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에 따라 식기의 형태가 완성될 수도, 식기에 따라 음식의 담음새가 달라질 수도 있다면 음식과 디자인은 밀접한 사이임이 분명하다.
↑ 프랑스 리모쥬 지방에서 출발하여 세계적인 테이블웨어 브랜드로 입지를 다진 베르나르도는 다양한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식기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베르나르도 150주년을 기념하며 2013년 발표한 시리즈 중 셰프 장 앵베르의 음식을 올린 모습.
수많은 공상 과학 영화 속 장면이 현실로 재현되었건만 한 가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알약으로 식사를 대신하는 모습이다. ‘잘 먹고 잘 살자’는 말처럼 잘 먹는 것이 곧 잘 사는 것이기 때문일까. 푸짐하고 맛있는 음식에 대한 욕구는 작은 알약에 갇히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폭발하고 있다. 이에 힘입어 디자인 분야 역시 식문화에 주목하고 다양한 식기류를 선보이고 있는데, 지난 1월에 열린 메종&오브제에서 공개된 신작 중 눈길을 끌었던 3가지 식기 디자인을 소개한다.
↑ 베르나르도와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행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의 협업.
첫 번째는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행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Marina Abramovic의 접시 세트다. 프랑스 도자기 브랜드 베르나르도 Bernardaud와 함께 협업한 이 접시 세트는 ‘왜 우리가 테이블웨어를 통일감 있게 갖추어 사용해야 하는가?’에 관한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접시 세트는 색상에 따라 ‘미스핏 디너 포 투 Misfit Dinner for Two’, ‘론리 디너 포 원 Lonely Dinner for One’의 2 가지 세트로 구성되었으며 별과 달의 형상 등 각기 어울리지 않는 접시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식사를 하나의 사적이고 조용한 의식으로 해석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접시에 담아냈는데, 유럽의 작은 나라 몬테네그로 Montenegro에 기반을 둔 그녀의 가문을 대표하는 문양과 2009년에 선보인 작품 ‘골드 립 Gold lips’에서 차용한 황금 입술을 흰색 원형 접시에 프린트했다. 마리나는 이 접시 세트를 통해 ‘인생은 완벽하지 않다’는 메시지와 함께 ‘만일 이 순간 당신이 혼자 있음을 느끼고 있다면 자기 몸과 마음의 존재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라는 삶의 긍정적인 시선을 전한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 한 식탁 위에서 다채롭게 펼쳐지는 것처럼 여러 사람들과의 식사 자리를 통해 새로운 만남과 흥미로운 이야기를 생성해낼 수 있음을 표현한 마리나의 식기 세트는 현대적인 식문화를 철학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 컵을 수납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온 멕시코 출신의 아티스트 릴리아나 오발의 ‘토템’. 보관과 수납에서도 아름다운 질서를 부여했다.
다음으로 소개할 제품은 런던에서 활동하는 멕시코 디자이너 릴리아나 오발레 Liliana Ovalle의 ‘토템 Totem’이다. 컵을 효율적으로 쌓아 보관하는 방법은 과거부터 꾸준히 이어져왔는데 릴리아나는 이를 활용해 주방에 작은 건축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식기를 디자인했다. 기하학적 패턴을 금속 도료로 입힌 ‘토템’은 스몰, 미디엄, 라지 3가지 크기에 2가지 색상으로 구성해 취향에 맞게 다양한 패턴과 높이로 쌓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는 음식을 담는 기능 외에도 보관할 때의 디자인 또한 고려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 1 베네통 그룹의 디자인 리서치 기관 패브리카와 디자인 브랜드 아티피코가 함께한 ‘테이블 A’. 2 이탈리아 트레비조에 위치한 패브리카의 외관.
젊은 디자이너들이 주축을 이루는 이탈리아 리서치, 디자인 센터 ‘패브리카 Fabrica’는 이탈리아 디자인 브랜드 ‘아티피코 Atipico’와 함께 식기 세트 ‘테이블 A’를 발표했다. 중국, 이집트, 영국, 핀란드, 프랑스, 독일, 인도, 이탈리아, 일본, 모로코, 스코틀랜드의 11개국의 전통 음식 문화를 한데 모았는데 컵은 일본 전통 찻잔의 모양에서 모티프를 얻었으며 세라믹 재질의 볼, 접시 등은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인도의 전통 반주 문화를 기반으로 재구성하는 등 다양한 문화를 뒤섞어 하나의 시리즈로 디자인했다. 음식과 관련된 색상, 패턴, 냄새, 소리, 맛, 질감 등 사람의 감각을 적극적으로 반영했으며 또 나무, 세라믹, 금속, 패브릭 등 다양한 재질을 통해 각 지역의 라이프스타일 패턴을 표현했다. 테이블 A는 다문화 사회로 변하면서 점차 뒤섞이고 있는 현대의 새로운 문화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최근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오가니시모 디 포르마지오네 Organismo di Formazione’ 상을 받기도 한 패브리카. 장학금, 인턴십 제도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젊은 디자이너를 지원하며 매번 창의적인 디자인을 제안하는 패브리카의 총괄 디렉터 샘 바론 Sam Baron과의 만남을 통해 음식과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INTERVIEW
독자들에게 패브리카를 소개해달라. 패브리카는 1994년 이탈리아의 트레비조 Treviso 지역에 설립된 리서치 디자인 센터로 베네통 그룹에 소속되어 있다. 우리는 세계 각국의 젊은 학생들에게 1년간 패브리카에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으며 분야로는 디자인,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사진, 인터랙션, 영상, 음악, 저널리즘이 있다.
다양한 나라의 음식 문화를 어떻게 하나의 프로젝트로 풀어냈나? 테이블 A에는 각국의 문화와 관습, 전통이 녹아 있다. 현대적인 식기는 다민족의 생활을 아우르는 추세로 특히 저녁 식사는 만남과 대화, 상호관계가 자유롭게 일어나는 문화의 장이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삶 속에 분명한 형상을 드러내고 있는 세계 각국의 음식 문화를 새로운 디자인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평소에도 음식에 대한 관심이 많았나? 나는 집에서 요리하는 것을 매우 즐긴다. 포르투갈 출신의 부인과 함께 저녁을 준비하는 것이 내 일상에서 큰 행복이다. 우리는 자주 ‘페우일띠 두 바카라우 Feuillete de Bacalao’라는 프랑스 요리를 만들어 먹는데 포르투갈의 대표 생선인 대구를 추가해 우리만의 퓨전 방식으로 요리한다. 여러 나라의 문화는 다른 듯하지만 분명한 공통점이 있고 음식의 경우 그 경계를 오가는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음식과 디자인의 만남이 잦아지고 있다. 음식이 디자인과 연결되었을 때 그 효과는 무엇인가? 음식은 먼저 패키지 분야에서 많은 혁신적인 변화를 보여줬다. 그 예로 영국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가 오래된 홈메이드 레시피에서 영감을 받아 손 글씨 라벨로 패키지 시리즈를 출시한 것과 디자이너 마르티 귀세 Marti Guixe가 알레시 Alessi와의 협업을 통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보인 것 등이 있다. 디자인이 음식 문화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는 앞으로도 많이 생겨날 것이다.
당신은 디렉터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디렉터로서 프로젝트에 참여할 때와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 할 때 디자인에 접근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가? 패브리카에서 나는 철저하게 ‘팀은 꿈의 작업을 만든다’라는 모토 아래 디자인을 진행한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비전과 해결 방안에 관한 아이디어와 가능성, 삶의 경험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나만의 이야기에 집중해서 풀어나가는데 둘 다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수년간 패브리카의 총 디렉터로 젊은 디자이너들을 이끄는 이유와 당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궁금하다. 패브리카에 소속된 젊은 디자이너들은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거친다. 각자 개성을 살려 실력을 탄탄하게 다질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려는 것이다. 나는 2006년부터 패브리카와 함께하면서 재능 있는 젊은 디자이너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이 독립해서 인정받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같은 디자이너로서 나 역시 자극을 받는다.
글 김진식(가구디자이너) | 에디터 최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