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 중부 태평양 연안에 있는 나라, 페루. 잉카제국 시대부터 발달된 농업 기술과 건축술로 놀라운 문명을 이룬 이곳을 다큐멘터리 PD 탁재형이 찾았다. 페루 안데스 지역의 퍽퍽한 알파카 스테이크부터 해안가의 풍부한 해산물 요리로 떠나는 미각 기행을 소개한다.
어느 나라를 가든 현지의 음식에 적응하는 데 그리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지만, 남미 안데스의 산악 지역 음식은 아직도 즐기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사실 육류의 선택과 조리법에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다. 지방질이 어느 정도 함유된 고기를 어느 정도 두께로 썰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숙성시켜 고기를 연하게 만들고 어떤 향신료를 써서 잡냄새를 없애는지에 대해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가지고 있다(정육점 식당의 차림표에 묘사된 고기의 등급과 부위를 생각해보라!). 하지만 안데스를 여행하고자 한다면, 고기의 부위에 대한 지식보다는 턱힘을 기르는 것이 순서다.
해발 4000m의 고지대를 돌아다니느라 바닥난 에너지를 보충할 요량으로 알파카(안데스 산지에 사는 낙타과의 동물) 스테이크를 주문하면, 기름에 바싹 튀겨진 검은 덩어리 하나가 식탁에 올라온다. 구두 밑창 같기도 하고 떡갈나무 껍질 같기도 한 덩어리를 입에 넣기 좋은 크기로 자르는 것만 해도 힘이 든다. 잇몸에 전해져오는 통증을 무시하고 대략 15분을 씹다 보면, 타액은 단백질을 연하게 만드는 데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나마 다음 덩어리를 먹기 위해선 입안을 비워야 하겠기에, 금괴를 삼키는 밀수꾼의 심정으로 콜라와 최대한 뒤섞어 위장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넣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안데스에서 알파카 혹은 야마(알파카의 사촌쯤 되는 동물로 털이 좀 더 거칠다)는 주로 의복을 만드는 털을 제공하는 귀중한 동물로 흔히 먹을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니다. 그렇다 보니 산간 지역 사람들이 고기를 다루는 대표적인 방법은 아궁이의 시렁 위에 얹어 훈제 상태로 보관해놓았다가 감자와 함께 삶아 부드럽게 만들어 먹는 것이다(그런다고 많이 부드러워지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안데스 사람들이 고기 요리를 잘 못한다고 불평하는 것은 두바이에 있는 스키장 설질을 불평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다.
안데스 원주민들이 신선한 육류와 완전히 담을 쌓고 지낸 것은 아니다. 에콰도르 킬로토아의 산골엔 키추아족의 전통 가옥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식사 때가 되면 가족들이 아궁이 근처로 모여든다. 삶은 감자와 옥수수가 대부분인 소박한 식사를 마치고 나면, 주방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꾸이! 꾸이! 꾸이! 꾸이!’ 하는 소리를 내며 벽 틈과 가구 뒤에서 튀어나와 음식 부스러기를 처리하는 놈들은 청계천 애완동물 상가에서도 볼 수 있는 기니피그(Guinea Pig)이다. 울음소리 탓에 원주민들이 ‘꾸이(Cuy)’라고 부르는 이 동물이야말로 ‘잉카의 닭’이라고 불러도 좋을, 안데스의 가축이다. 지금도 페루나 에콰도르의 교외 지역엔 ‘꾸이에리아(Cuyeria)’라고 부르는 꾸이 전문 식당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이 녀석들이 꾸이죠. 꾸이 고기는 콜레스테롤이 적어서 인기가 많아요. 3개월이 지나면 가임기에 접어들고, 임신 후 26일 만에 새끼를 낳아요. 맛도 좋고 번식도 빠르다는 걸 안 잉카 사람들이 길들여서 가축으로 삼았던 거죠.” 닭장 같은 우리 안에서 코를 벌름거리고 있는 녀석들을 가리키며 우리 가이드 앙헬이 한 말이다. 꾸이를 요리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내장을 제거하고 끓는 물에 데친 뒤 속을 향신료로 채워 화덕에서 굽는 것이다.
이때 들어가는 ‘와까따이’라는 식물은 박하의 일종으로 잡냄새를 없애고 고기의 풍미를 살려주는 역할을 한다. 만일 안데스 지역에서 먹어본 육류 요리 중 가장 맛있는 것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날 먹은 꾸이를 꼽을 것이다. 다만, 꾸이를 먹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그 상상을 초월하는 귀여움이다. 두 눈을 꼭 감고 ‘꾸이야! 미안해!’를 외치지 않곤 도저히 그 살점을 삼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육류 요리는 안데스 식문화의 부전공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이 지역 사람들이 주 전공으로 삼는 식재료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생명을 살리기까지 했다. 피삭에는 일주일에 세 번 장이 서는데 일요일엔 주변 산골 마을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성황을 이룬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수백 종류의 감자다. 감자는 고구마, 옥수수, 고추와 더불어 남미에서 세계로 퍼져나간 작물 중 하나다. 감자의 종주국답게 그 모양도 무척이나 다양하다. 어떤 것들은 감자라기보다는 조약돌을 더 닮았는데 몇 개를 손에 쥐고 흔들어보면 무척이나 가볍고, 경쾌한 소리를 낸다. 바로 감자를 동결 건조시킨 ‘쭈뇨(Chuno)’다. 쭈뇨는 기근에 대비해 안데스 산지의 원주민들이 비축해놓는 것으로 미라처럼 완전히 건조되기 때문에 10년 넘게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먹어본 바로는 맛까지 보관되는 것은 아닌 듯싶었다). 잉카제국에는 곳곳에 ‘꼴까(Qollca)’라고 하는 식량 저장소가 있었는데 이곳엔 쭈뇨를 비롯한 건조 식품들을 보관해놓았다가 기근이 들면 무상으로 제공해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했다. 이런 복지정책 이상으로 잉카제국이 공을 들였던 것은 고도와 기후에 맞는 감자, 옥수수의 품종 개량이었다.
2008년 8월, 쿠스코에서 북서쪽으로 50km 떨어진 ‘모라이(Moray)’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선 대지의 여신 빠챠마마에게 옥수수로 빚은 잉카의 술 ‘치챠’를 바치는 전통 의식인 ‘와따깔랴’가 한창이었다. 모라이는 처음 보면 그 용도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여러 개의 동심원이 가운데로 갈수록 좁아지는 것이, 어찌 보면 고대 로마의 경기장이나 극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건축물의 정체는 고대의 농업 시험장이다. 모라이의 가장 바깥쪽 원은 중앙의 광장과 15℃의 온도 차이가 난다. 달라지는 고도와 기후에 맞춰, 제국의 농업 기술자들은 각각의 환경에서 가장 잘 자라는 품종들을 개발해냈다. 이렇게 해서 안데스 사람들은 4000여 종의 감자를 지역에 맞게 재배할 수 있었고, 다양한 환경에 적응력을 갖게 된 감자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무수한 기근을 해결하는 구세주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현대의 여행자들이 고대 잉카인들처럼 감자와 꾸이 고기만 먹으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4000여 종의 감자 맛을 구분하는 일이란, 다림질 선이 10개 들어간 군복이 11개 들어간 군복과 어떻게 다른지를 아는 것보다 힘든 일이니 말이다. 그 집단에 소속되지 않고서는 의미를 찾기 힘든 능력이다. 그리하여, 안데스에서 끊임없이 결핍을 호소하던 나의 세속적인 혀는 해안 지역에 와서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페루 앞 바다에는 ‘훔볼트 해류’라고 불리는, 남극으로부터 흘러오는 차가운 바닷물의 흐름이 있다. 이 해류는 깊은 바닷속에서 솟아오르기 때문에 플랑크톤이 풍부하다. 그래서 페루 앞바다는 세계 최고의 어장 중 하나다. 당연히 페루의 수도인 리마를 비롯한 해안 도시엔 풍부한 해산물을 요리하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 ‘세비체(Ceviche)’는 그중 으뜸이다. 남미 사람들이 회를 먹는다고 하면 좀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세비체는 분명히 회, 그것도 물회다. 문어, 흰살 생선, 새우 등의 주재료에 양파와 토마토를 넣고, 라임즙을 듬뿍 넣는다.
이렇게 하면 라임의 산(酸) 성분에 의해 생선살의 표면이 꼬들꼬들해진다. 안데스의 밋밋하고 무뚝뚝한 음식과 신선한 채소가 듬뿍 들어간 새콤한 해산물회만큼 대척점을 이루는 것이 또 있을까. 코가 아릿할 정도로 새콤한 라임즙을 머금은 문어 세비체를 한입 가득 입에 넣는 순간 혀가 느끼는 쾌감이란 대체불가능한 것이리라. 그러므로, 기나긴 안데스 여행에 지친 여행자들이라면 모름지기 리마의 미라플로레스로 갈 일이다. 그곳에 즐비한 세비체리아(세비체 전문점)들이야말로, 남미 여행을 미각적으로 완성시켜줄 종착역이다.
글 탁재형 | 에디터 이경현 | 일러스트레이터 김상인
출처 〈MAISON〉 2014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