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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하우스와 주얼리 브랜드가 선보이는 리빙 컬렉션은 이제 제품을 넘어 하나의 세계관을 구축하듯 진화하고 있다. 가구와 오브제, 향과 텍스타일, 건축적 연출과 감각적 경험이 교차한 2026 밀란 디자인 위크. 그 현장에서 16개 패션, 뷰티, 주얼리 브랜드가 제안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장면을 소개한다.

HERMÈS

정현지 작가의 ‘H 레터’ 플래드.

에르메스의 2026 홈 컬렉션은 올해도 아티스틱 디렉터 샬롯 마코 페렐만 Charlotte Macaux Perelman이 설계한 설치 안에서 펼쳐졌다. ‘소재는 말하고, 오브제는 이야기를 전한다’는 주제 아래, 서로 다른 높이와 간격으로 배치된 흰색 구조물은 오브제의 형태와 공간 속 관계를 새롭게 드러냈다. 전체를 관통한 실마리는 언제나처럼 에르메스의 출발점인 승마 문화다. 전시 중심에는 에드워드 바버 Edward Barber와 제이 오스거비 Jay Osgerby가 디자인한 ‘스타디움 데르메스’ 테이블이 놓였다. 말의 등과 경마장의 유려한 타원형 구조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은 승마 장애물 경기의 허들바를 연상시키는 투톤 패턴 다리로 이어졌다. 홈 오브제 라인 ‘팔라디온 데르메스’는 손으로 두드려 완성한 팔라듐 마감 위에 샹킬라 고트스킨과 말총 장식을 더해, 금속의 차가운 표면과 고전 신화에서 차용한 디테일을 한데 묶었다. 선명한 색감의 ‘콘페티’ 바스켓에서는 에르메스 특유의 컬러 감각이 경쾌하게 드러났다면, 텍스타일 컬렉션에서는 네팔에서 수작업으로 직조한 캐시미어가 중심을 이루었다. 그중에서도 한국 전통 보자기 기법으로 완성한 정현지 작가의 ‘H 레터’ 플래드는 수백 시간의 작업을 거친 직물 위에 거대한 H 모티프를 새기며, 시간의 가치와 탁월함에 대한 찬가를 담아냈다.

서로 다른 높낮이의 구조물 사이 전시된 에르메스의 홈 컬렉션.
 서로 다른 높낮이의 구조물 사이 전시된 에르메스의 홈 컬렉션.
스타디움 데르메스 테이블. © Charles Negre
팔라디온 데르메스 화병. © Charles Negre

BOTTEGA VENETA

보테가 베네타의 산탄드레아 매장에서는 이광호 작가의 수공예 작품으로 수놓아진 풍경이 연출됐다. 설치 작품 <Lightful>은 공중에 매달린 직조 형태에 보테가 베네타 가죽을 엮은 뒤, 빛 조형물을 결합한 작품이다. 한 땀 한 땀 직조된 가죽은 빛이 투과하는 방식에 따라 다채로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소재와 구성의 관계를 탐구해온 작가의 작업 세계를 한층 넓혔다. 작품의 블랙과 그린 컬러는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루이스 트로터가 엄선한 색조인데, <Lightful>은 보테가 베네타와 이광호 작가가 선보인 세 번째 파트너십이라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이광호 작가는 직조와 바구니 엮기, 칠보 에나멜링 등 전통 기법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재료가 만나는 순간의 가능성을 탐구해왔다. 특히 그는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몬테벨로 비첸티노에 위치한 보테가 베네타 아틀리에에 머무르며, 장인의 가죽 공예 노하우를 직접 계승하고, 혁신과 진화의 과정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완성한 작품은 각각 고유한 형태를 지니며, 작가가 이어온 수공예적 작업 방식의 가능성을 다시 확인하게 했다.

이광호 작가의 <Lightful>이 설치된 보테가 베네타 산탄드레아 매장 전경.
이광호 작가의 <Lightful>이 설치된 보테가 베네타 산탄드레아 매장 전경.

GUCCI

 산 심플리치아노 수도원 회랑을 수놓은 태피스트리.  
 산 심플리치아노 수도원 회랑을 수놓은 태피스트리.  

구찌는 현재를 다시 쓰는 감각적 장치로서의 기억을 소환했다. 푸오리살로네 기간 열린 전시 <Gucci Memoria>는 뎀나의 큐레이션 아래 하나의 긴 서사처럼 연출되었다. 산 심플리치아노 San Simpliciano 수도원 회랑을 따라 이어지는 공간 안에는 구찌의 105년 역사가 태피스트리, 플로라 모티프에서 영감을 받은 식물적 풍경, 그리고 인터랙티브 설치로 겹겹이 놓였다. 중심에는 피렌체의 공예 전통과 맞닿은 열두 점의 태피스트리가 있었다. 런던 사보이 호텔에서 포터로 일하던 창립자 구찌오 구찌 Guccio Gucci의 젊은 시절부터 피렌체 첫 공방에서 탄생한 ‘재키 1961’과 ‘뱀부 1947’ 백의 등장, 톰 포드와 프리다 지아니니, 알레산드로 미켈레, 사바토 데 사르노를 지나 뎀나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장면은 구찌라는 브랜드가 걸어온 길을 한 폭의 신화처럼 보여줬다. 큰 회랑에는 플로라 모티프를 따라 특별히 재배된 계절 꽃들이 정원을 이뤘다면, 작은 회랑에는 구찌의 카페 겸 칵테일 바 ‘구찌 지아르디노’가 만든 캔 음료 자판기가 설치됐다. 캔에 그려진 ‘패션 아이콘’, ‘드라마 퀸’과 같은 페르소나는 구찌가 지닌 다층적 정체성을 유쾌하게 드러냈다. 과거 아카이브를 오늘날 관객의 시선에서 풀어낸 대담함은 구찌가 역사를 바라보는 가장 현재적인 방식이자, 뎀나의 시선 아래 새롭게 열리는 다음 장의 예고처럼 느껴졌다.

 산 심플리치아노 수도원 회랑을 수놓은 태피스트리.  
페어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캔 음료.
산 심플리치아노 수도원 회랑을 수놓은 태피스트리.

RALPH LAUREN

아르데코 시대의 감성을 재해석한 스털링 스퀘어 컬렉션.
아르데코 시대의 감성을 재해석한 스털링 스퀘어 컬렉션.

랄프 로렌은 패션과 홈, 그리고 호스피탈리티가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이어지는 장면을 완성했다. 밀라노 비아 델라 스피가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펼쳐진 프레젠테이션은 도시에서 시골로, 전원 저택에서 도심 펜트하우스로 이동하는 시네마틱한 여정처럼 구성됐다. 현장에서는 새들브룩과 스털링 스퀘어 컬렉션이 새롭게 공개됐다. 새들브룩 컬렉션은 오크 패널 벽면과 딥 블루 벨벳, 앰버 자카드 플로럴, 오베르진 태피스트리가 어우러진 낭만적인 에스테이트의 풍경을 그려낸다. 곡선형 디자인의 로이드 소파, 비더마이어 스타일 팔러 다이닝 테이블, 브루탈리즘과 아르데코 요소를 결합한 비콘 바 캐비닛 등은 헤리티지 가구의 비례와 장식을 오늘의 실내에 맞게 조율한 결과물이었다. 반면 스털링 스퀘어의 석고, 웅장한 기둥과 커튼, 크림과 셀라돈, 카멜 톤의 팔레트는 아르데코 시대의 감성을 오늘날 도심 펜트하우스로 옮겨놓은 듯했다. 최초로 여성 컬렉션과 남성 퍼플 라벨을 착용한 모델들이 팔라초 공간을 거닐도록 한 연출 역시 이번 프레젠테이션의 방향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입는 방식과 살아가는 방식, 머무는 방식을 하나의 장면 안에 엮어내며, 랄프 로렌은 아메리칸 라이프스타일의 서사를 가장 입체적인 방식으로 제시했다.

 전통과 현대적 실루엣의 조화가 인상적인 새들브룩 컬렉션.
이번 페어에서는 최초로 랄프 로렌 패션 컬렉션을 착용한 모델들이 팔라초 공간을 거닐기도 했다.

BYREDO

카푸치오 수도원에 설치된 장 기욤 마티요의 작품들. © Alejandro Ramirez Orozco
카푸치오 수도원에 설치된 장 기욤 마티요의 작품들. © Alejandro Ramirez Orozco

향을 공간과 목재의 영역으로 확장한 바이레도의 시도 또한 인상적이다. 프랑스 아티스트 장 기욤 마티요 Jean-Guillaume Mathiaut와 협업한 전시 <In Conversation With>는 향의 구조와 목재가 지닌 질감 사이의 관계에 주목했다. 프랑스 퐁텐블로 숲에서 자연적으로 쓰러진 오크 나무는 작가의 손을 거쳐 시간과 날씨, 사용의 흔적이 남은 조형적 오브제로 다시 태어났다. 전시는 15세기 지어진 밀라노의 카푸치오 Cappucio 수도원에서 열렸다. 공간은 숲의 구조를 연상시키는 네 개의 축을 중심으로 구성됐고, 그 안에는 바이레도를 위해 제작된 한정판 목재 조형 좌석들이 놓였다. 작품은 모두 목재로 제작한 뒤 일본 먹으로 검게 마감해, 형태와 그림자가 또렷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단색의 표면은 형태와 비례, 그림자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며 목재가 지닌 질감을 강조했다. 회랑 안에서는 관람객이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거나 잠시 머무는 방식으로 향과 오브제, 건축을 함께 경험하게 했다. 기존 건축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더한 방식 또한 이 전시의 중요한 특징이다. 바이레도는 이 협업을 통해 향이 단지 맡는 감각에 머물지 않고, 공간 안에서 기억과 물성, 관계를 불러내는 매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