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거대하고 압도적인 무대를 연출해온 에스 데블린이 서울에서 조용하고 깊은 몰입의 여정을 펼친다.

<다시 집으로>, 2026, 도색합판, 사운드, LED, 5 × 3m.

수만 명의 관객이 모인 슈퍼볼 하프타임 쇼부터 비욘세와 아델, 켄드릭 라마의 무대까지. 에스 데블린이 만들어온 장면은 언제나 거대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펼쳐 보이는 세계는 의외로 작고 조용하다. 1만여 권의 책으로 둘러싸인 방, 끝없이 이어지는 거울, 낯선 사람과 마주 앉아 얼굴을 그리는 테이블. 거대한 스펙터클을 만들어온 예술가가 이번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선을 머물게 한다. 푸투라서울 Futura Seoul에서 개막한 국내 첫 개인전 <세 번째 시: 에스 데블린, 다시 집으로>의 중심에는 ‘현존(Presence)’이 있다. 데블린이 말하는 현존은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다른 생명의 이름을 기억하며, 자신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다. 그래서 전시는 작품을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관객은 직접 공간을 거닐고, 길을 잃고, 누군가와 눈을 맞추며 비로소 전시의 일부가 된다.

 <미러 메이즈>, 2026, 거울, 사운드, LED, 가변 크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전시 초입에서 펼쳐진다. 1만여 권의 책이 빼곡한 ‘인피니트 라이브러리’에서 작가의 드로잉과 영상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미지의 문이 열린다. 그 너머에는 층고 높은 푸투라서울의 공간을 가득 채운 ‘미러 메이즈’가 모습을 드러낸다. 닫힌 방에서 거대한 공간으로 시야가 단숨에 확장되는 순간이다. 거울은 본래 나를 보기 위한 도구지만, 이곳에서는 사방으로 끝없이 반사되며 다른 관람객의 얼굴을 불러온다. 데블린은 우리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타인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여러분도 꼭 길을 잃어보기 바란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미로 속에서는 방향뿐 아니라 나와 타인의 경계마저 아득해진다. 그 시선은 인간이라는 종의 바깥으로도 확장된다. ‘다시 집으로’는 서울을 터전 삼아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을 기록한 드로잉 작업이다. 이 도시에 약 6천 종의 생명체가 공존하고 그중 인간은 단 하나의 종일 뿐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해, 작가는 도시를 인간 중심의 시선에서 벗어나 다른 생명의 궤적으로 넓혀나간다. 2백50여 점의 드로잉에는 생명체의 이름과 소리, 여러 언어로 부르는 합창이 더해져 깊은 울림을 준다. 이어지는 ‘콜렉티브 포트레이트’에서는 낯선 이와 마주 앉아 서로의 얼굴을 그리고, ’스크린쉐어’에서는 데블린이 30여 년간 그려온 스케치 중 한 장을 가져갈 수 있다. 관객의 흔적과 작가의 흔적이 교차하는 방식이다.

 <스크린쉐어>, 2024, 종이, 프로젝션 영상, 사운드, 11.6 × 3.6m (종이 협찬: 한솔제지).

무대에서 갤러리로 장소를 옮겨왔지만, 데블린이 오래도록 탐구해온 것은 결국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이다. 책 속 문장을 따라가고, 거울 속에서 낯선 얼굴을 만나고, 다른 생명의 이름을 듣고, 누군가의 얼굴을 직접 그려보는 동안 시선은 조금씩 나의 바깥으로 향한다. 전시장을 나선 뒤에도 달라지는 것은 어쩌면 작품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일지 모른다. 오늘 마주친 얼굴과 지나쳤던 생명들을 한 번 더 바라보게 되는 것. 데블린이 말하는 ‘현존’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전시는 2027년 1월 17일까지.

자료제공: 푸투라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