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의 언어

이스트의 언어

이스트의 언어

‘동쪽을 비추다’라는 자신의 이름처럼 조영동 셰프는 동아시아의 미식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비춘다.
동양의 문화와 서양의 테크닉이 교차하는 경계 위에서 쌓여가는 이스트만의 언어.

시그니처 메뉴인 갈비 스톤. 도넛 형태의 디시 안에는 잘게 찢은 갈비가 블루치즈와 곁들여졌다.

칼 같이 정렬된 테이블 세팅을 자랑하는 이스트 매장 전경.

이스트의 조영동 셰프.

세계 미식 시장에서 가장 권위 있는 지표로 꼽히는 미쉐린 스타를 받는 것은 모든 셰프의 꿈이겠지만, 이스트의 조영동 셰프에겐 특히 더 그랬다. 지난해 2월 미쉐린 가이드에 처음으로 레스토랑의 이름을 등재하며 목표에 가까워지던 그가 결국 올해 초 드디어 첫 스타를 거머쥐었다. 2022년 11월 처음 레스토랑을 오픈하고서 약 2년 만에 이룬 성과지만, 조영동 셰프에겐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외식업계가 어려운 시기에 문을 연 만큼 불안정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 ‘미쉐린 가이드 서울 & 부산 2025’이 발표되던 날, 이스트의 이름이 호명되던 순간은 아직도 그에게 생생하다.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예약 알림이 계속 떴어요. 하루에 서너 건 정도 들어오던 예약이 3일 만에 한 달치가 차버렸죠.” 함께 고생해 팀원들과 나누는 기쁨은 남달랐다. 조영동 셰프에게 미쉐린 스타는 단순한 훈장이 아니었다. 요리를 시작할 때부터 품어온 목표이자, 동료들에게 ‘함께 해낼 수 있다’는 자긍심을 안겨주고 싶던 상징이었다.

조영동 셰프가 요리를 처음 시작한 것은 23세. 컴퓨터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무렵, 요리의 재미를 깨달았다. 전공을 호텔조리학과로 바꾸고, 졸업 후 호주의 모모푸쿠 세이보와 덴마크의 108에서 셰프 경력을 쌓았다. 호주 레스토랑에서 유일한 동양인으로, 덴마크 키친에서 유럽 셰프들과 함께하며 느낀 문화적 거리감은 오히려 그에게 무기가 되었다. 동아시아 음식 문화 전반을 아우르되, 특정 국가에 고정되지 않은 자신만의 ‘동양적 현대성’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퓨전이라기보다는 재료의 전통성과 조리법의 현대성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서양 테크닉에 동양 문화를 얹으면, 저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킬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이스트는 ‘동아시아의 현대적 표현’이라는 뚜렷한 방향을 갖게 되었다.

가브리살, 알등심, 새우살을 하나로 결합한 것이 특징인 제주 흑돼지 요리.

영덕 대게로 속을 채운 두부 요리는 캐비아와 아귀 간이 함께 곁들여진다.

분주하게 작업하고 있는 조영동 셰프와 이스트의 스태프들.

메뉴에는 하나의 국적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구성과 철학이 담겨 있다. 시그니처 메뉴인 ‘갈비 스톤’은 가장 한식스러운 메뉴인데, 저온 조리한 갈비에 블루치즈의 쿰쿰한 맛이 조화를 이루는 도넛이다. 차완무시 요리는 일본식 달걀찜을 바탕으로 대만의 우롱차와 닭, 생강으로 만든 소스를 더해 풍미를 살렸다. 그 위의 전복은 다시마와 중국 소흥주로 찌는 방식으로 향을 입혔고, 구기자 열매와 파래 무침을 올렸다. 메인 디시는 제주 흑돼지의 세 부위인 가브리살, 알등심, 새우살을 하나로 결합해낸 요리다. 특이점이 있다면 유럽산 이베리코 대신 한국산 흑돼지로 요리를 선보였다는 점이다. 또 다른 메뉴인 두부 요리 또한 경남 진주의 백태콩을 이용해 만들었다. 한국에서 요리하는 만큼, 한국의 재료로 맛을 내고 싶다는 소신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 메뉴 구성에는 일관된 기준이 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요리를 하고 싶어요.” 상하이의 마장면, 화자오 향이 가미된 대만의 수프 등 여행지에서 받은 인상이 재료의 조합과 조리법으로 이어진다. 조영동 셰프의 레시피는 언제나 현실과 경험에서 출발하고, 여행을 포함한 모든 일상에서 영감을 받는다. 이스트의 와인 페어링 역시 독특하다. 소믈리에인 박건우 매니저는 요리사 출신으로서, 그의 페어링은 음식 조리 과정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갖는다. “음식에 어떻게 간을 하고, 어떤 양념을 쓰는지를 아는 만큼 페어링할 때도 그 맛의 흐름과 균형을 섬세하게 읽어낼 수 있어요. 그 미세한 차이가 분명히 있죠.”

미쉐린 스타라는 꿈을 이룬 그의 다음 목표가 궁금해졌다. “외국 미식가들이 서울에 오면 꼭 들르고 싶은 레스토랑이 되었으면 해요.” 쉬는 날에도 다른 국가의 레스토랑 리뷰를 찾아보거나 새로운 경험을 위한 연구를 멈추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쉴 때도 결국 이스트 생각만 해요. 그런데 그게 가장 재미있어요.” ‘이스트 Y’east’라는 이름은 ‘동쪽을 비추다’는 뜻을 지닌 셰프 자신의 이름, ‘영동 暎東’에서 비롯되었다. 낯선 재료와 조리법 사이를 오가며 동아시아라는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자신만의 미식을 완성해가는 조영동 셰프. 정해진 문법이나 경계 없이, 오직 자신만의 미식 언어로 쌓아올린 이스트는 조영동 셰프가 직접 보고 살아온 동양을 동시대 언어로 재구성한 하나의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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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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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깃든 식탁

예술이 깃든 식탁

예술이 깃든 식탁

하우저 앤 워스가 선보이는 소호의 레스토랑, 마누엘라.

© Dave Watts

미카 로텐버그의 조명 설치, 메리 하일만의 세라믹 테이블, 조지 콘도와 니콜라스 파티 등의 회화가 어우러진 식당 내부. © Dave Watts

뉴욕, 뉴잉글랜드산 주류와 제철 재료로 완성한 마누엘라의 칵테일. © Dave Watts

로컬 생산자와의 긴밀한 협업으로 만들어진 요리는 재료 본연의 풍미에 집중한다. © Kristin Teig

뉴욕 소호의 골목길 사이에 들어선 마누엘라 Manuela는 테이블과 의자, 벽과 조명이 하나하나 세심하게 연출된 공간이다. 이토록 섬세한 미감이 놀랍지 않은 것은, 이곳이 세계적인 갤러리 하우저 앤 워스의 공동대표 이완과 마누엘라 워스 Iwan & Manuela Wirth 부부가 설립한 외식 & 라이프스타일 그룹 아트팜 Artfarm이 선보이는 레스토랑이기 때문이다. 영국 서머셋의 농장에서 시작된 ‘예술과 삶은 분리될 수 없다’는 이들의 철학은 스페인과 미국 LA를 거쳐, 삶의 속도가 가장 빠른 도시인 뉴욕에 다시 한 번 뿌리내렸다.

공간은 하우저 앤 워스와 인연을 맺어온 세계적인 작가들이 18개월에 걸쳐 함께 완성했다. 홀 중앙에는 미카 로텐버그 Mika Rottenberg의 조명 설치 작업이 자리한다. 뉴욕 거리에서 수거한 플라스틱 폐기물과 숲에서 수확한 덩굴식물을 엮어 만든 구조물 사이사이에, 버섯 모양의 조명이 낮게 매달려 은은한 빛을 드리운다. 이어 메리 하일만의 다채로운 세라믹 테이블, 프라이빗 다이닝룸을 장식하는 라시드 존슨의 붉은 러그와 모자이크 테이블 역시 모두 이 레스토랑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커미션 작업이다. 이 외에도 리타 아커만과 로나 심슨의 벽화가 공간 곳곳을 채우고, 루이즈 부르주아의 브론즈 거미 조각을 비롯해 조지 콘도, 필립 거스턴, 니콜라스 파티 등의 회화 및 드로잉이 벽을 따라 전시된다.

음식 역시 직관적이면서도 섬세하다. 마누엘라는 지역의 농장, 어업인들과 협력해 재료를 조달하며, 전체 메뉴의 절반 이상이 채식 기반으로 구성된다. 구운 순무에 향긋한 치미추리를 곁들인 요리, 수마크와 매콤한 고추로 향을 낸 아귀 구이 등 제철 식재료를 활용해 담백하지만 깊이 있는 맛이 중심을 이룬다. 지속 가능성을 핵심 가치로 삼은 마누엘라는 맨해튼에서 유일하게 자체 퇴비기를 갖춘 레스토랑이기도 하다. 매일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는 이곳에서 자연 분해되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퇴비는 다시 도시의 토양을 살리는 데 쓰인다. 화려한인테리어 뒤에 숨겨진 마누엘라의 운영 철학은 의외로 단순하다. 예술과 일상, 공동체와 도시,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서로 이어져 있다는 믿음. 마누엘라는 예술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그 믿음을 공간, 그리고 식탁 위로 구현해낸다.
ADD 130 Prince St, New York, NY 10012 WEB manuela-ny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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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tic Ess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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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한 결 속에 숨겨진 뜨거운 진심. 멕시칸 퀴진의 낯선 아름다움을 단단한 언어로 빚어내는 진우범 셰프.

옥수수 반죽의 꾸덕한 느낌을 살린 관자 소페. 북해도 관자를 큐어링한 후 사과나무로 훈연해 올렸다.

아즈텍 분위기를 풍기는 에스콘디도 매장 전경.

에스콘디도의 진우범 셰프.

지난 2월,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25 리스트에 ‘에스콘디도’의 이름이 새롭게 등재됐다. 아시아 최초로 멕시칸 레스토랑이 미쉐린 스타를 받은 순간이었다. “막연히 꿈꾸던 일이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냥 내 음식을 하자’는 마음으로 일해왔는데, 그동안의 노력을 인정받는 것 같아 정말 감사했죠.” 진우범 셰프의 에스콘디도는 한국에서는 생소한 멕시칸 파인다이닝을 선보이는 레스토랑이다. ‘멕시칸 퀴진의 확장’을 모토 삼아 메뉴를 개발하고, 레스토랑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거듭해오던 중 들려온 반가온 소식은 에스콘디도의 음식 철학을 계속해서 전개해갈 동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미쉐린 스타를 받은 후 멕시코 음식의 미식적 가치를 더욱 풀어내기 위해 메뉴를 개편하기도 했다. 셰프 입장에서는 두려움이 따르는 시도였지만, 현지 음식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손님들이 좋아할 것으로 예상되는 자신 있는 음식이 있는가 하면,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음식도 있어요. 멕시코 음식은 절대 타코만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손님들이 지금 당장은 우리 맛을 이해해주지 못할 수 있지만, 이를 설득하는 것 또한 우리 몫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이라 해도 결국 손님들이 공감해주셔야 우리 음식에 가치가 생긴다고 믿거든요.” 그렇게 코스의 피날레를 장식하던 몰레 요리는 이제 코스 중반부부터 시작해, 세 가지 버전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몰레는 과일, 고추, 향신료 등 30여 가지 재료를 사용해 만드는 멕시코 전통 소스로서, 재료 하나하나의 특징을 섬세하게 살리는 통상적인 다이닝 메뉴와는 거리가 있다. 옥돔, 한우, 닭고기 등 제철에 따라 몰레에 곁들이는 재료가 달라지지만, 프로틴은 일종의 가니시 역할만 할 뿐 메인은 소스 그 자체다. 멕시코 요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이들에겐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요리인 만큼, 코스에서 몰레의 개수를 늘린 것은 과감한 도전이었다. “음식을 말할 때 문화적인 해석도 필요해요. 우리가 멕시코 음식에서 생각하는 중요한 요소와 철학을 한국에 풀어내기 위해서는 몰레의 비중을 늘리는 게 옳다고 판단했어요.”

도미 알파스톨 타코. 멕시코 열매 아치오때의 산미를 살린 소스를 숙성시킨 도미에 발라 숯에 구웠다.

매장 한쪽엔 대기하는 손님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가장 멕시코다운 음식’ 몰레 네그로에는 멕시코 칠리와 향신료, 초콜릿 등을 포함한 30가지 이상의 재료가 사용된다.

에스콘디도에서는 여러 종류의 옥수수를 직접 갈고,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토르티야를 굽는 ‘프레시 토르티야’를 고집한다.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지만 맛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옥수수라는 생각으로 꾸준히 지키고 있는 방침이다. 멕시코 음식의 기본 요소가 옥수수라면, 맛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러스틱함이다. “파인한 음식이든 스트릿 타코이든 그 특유의 투박함과 러스틱함, 날것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해요. 미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퀴진은 분명 존재하지만, 멕시코 음식에서 추구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에요. 멕시코 음식에서 전통적으로 해오던 방식, 투박하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맛과 미가 있어요. 에스콘디도 매장을 아즈텍스러운 분위기로 꾸민 것도 이 때문이에요.” 어둡고 투박한 분위기를 내는 매장의 테이블은 카운터 다이닝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멕시칸 퀴진을 낯설어하는 손님들이 음식의 가치를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메뉴마다 설명을 곁들이기 위해서다.

멕시칸 음식을 논할 때 데킬라도 빠질 수 없다. “데킬라나 메즈칼 모두 아가베 스피리츠인데, 증류주 중 원재료에 이처럼 시간을 많이 들이는 증류주는 없습니다. 발효주도 마찬가지고요. 아가베는 종류에 따라 자라는 데 20년 가까이 걸리기도 해요. 가장 오랜 시간 땅에서 자라는 원물인 거죠. 데킬라는 독하기만 한 술이라는 편견이 있는데, 원물 그 자체만 보면 가장 뛰어난 술이에요. 아가베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맛과 향, 그리고 그 증류 과정에 따라 스펙트럼이 여러 갈래로 나뉘고, 이것이 음식하고 페어링되면 아주 좋은 시너지가 납니다.”

진우범 셰프는 에스콘디도 외에 멕시칸 레스토랑 두 곳을 더 운영하고 있다. 성수동의 엘몰리노는 멕시코 음식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곳이고, 신당동 중앙시장에 위치한 라까예는 현지 스트릿 타코를 구현한 매장이다. 6월 초에는 해산물을 메인으로 한 레스토랑 페스카데리아 데 라까예의 오픈을 앞두고 있다. 멕시코 음식에 대한 장벽을 낮추는 동시에 좀 더 폭넓은 선택지를 제공하고, ‘멕시칸 퀴진의 확장’이라는 모토를 몸소 실현해가는 중인 셈이다. “이 과정이 즐겁기만 한 건 아니지만, 꼭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었어요. 이젠 나만의 니즈와 성취를 위해 무언가 하는 단계는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성취를 이뤄온 팀원들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우리의 방향성을 정하고 계속해서 성장하고 싶어요.” 미쉐린 1스타부터 새로운 매장까지, 2025년 상반기가 채 지나기도 전에 많은 것을 일궈냈음에도 여전히 출발선에 서 있는 마음으로 성장을 갈망하는 진우범 셰프다.

프라이빗한 식사를 위한 별도의 공간.

‘멕시코식 세비체’라고 불리는 아구아 칠레에는 할라피뇨를 첨가해 매콤한 변주를 준 것이 특징.

다양한 종류의 데킬라가 진열되어 있는 에스콘디도.

매장에서 직접 만드는 에스콘디도의 옥수수 토르티야는 재료마다 다른 맛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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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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