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농부의 디딤돌

도시 농부의 디딤돌

도시 농부의 디딤돌

따사로운 봄볕에 나른해지는 토요일 오전, 시티 파머의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다.

따사로운 봄볕에 나른해지는 토요일 오전, 시티 파머의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다. 한 달간 시티 파머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다시 만난 독자들은 마이 알레 3층 커뮤니티 라운지에 모여 각자의 플랜트 다이어리를 공개했다. 지난 시간에 만들었던 화분에 심은 채소들이 자라는 모습을 틈틈이 사진으로 찍어두었다가 차례대로 발표하고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진 것.

마당에서 상추를 튼튼하게 잘 키우고 있는 독자, 씨를 너무 깊게 심어 싹이 나오지 않아 흙을 엎고 소금 뿌리듯 다시 씨를 심어 이제 싹이 나기 시작했다는 독자, 잘 자란 상추를 이미 솎아서 샐러드를 해 먹은 독자, 밥그릇으로 물을 줘 싹을 다 쓰러뜨린 독자 등 사연도 제각각인 시티 파머들의 경험담은 서로를 더욱 결속시키고 친밀감을 높여주었다. 이어서 마이 알레의 우경미 대표와 우현미 소장은 이들의 멘토답게 친절한 조언을 잊지 않았다. 우경미 대표로부터 ‘참 잘했어요’라는 특급 칭찬을 받은 한정아 독자의 플랜트 다이어리는 시티 파머의 모범 케이스였다.

왼쪽 위 한 달간 키운 채소 사진을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왼쪽 아래 독자가 직접 가져온 사진을 구경 중이다.
오른쪽 베란다에서 2년간 키웠다는 위스킨 라일락나무 화분.

한 달간의 경험을 공유하고 우경미 대표의 조언을 들은 시티 파머들은 이날, 마이 알레의 정원으로 내려와 상추 모종을 직접 밭에 심어보기로 했다. 4월은 상추, 치커리, 토마토, 고추 등 다양한 모종을 구할 수 있는 시기. 모종을 구입할 때는 키가 작고 짙은 녹색을 띠는 것이 좋다. 또한 고무 포트에서 꺼냈을 때 흙이 조금 말라 있어서 뿌리와 흙이 뭉쳐 있는 것이 좋다. 모종을 심기 전 수분 유지, 잡초 억제, 오염 방지 등의 효과가 있는 검은색 비닐로 멀칭을 했다.

그다음 호미 등으로 비닐에 구멍을 낸 후 흙을 파내고 모종을 심었다. 이때 나중에 크게 자랄 것을 생각해 적당한 간격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 상추의 경우 25~30cm 정도의 간격이면 적당한데 크게 자라는 채소라면 모종보다 5배 정도 커질 수도 있다. 모종을 심은 후 흙을 지긋이 눌러준 후 물조리개를 이용해 물을 줬다. 모종 심기 체험이 다 끝난 다음 독자들은 다 함께 마이 알레에서 미리 심어놓은 당근, 토마토 등의 싹도 구경하고 민트, 레몬밤, 레몬 버베나 등 겨울을 난 허브, 앵두꽃 등을 구경하며 봄의 정원을 만끽했다. 다음 달에는 더욱 쑥쑥 자란 채소 소식을 가지고 만나자고 서로 약속하며 클래스를 마무리했다.

왼쪽 위 상추 모종을 살펴보는 우경미 대표와 독자들.
왼쪽 아래 멀칭 후 모종을 심는 독자들.
오른쪽 모종을 심은 후 흙을 지긋이 눌러주고 있다.

한정아 독자의 플랜트 다이어리

1 동향의 베란다에 화분을 놓고, 6줄의 홈을 만들어 상추, 케일, 치커리 씨를 각 두 줄씩 뿌려 심었다.
2 흙을 덮고 물을 흠뻑 준 후 아들 지환이가 직접 만든 푯말을 세웠다. 분무기로 물을 꾸준히 줬더니 4일 만에 싹이 났다.
3 일주일 후의 모습. 상추 싹이 제일 먼저 나왔고, 일주일 만에 2cm 정도 자랐다. 나보다 아이가 더 지극 정성으로 매일 물도 주고,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까지 불러주며 세심하게 돌봤다.
4 2주 후의 모습. 햇빛 쪽으로 채소가 기울어 화분을 반대로 놓았다. 상추가 수북하게 자랐고, 치커리와 케일도 잘 자라고 있다. 상추는 한번 솎아내서 닭 가슴살을 넣어 샐러드를 해 먹었는데 상추의 어린잎이 야들야들해서 너무 맛있었다. 수확하는 즐거움이 쏠쏠했다.

에디터 이하나 | 포토그래퍼 박상국
출처 〈MAISON〉 201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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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의 맛

남국의 맛

남국의 맛

뜨거운 태양 아래 강렬한 향신료 열매가 익어가는 동남아 지역. 더위에 지친 미각을 깨우는 새콤달콤한 맛이 특징인 동남아 요리 중 일곱 가지를 엄선, 식탁 위로 불러냈다.

열대과일 망고의 새콤달콤한 맛이 입맛을 돋우는 샐러드.

바삭거리는 소프트 셸크랩과 싱싱한 해산물, 강렬한 커리 향이 이뤄내는 환상의 하모니

고슬고슬한 볶음밥과 향신료를 가미한 스테이크를 함께 즐기는 이색적인 남국의 맛

동남아식 해산물 링귀니
링귀니 160g, 한치 7마리, 딱새우 7마리, 바지락 200g, 그린빈스 50g, 레몬그라스 1줄기, 레몬 1개, 마늘 2쪽, 화이트 와인 1/4컵, 피시 소스 · 후춧가루 조금씩, 카놀라오일 · 고수 · 스리라차 칠리소스 적당량씩

1 링귀니는 소금물에 삶아서 건진 다음 찬물에 헹군다. 삶은 물에 그린빈스를 데친다.
2 레몬그라스와 마늘은 얇게 슬라이스한다.
3 팬에 카놀라오일을 넉넉하게 두르고 마늘과 레몬그라스를 향이 나도록 볶다가 한치, 딱새우, 바지락을 넣는다.
4 해물이 어느 정도 익으면 화이트 와인을 두르고, 알코올이 날아가면 뚜껑을 덮어 바지락이 입을 벌릴 때까지 끓인다.
5 바지락이 입을 벌리면 링귀니를 넣고 섞는다. 피시 소스와 후춧가루로 간한다.
6 레몬은 즙을 내 먹기 직전 링귀니 위에 뿌린다. 취향에 따라 고수나 스리라차 칠리소스를 곁들인다.

베트남 셰이킹 비프
쇠고기 등심 400g, 아스파라거스 6대, 크레송 50g, 페페론치노 5개, 다진 마늘 · 설탕 1/2작은술, 올리브오일 1/2큰술, 레드 와인 1/4컵, 간장 2큰술, 피시 소스 1작은술, 올리고당 · 버터 1큰술씩, 후춧가루 조금

1 쇠고기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 설탕, 올리브오일, 후춧가루, 다진 마늘을 넣어 20~30분 정도 재운다.
2 아스파라거스는 가시를 제거해서 끓는 소금물에 아삭하게 데친다.
3 크레송은 씻어 물기를 뺀다.
4 뚜껑이 있는 움푹한 팬을 뜨겁게 달궈 1의 쇠고기를 앞뒤로 각각 1분씩 익힌다. 뚜껑을 덮고 20~30초 정도 흔든 다음 꺼낸다.
5 고기를 꺼낸 팬에 레드 와인을 넣어 끓이다가 간장, 피시 소스, 올리고당을 넣어 한번 더 끓인다. 불을 약하게 줄인 다음 버터를 넣어 팬을 살살 흔들면서 녹여 소스를 완성한다.
6 접시에 아스파라거스와 쇠고기를 담고 소스를 뿌린다. 크레송으로 장식한다.

옐로 커리 라이스 누들 수프
닭 안심 4조각, 쌀국수 50g, 청경채 3포기, 단호박 1/4개, 홍고추 · 셜롯 1개씩, 레몬그라스 1줄기, 옐로 커리 페이스트 2큰술, 강황가루 1/2작은술, 치킨 브로스 1컵, 코코넛 밀크 2컵

1 단호박은 껍질을 벗기고 큐브 모양으로 썬다. 닭 안심은 한입 크기로 자른다.
2 쌀국수는 찬물에 불린다.
3 셜롯과 홍고추,레몬 그라스는 슬라이스하고 청경채는 반으로 자른다.
4 달군 팬에 오일을 두르고 셜롯, 홍고추, 레몬그라스를 볶다가 코코넛 밀크, 치킨 브로스를 넣고 옐로 커리 페이스트와 강황 가루를 푼다.
5 단호박을 넣어 끓이다가 닭고기가 익으면 청경채를 넣는다.
6 그릇에 불린 쌀국수를 담고 뜨거운 수프를 끼얹는다.

소프트 셸크랩튀김
소프트 셸크랩 4마리, 녹말가루 · 튀김가루 2큰술씩, 셜롯 1/2개, 고수 약간

1 소프트 셸크랩은 수분을 최대한 제거한 다음 녹말 가루와 튀김가루를 섞어 튀김옷을 입힌다.
2 셜롯은 링 모양으로 슬라이스한다.
3 180℃의 튀김기름에 1을 바삭하게 튀긴다. 슬라이스한 셜롯과 고수를 곁들인다.

로스팅 버섯 필라프
재스민 라이스 2컵, 느타리버섯 · 백일송이버섯 70g씩, 양송이버섯 7개, 브로콜리니 4줄기, 타임 2줄기, 올리브오일 2큰술, 소금 · 후춧가루 · 버터 · 피시 소스 조금씩

1 재스민 라이스는 한두 번 씻은 다음 불리지 않고 바로 고슬고슬하게 밥을 짓는다.
2 3가지 버섯은 올리브오일, 소금, 후춧가루, 타임을 넣고 20분 정도 재운다. 160℃로 예열한 오븐에서 15분 동안 꼬들꼬들한 느낌이 날 정도로 굽는다.
3 브로콜리니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소금물에 살짝 데친다.
4 달군 팬에 버터를 두르고 1의 밥을 볶으면서 버섯과 브로콜리니를 넣고 섞는다. 싱거우면 피시 소스로 간한다.

새우 망고 샐러드
새우 10마리, 망고 · 아보카도 1개씩, 스위티 · 자몽 1/2개씩, 보스톤 레터스 2통, 루콜라 50g, 코코넛 슬라이스 2큰술, 홍고추 1개, 고수 2줄기, 드레싱(스위트 칠리소스 3큰술, 라임 주스 2큰술, 레몬 주스 · 참기름 1큰술씩)

1 새우는 껍질째 삶아 껍질을 벗긴다.
2 스위티와 자몽은 과육을 준비하고 아보카도와 망고는 한입 크기로 썬다.
3 드레싱 재료를 모두 섞어 드레싱을 만든 다음 홍고추를 다져 넣는다.
4 마른 팬에 코코넛 슬라이스를 넣고 저온으로 바삭하게 구운 다음 종이타월에 올려 기름을 뺀다.
5 보스톤 레터스와 고수는 얼음물에 담갔다가 물건져 물기를 뺀다.
6 접시에 보스톤 레터스, 루콜라, 스위티, 자몽, 아보카도, 망고를 보기 좋게 돌려 담고 새우를 올린다. 구운 코코넛 슬라이스와 고수 잎을 얹고 드레싱을 곁들인다.

스팀드 케일
케일 5장, 마늘 3쪽, 굴소스 1큰술, 치킨 스톡 1/4컵

1 케일은 데쳐 찬물로 헹군다.
2 마늘은 얇게 슬라이스해서 찬물에 2~3번 헹궈 매운 기를 뺀 다음 종이타월로 수분을 제거한다.
3 2의 마늘을 바삭하게 튀겨 마늘칩을 만든다.
4 달군 팬에 굴소스와 치킨 스톡을 넣어 졸인다.
5 접시에 1의 케일을 담고 4의 소스를 뿌린다. 마늘칩을 올려 장식한다.

*모든 레시피는 2인분 기준입니다

에디터 송정림 | 포토그래퍼 이과용 | 요리 박선영(수원과학대학교 글로벌한식조리과 교수)
출처 〈MAISON〉 201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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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깃하거나 새콤하거나

질깃하거나 새콤하거나

질깃하거나 새콤하거나

남아메리카 중부 태평양 연안에 있는 나라, 페루. 잉카제국 시대부터 발달된 농업 기술과 건축술로 놀라운 문명을 이룬 이곳을 다큐멘터리 PD 탁재형이 찾았다. 페루 안데스 지역의 퍽퍽한 알파카 스테이크부터 해안가의 풍부한 해산물 요리로 떠나는 미각 기행을 소개한다.

어느 나라를 가든 현지의 음식에 적응하는 데 그리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지만, 남미 안데스의 산악 지역 음식은 아직도 즐기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사실 육류의 선택과 조리법에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다. 지방질이 어느 정도 함유된 고기를 어느 정도 두께로 썰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숙성시켜 고기를 연하게 만들고 어떤 향신료를 써서 잡냄새를 없애는지에 대해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가지고 있다(정육점 식당의 차림표에 묘사된 고기의 등급과 부위를 생각해보라!). 하지만 안데스를 여행하고자 한다면, 고기의 부위에 대한 지식보다는 턱힘을 기르는 것이 순서다.

해발 4000m의 고지대를 돌아다니느라 바닥난 에너지를 보충할 요량으로 알파카(안데스 산지에 사는 낙타과의 동물) 스테이크를 주문하면, 기름에 바싹 튀겨진 검은 덩어리 하나가 식탁에 올라온다. 구두 밑창 같기도 하고 떡갈나무 껍질 같기도 한 덩어리를 입에 넣기 좋은 크기로 자르는 것만 해도 힘이 든다. 잇몸에 전해져오는 통증을 무시하고 대략 15분을 씹다 보면, 타액은 단백질을 연하게 만드는 데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나마 다음 덩어리를 먹기 위해선 입안을 비워야 하겠기에, 금괴를 삼키는 밀수꾼의 심정으로 콜라와 최대한 뒤섞어 위장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넣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안데스에서 알파카 혹은 야마(알파카의 사촌쯤 되는 동물로 털이 좀 더 거칠다)는 주로 의복을 만드는 털을 제공하는 귀중한 동물로 흔히 먹을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니다. 그렇다 보니 산간 지역 사람들이 고기를 다루는 대표적인 방법은 아궁이의 시렁 위에 얹어 훈제 상태로 보관해놓았다가 감자와 함께 삶아 부드럽게 만들어 먹는 것이다(그런다고 많이 부드러워지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안데스 사람들이 고기 요리를 잘 못한다고 불평하는 것은 두바이에 있는 스키장 설질을 불평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다.

안데스 원주민들이 신선한 육류와 완전히 담을 쌓고 지낸 것은 아니다. 에콰도르 킬로토아의 산골엔 키추아족의 전통 가옥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식사 때가 되면 가족들이 아궁이 근처로 모여든다. 삶은 감자와 옥수수가 대부분인 소박한 식사를 마치고 나면, 주방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꾸이! 꾸이! 꾸이! 꾸이!’ 하는 소리를 내며 벽 틈과 가구 뒤에서 튀어나와 음식 부스러기를 처리하는 놈들은 청계천 애완동물 상가에서도 볼 수 있는 기니피그(Guinea Pig)이다. 울음소리 탓에 원주민들이 ‘꾸이(Cuy)’라고 부르는 이 동물이야말로 ‘잉카의 닭’이라고 불러도 좋을, 안데스의 가축이다. 지금도 페루나 에콰도르의 교외 지역엔 ‘꾸이에리아(Cuyeria)’라고 부르는 꾸이 전문 식당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이 녀석들이 꾸이죠. 꾸이 고기는 콜레스테롤이 적어서 인기가 많아요. 3개월이 지나면 가임기에 접어들고, 임신 후 26일 만에 새끼를 낳아요. 맛도 좋고 번식도 빠르다는 걸 안 잉카 사람들이 길들여서 가축으로 삼았던 거죠.” 닭장 같은 우리 안에서 코를 벌름거리고 있는 녀석들을 가리키며 우리 가이드 앙헬이 한 말이다. 꾸이를 요리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내장을 제거하고 끓는 물에 데친 뒤 속을 향신료로 채워 화덕에서 굽는 것이다.

이때 들어가는 ‘와까따이’라는 식물은 박하의 일종으로 잡냄새를 없애고 고기의 풍미를 살려주는 역할을 한다. 만일 안데스 지역에서 먹어본 육류 요리 중 가장 맛있는 것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날 먹은 꾸이를 꼽을 것이다. 다만, 꾸이를 먹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그 상상을 초월하는 귀여움이다. 두 눈을 꼭 감고 ‘꾸이야! 미안해!’를 외치지 않곤 도저히 그 살점을 삼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육류 요리는 안데스 식문화의 부전공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이 지역 사람들이 주 전공으로 삼는 식재료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생명을 살리기까지 했다. 피삭에는 일주일에 세 번 장이 서는데 일요일엔 주변 산골 마을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성황을 이룬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수백 종류의 감자다. 감자는 고구마, 옥수수, 고추와 더불어 남미에서 세계로 퍼져나간 작물 중 하나다. 감자의 종주국답게 그 모양도 무척이나 다양하다. 어떤 것들은 감자라기보다는 조약돌을 더 닮았는데 몇 개를 손에 쥐고 흔들어보면 무척이나 가볍고, 경쾌한 소리를 낸다. 바로 감자를 동결 건조시킨 ‘쭈뇨(Chuno)’다. 쭈뇨는 기근에 대비해 안데스 산지의 원주민들이 비축해놓는 것으로 미라처럼 완전히 건조되기 때문에 10년 넘게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먹어본 바로는 맛까지 보관되는 것은 아닌 듯싶었다). 잉카제국에는 곳곳에 ‘꼴까(Qollca)’라고 하는 식량 저장소가 있었는데 이곳엔 쭈뇨를 비롯한 건조 식품들을 보관해놓았다가 기근이 들면 무상으로 제공해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했다. 이런 복지정책 이상으로 잉카제국이 공을 들였던 것은 고도와 기후에 맞는 감자, 옥수수의 품종 개량이었다.

2008년 8월, 쿠스코에서 북서쪽으로 50km 떨어진 ‘모라이(Moray)’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선 대지의 여신 빠챠마마에게 옥수수로 빚은 잉카의 술 ‘치챠’를 바치는 전통 의식인 ‘와따깔랴’가 한창이었다. 모라이는 처음 보면 그 용도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여러 개의 동심원이 가운데로 갈수록 좁아지는 것이, 어찌 보면 고대 로마의 경기장이나 극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건축물의 정체는 고대의 농업 시험장이다. 모라이의 가장 바깥쪽 원은 중앙의 광장과 15℃의 온도 차이가 난다. 달라지는 고도와 기후에 맞춰, 제국의 농업 기술자들은 각각의 환경에서 가장 잘 자라는 품종들을 개발해냈다. 이렇게 해서 안데스 사람들은 4000여 종의 감자를 지역에 맞게 재배할 수 있었고, 다양한 환경에 적응력을 갖게 된 감자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무수한 기근을 해결하는 구세주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현대의 여행자들이 고대 잉카인들처럼 감자와 꾸이 고기만 먹으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4000여 종의 감자 맛을 구분하는 일이란, 다림질 선이 10개 들어간 군복이 11개 들어간 군복과 어떻게 다른지를 아는 것보다 힘든 일이니 말이다. 그 집단에 소속되지 않고서는 의미를 찾기 힘든 능력이다. 그리하여, 안데스에서 끊임없이 결핍을 호소하던 나의 세속적인 혀는 해안 지역에 와서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페루 앞 바다에는 ‘훔볼트 해류’라고 불리는, 남극으로부터 흘러오는 차가운 바닷물의 흐름이 있다. 이 해류는 깊은 바닷속에서 솟아오르기 때문에 플랑크톤이 풍부하다. 그래서 페루 앞바다는 세계 최고의 어장 중 하나다. 당연히 페루의 수도인 리마를 비롯한 해안 도시엔 풍부한 해산물을 요리하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 ‘세비체(Ceviche)’는 그중 으뜸이다. 남미 사람들이 회를 먹는다고 하면 좀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세비체는 분명히 회, 그것도 물회다. 문어, 흰살 생선, 새우 등의 주재료에 양파와 토마토를 넣고, 라임즙을 듬뿍 넣는다.

이렇게 하면 라임의 산(酸) 성분에 의해 생선살의 표면이 꼬들꼬들해진다. 안데스의 밋밋하고 무뚝뚝한 음식과 신선한 채소가 듬뿍 들어간 새콤한 해산물회만큼 대척점을 이루는 것이 또 있을까. 코가 아릿할 정도로 새콤한 라임즙을 머금은 문어 세비체를 한입 가득 입에 넣는 순간 혀가 느끼는 쾌감이란 대체불가능한 것이리라. 그러므로, 기나긴 안데스 여행에 지친 여행자들이라면 모름지기 리마의 미라플로레스로 갈 일이다. 그곳에 즐비한 세비체리아(세비체 전문점)들이야말로, 남미 여행을 미각적으로 완성시켜줄 종착역이다.

탁재형 | 에디터 이경현 | 일러스트레이터 김상인
출처 〈MAISON〉 201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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