주제는 내가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계속 나올 거예요. 이 생활이라는 게, 나이 칠십이 넘어서 보니 10대 때 어느 강가에서 본 강 풍경이 훅 생각날 때도 있고, 31세에 처음 했던 경험이 올라올 때도 있고 그래요. 나이가 든다는 건 소재의 창고가 훨씬 더 넓어졌다고 생각하면 돼요. 나는 30대 때부터 그 창고에서 내 안의 경험을 뽑아 써왔어요. 나이가 들면서 더 많이 내려놓기도 하고, 삶에서 쇼크가 올 때는 그 충격의 주파수를 더 올리거나 내리는 기능을 더 발달시키기도 하고요. 그러니 내 그림은 비슷하면서도 그때그때 바뀔 수밖에 없어요.

작업실 한쪽엔 작가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CD 앨범들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다.

어쩌면 논리와 이성보다 앞서는 게 직관과 감각이고, 작가님 또한 거기에 기반해 작업하니 세대를 초월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란 생각도 드네요. 개념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샤르트르나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들을 언급하지 않으면 무지한 걸로 취급받았거든요. 데리다니 라캉이니, 이런 말을 해줘야 ‘책 좀 봤네’ 쳐줬어. 물론 두뇌 역할도 중요하지만, 우리 그림쟁이들은 그림을 재료로 표현하잖아요. 개념미술 쪽에서는 1960~70년대에 성능경 작가나 이건용 작가가 퍼포먼스를 통해 기존 미술 체계에 반하는 제스처를 보였는데, 그것이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했어요. 나도 분야와 추구하는 바는 다르지만, 그런 흐름을 품어야 된다 생각도 했고, 당시 여성 작가들은 남성 작가의 두 배 이상 노력해야 인정받는 분위기도 있었으니 그런 것에 대한 저항 정신이 생겼죠. 전 시대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을 해야 된다는. 나는 내 고유한 것들을 유지하면서 작업해도 할 게 너무 많은데, 기왕 그럴 거면 오색찬란한 걸로 다 하고 싶었어요. 한때는 그런 말도 했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하는데, 물냉면 고를 때는 비빔냉면과 갈등하다 고른다.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과 짬뽕 중 선택해야 하면 반씩 섞어달라’ 한다고. ‘내 그림도 그렇게 그리면 되겠네’ 하는 생각을 일찍부터 했어요. 다 들어갈 수 있는 그림. 내가 그리고 싶은 걸 그릴 때 그게 가장 강한 힘이 되고, 그게 가장 강한 자기만의 향수가 될 수 있어요.

작업 중인 작품들.

조은숙 아트앤라이프스타일 갤러리에서는 이명미 작가의 개인전 을 2024년 12월 28일까지 전시한다.

197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끊임 없이 개인전과 그룹전을 열며 새로운 작품을 그리고 계십니다. 지금 작업실 캔버스에도 여러 개의 작업이 진행 중인데, 바닥의 물감 자국을 보면 작가님의 치열한 창작열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는 있잖아. 눈 뜨면 제일 먼저 그림에 대한 생각들이 비몽사몽 떠올라요. 나이가 들수록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싶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어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작품도 많이 쌓이니까 이 작업실도 작게만 느껴져요. 나는 이런 방이 몇 개 더 있으면 돌아다니면서 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하나님이 나한테 제일 좋은 걸 주셨어요. 아이디어가 한 번도 궁한 적 없어. 2004년 위암으로 위 일부를 절제했거든요. 한 3~4년 전엔 안과를 생애 처음 갔더니 망막이 떨어지고 있다고, 이대로 두면 몇 년 내로 실명한다고 해서 그때 망막 붙이는 수술도 했어요. 이 화실 앞에서 미끄러져 팔이 부러져서 팔 수술도 받았는데, 사실 팔이나 위 수술보다 망막이 떨어진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가 더 충격이었어요. 실명이 되면 아무것도 못 하잖아요, 눈으로 확인해야 되는데. 앙리 마티스는 대장암으로 건강이 나빠지니 색종이를 오려서 콜라주 작업을 하기 시작했잖아요. 나는 그 자세는 돼 있어. 그래서 이제는 조수를 붙여야 되나 생각도 하고 있죠. 아이디어는 자꾸 나오는데, 내 작업 속도가 그걸 따라가지 못하니까요. 내가 해야 될 게 너무 많은 거야. 앞으로도 해야 될 게 너무 많아요.

작가님의 작업물을 보면 세상의 모난 점을 애써 모르는 척하지 않고, 그것까지 유쾌한 시선으로 포용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때로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가족이 먼저 세상 떠나는 걸 지켜봐야 했고, 인생 경험이 쌓일수록 역경도 많이 겪으셨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젊은 저보다도 따뜻하신 것 같습니다. 따뜻해. 왜냐하면 내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림을 그리면, 거기에 내 고통이라든지 아픔도 상쇄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림은 내가 숨는 장소이기도 해요. 내 가슴속에서 그 슬픔을 끄집어내고, 뚜렷이 볼 수 있게 되는 곳. 돌이켜 보면 내 부모님이 아주 맑은 사람이었고, 나하고 결혼한 애들 아빠도 아주 맑은 사람이었어. 살면서 주변에 많은 사람을 안 두는 편이기 때문에 맑은 사람만 택하고 그 사람들만 본 거 같아요. 그리고 나는 내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치유되기 바라면서도, 그걸 억지로 드러내거나 강요하고 싶진 않아요. 그러니까 그 슬픔을 배분하는 거죠. 캔버스 위에 그걸 표현하는 건 감정을 조절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자기 감정을 어느 선에서 표현하는 일종의 균형이 필요하기 때문에, 작가가 세계를 보는 세계관도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완전히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그럴 때는 이런 그림 못 그려요. 운동 선수들도 자기 몸 컨디션을 조절하듯이, 작가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컨디션을 만들어야지.

작가님 작업에 꽃이나 별, 혹은 생명력이 있는 물체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까요? 별이나 꽃은 추악한 것이 아니잖아요. 아름다운 것이고. 별은 결혼 전인 1970년대에도 그렸어요. 이 꽃이나 별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지, 무서운 건 아니잖아요. 또 작가로서 보면 리얼리즘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시점, 그 변화의 과정에서 디자인적으로 압축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세 번째 이유로는, 그리기가 쉬워요.(웃음).

회화부터 설치작품까지, 작가님의 작업에는 의자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1997년 작품 <그 곳으로 갈게>에서는 평면 캔버스 위 그림으로 나타났다면, 2013년 강정 대구현대미술제에서 선보인 의 의자는 캔버스 밖을 벗어나 거대한 조형물로 나타났죠. 이는 이후 <앉으시오>라는, 5m가량의 두 개 설치물로 디벨롭되어 대구미술관에 전시한 후 소장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조형물은 초등학교 시절 쓰던 의자를 배로 확대해서 만든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앉으라고 쓰여 있는데, 크기가 너무 커서 앉을 수 없지. 일종의 블랙 유머예요. 그런데 나중에 전시회가 끝나고 찾아가보니까 어떤 개구쟁이가 여길 올라갔더라고. 발자국이 찍혀 있었어요. 처음 전시하면서 원래는 평면으로 시작을 했다면, 이제는 전시 공간이 점점 거대해지고 확장하면서 작품도 점점 디벨롭된 거죠.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이 처음 작업한 1970년대 초기엔 드로잉으로 등장하다가 이제는 FRP 조형물로 진화한 것처럼, 제 작품 세계와 전시 공간이 확장하면서 표현 영역도 점점 넓어지고 있어요.

근 50년간 쉬지 않고 작업하셨는데, 그것보다 앞으로의 20년이 중요하다고 말하신 적 있죠. 내가 68학번이니 이 일을 한 50년 했는데, 나는 톨스토이나 푸시킨 같은, 산맥 같은 화가가 되고 싶어요. 우리가 문호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산맥 같은 글을 남긴 것처럼 설악산, 지리산 이런 거 말고 태백산맥 같은 산맥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 되려면 더 많은 걸 이뤄야 한다는 생각이 있죠. 아직까지는 이런 나를 보고 웃는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진짜 산맥을 꿈꾸려면 내가 20년을 더 열심히 해야 돼. 그냥 앞산이나 남산 이 정도로 끝나고 싶지는 않아. 일단 꿈은 커야 되잖아. 처음 그림을 시작한 젊을 때는 이런 생각을 안 했어요. 그냥 단순히 그림을 그리고 싶다에만 꽂혔다가, 육십이 넘어서부터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나는 산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대세를 따르지 않고, 개념이나 논리 대신 ‘미술이 곧 즐거움’이라는 철학 아래 감성과 직관에 의지해 작업하는 선생님의 삶 자체가 어쩌면 미술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초반엔 불교 미술 같은 다른 작업도 했지만, 1977년 첫 개인전 <놀이>를 하면서부터는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어요. 너무 확고하고 지금도 해야 될 게 너무 많아요. 나는 작가가 된 게 진짜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업실이, 캔버스가 완전히 제2의 창조 공간이잖아요. 여기서는 내가 새로운 창조를 할 수 있고, 조물주나 다름없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내가 그리는 우주를 만들 수 있어요. 내 작품들은 이명미가 만든 우주고, 내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어릴 때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이기도 해요. 이 우주에 내가 생각하는 도덕감, 선악에 대한 생각 등 모든 게 들어가는 거잖아. 내가 창조주가 돼서 할 수 있는 거고, 기쁠 때는 여기서 기쁨을 표현할 수도 있고, 슬플 때는 여기서 눈물도 말릴 수가 있는 큰 운동장이에요.

CREDIT

에디터

포토그래퍼

이현실

TA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