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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유리에 담긴 재와 그을음으로 사물의 사라짐과 변화를 기록하는 박지민 작가.

높은 온도의 유리판 사이에 일상 사물을 넣어 태우는과정에서 생기는 재와 그을음을 볼 수 있는 <바니타스 시리즈 Vanitas Series>.

유리 물성 자체를 탐구하며 독특한 텍스처와 형태를 선보이는 박지민 작가.

박지민 작가는 유리 공예 작업에서 재와 그을음을 활용하여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낸다. 수집한 사물들을 700~1200℃의 유리 사이에 넣어 그을음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이 작업은 단순히 재료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고온에 의해 사물이 타고 남은 흔적을 유리에 고정시킨다. 투명한 유리판 사이에 담긴 사물들은 타면서 재로 변하고, 그 흔적은 유리 안에 남아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저만의 방식으로 앨범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어릴 적에 가족 여행을 다녀오면 엄마가 앨범에 단풍잎을 넣고, 날짜와 추억을 기록하시던 모습이 기억나요. 투명한 유리판 사이에 코팅하듯 담긴 사물은 높은 온도에 재가 되어요. 재는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기 마련인데, 유리 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 점이 재미있기도 해요.” 길 위의 낙엽이나 신문지, 영수증 같은 일상사물은 물론 재개발이나 벌목 장소에서 수집한 버려진 사물을 작업에 활용하며,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을 담아내는 데 주목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레지던시 결과보고전에 선보인 <별 01-65>. 폐유리를 선별해 다양한 색감과 텍스처를 구현했다.

© 곽동기

이 과정에서 사용된 사물은 재료와 온도에 따라 형태와 색이 변하며, 원래 모습을 잃고 추상화되는 점이 작가에게 흥미롭게 다가온다. 유리 작업은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던 학부 시절, 투명한 재료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 작가는 유리의 물성에 대한 탐구를 중심으로 다양한 실험을 진행했고, 이를 통해 평면 작업부터 입체적인 오브제, 대규모 설치 작업까지 폭넓은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인공적인 색을 사용하지 않고 우연성에 기반한 작업을 통해 매번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며 유리라는 재료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특히 올해 초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창작스튜디오에서 시작한 작업은 유리 물성 자체에 대한 심도 깊은 탐구를 보여준다. “다른 재료는 파손이 되었을 때 똑같이 돌이킬 수 없지만, 유리는 물성상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아도 뜨겁게 녹이면 다시 붙어요. 버려진 유리들을 보며 ‘폐유리의 기준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재처럼 유리를 작게 분쇄해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보기 시작했어요.

뉴욕 어반 글라스 Urban Glass에서 지난 7월부터 9월까지 연 개인전 에서 선보인 유리 달항아리.

버려진 유리에 대한 고민을 담은 <폐유리 관찰기>.

작가는 폐유리를 재처럼 분쇄해 다시 덩어리로 만들고, 이를 통해 유리의 순환 과정을 표현한다. 유리가 깨지고 가루가 된 상태에서 다시 합쳐져 새로운 형태로 태어나는 모습을 우주의 별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에 비유하며, 이 순환의 개념을 작품에 반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실용적인 기능을 담은 공예 작업을 처음으로 시도하고 있으며, 이를 뉴욕과 서울에서 전시하고 있다. 뉴욕에서는 전통적인 청호백자를 재해석한 유리 달항아리 작품을 선보인다. 전통 항아리 표면에 그려진 소나무, 매화, 포도를 유리에 넣고, 이때 타면서 변형된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만든다. “우연성을 기반으로 하다 보니, 같은 작업을 하더라도 의도하지 않은 새로운 발견을 하게 돼요. 겉보기엔 비슷해 보일지라도 매번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내며 유리에 대해 알아가고 있어요.” 작가는 유리 작업을 통해 실용성과 공예적 아름다움을 담아내며, 유리 재료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