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밀라노에서 주방 브랜드들이 보여준 진화는 더 크고 새로운 형태보다 익숙한 구조를 얼마나 정교하게 다듬었는지에 있었다. 무거운 천연석은 가벼워졌고, 거대한 상판은 공중에 떠올랐으며, 곡선은 아일랜드를 넘어 수납과 동선까지 파고들었다. 한층 고도화된 기술로 주방의 쓰임과 인상을 바꾸는 2026 프리미엄 키친의 새로운 기준.
무게를 덜어낸 천연석



모듈노바 Modulnova의 ‘트웬티 랩 Twenty Lab’을 압도하는 것은 거대한 티타늄 트라버틴 아일랜드다. 하지만 이번 컬렉션의 핵심은 천연석의 무게를 과시하는 데 있지 않다. 자체 연구개발을 통해 천연석의 두께와 무게를 줄이는 기술을 적용해, 대형 석재가 지닌 풍부한 결과 조형미는 유지하면서 시공과 활용은 한결 수월하게 만들었다는 것. 짙은 브라운과 차콜이 층층이 겹친 티타늄 트라버틴은 아일랜드와 대리석 도어에 이어지며 주방 전체에 묵직한 인상을 남긴다. 여기에 두께 3mm의 가느다란 금속 선반과 내부에 숨긴 조명, 오픈 수납장을 조합해 무거운 돌과 날렵한 금속 사이에 선명한 대비를 만들었다. 트웬티 랩은 무거운 소재를 더 넓고 정교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기술을 발전시킨 이른바 ‘소재를 위한 엔지니어링’을 톡톡히 보여줬다. 모듈노바는 국내 하농에서 만나볼 수 있다. WEB www.haanong.com TEL 02-515-2626
프렙 키친의 확장


아비미스 Abimis는 건축가 알베르토 토르셀로 Alberto Torsello와 함께 개발한 대표 컬렉션 ‘에고 EGO’를 이번 유로쿠치나에서 쿡탑을 없앤 벽면형 프렙 키친으로 선보였다. 요리를 완성하는 공간보다 식재료를 준비하고 정리하며,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머무르고 교류하는 주방의 새로운 역할에 주목한 것이다. 하부에는 냉장 서랍과 폐기물 수납을 통합해 재료 준비부터 정리까지 과정을 하나의 동선으로 해결하도록 설계했다. 에고의 정밀함은 디테일에서도 드러난다. 구조와 단차 없이 맞물리는 곡선형 도어와 손잡이, 이음매 없이 이어지는 스테인리스 상판이 하나의 매끈한 표면을 완성한다. 경첩은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내부에 숨겨 군더더기 없는 실루엣을 유지했고, 상판 역시 틈을 최소화해 위생성과 관리의 편의성을 높였다. 손으로 원을 그리듯 연마한 스테인리스 표면에는 거울처럼 빛나는 손잡이와 그린 래커 선반을 더해 금속 특유의 차가움을 덜고 풍부한 질감의 대비를 연출했다. 프로페셔널 키친의 성능을 유지하면서도 일상에서는 하나의 정제된 가구처럼 공간에 스며드는 주방이다. 에고는 조리 중심의 키친을 넘어 준비와 소통, 그리고 생활의 풍경을 담는 새로운 프렙 키친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WEB abimis.com
가벼워진 볼륨감

단단한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주방을 가볍게 보이게 하는 것. 울리세 나르치시 Ulisse Narcisi가 새롭게 다듬은 아란 쿠치네 ARAN Cucine의 ‘볼라레 Volare(날다)’는 묵직한 재료와 정교한 비례 사이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제품 이름 볼레르처럼 부피는 유지하되 시각적인 무게는 덜어낸 것이다. 베이스 유닛과 아일랜드를 감싼 내추럴 오크는 안정적인 뼈대를 만들고, 상판과 백스플래시, 아일랜드 측면에는 깊은 결이 살아 있는 타우루스 그레스(천연석의 질감을 구현한 대형 세라믹)를 적용해 단단한 존재감을 더했다. 따뜻한 나뭇결과 묵직한 석재가 대비를 이루지만, 손잡이를 없앤 디자인과 얇은 메탈 라인이 수평선을 또렷하게 정리해 전체 인상은 한결 가볍다. 문을 열었을 때만 드러나는 모래빛 베이지 색상인 사비아 컬러의 상부장 내부도 인상적이다. 겉으로는 절제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안쪽에만 은은한 색감을 숨겨, 맞춤복 안감처럼 작은 반전 매력을 지녔다. WEB www.arancucine.it
곡선이 바꾼 동선

안토니오 치테리오 Antonio Citterio가 아크리니아 Arclinea를 위해 디자인한 ‘코라 Kora’는 상판, 측면 패널, 플린스를 하나의 곡면으로 연결해 직선과 직각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배치가 가능하게 한다. 모서리를 피해 돌아 움직이던 기존 동선은 한결 부드러워지고 조리와 식사, 대화가 이루어지는 영역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새롭게 추가한 대리석 마감 상판 역시 도어와 측면까지 같은 소재로 연속적으로 적용해 아일랜드 전체를 하나의 조각처럼 보이게 한다. 특히 도어 손잡이는 별도의 부품을 덧대는 대신 대리석 자체를 깎아 만든 것. 기능을 소재 안으로 숨기면서 천연석의 두께와 깊이를 강조한 디테일이 엿보인다. ‘폴리아 Folia’, ‘베스퍼 Vesper’, ‘오르비타 Orbita’ 등 함께 선보인 테이블도 둥근 형태와 부드러운 비례를 공유하며 아일랜드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WEB arclinea.com
건축적 뼈대, 부드러운 곡률

이제 주방은 그저 요리만 하는 구역이 아니다. 거실과 경계 없이 어우러지며 공간 전체의 인상을 결정짓는 중심축이다. 몰테니앤씨 Molteni&C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빈센트 반 듀이센 Vincent Van Duysen과 내놓은 ‘피시스 Physis’는 한층 진화한 주방의 위상과 유기적인 디자인 언어를 정교하게 풀어낸 답이다. 이 주방의 공기를 순식간에 바꿔놓는 건 단연 일본산 히노키(편백나무) 베니어다. 고급 수종 특유의 결이 따스한 분위기를 냄은 물론, 목재 자체의 천연 오일이 지닌 뛰어난 내습성과 항균성 덕분에 주방 환경에서 강인한 실용성을 발휘한다. 완성도를 결정짓는 건 곳곳에 숨은 세밀한 세공 디테일이다. 모서리를 부드러운 반원 형태로 다듬은 하프불노즈 Half-bullnose 가공으로 우아함을 극대화했고, 투명한 글라스 도어와 오픈 수납장은 시원한 공간감을, 모듈 내부에 치밀하게 숨겨둔 따스한 LED 조명은 목재와 대리석, 알루미늄의 풍부한 질감을 한층 극적으로 밝혀준다. 몰테니앤씨는 국내 넥서스 매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WEB nexus-official.com TEL 1670-1950
주방을 넘어 거실까지

딱딱하고 네모반듯한 주방이 지겨워졌다면 세자르 Cesar의 ‘탱그램 Tangram’을 주목할 것. 브랜드 특유의 유연하고 유기적인 곡선으로 시선을 사로잡던 이 주방 시스템이 한층 매혹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번 진화의 핵심은 기존 아일랜드에만 머물던 곡선의 미학을 수납장과 상부장, 하부장까지 과감하게 확장하며 주방을 넘어 거실 영역까지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실용성도 놓치지 않았다. 단순한 원형을 넘어선 유려한 곡선 속에 겉보기보다 훨씬 정교하고 치밀한 수납 시스템을 꽁꽁 숨겨두었다. 메인 컬러와 마감재의 변화 역시 눈여겨볼 요소다. 깊은 붉은빛의 ‘아노딕 자이푸르 레드’ 래커 마감과 ‘그루브’ 도어가 이루는 조화가 압권이다. 인도 자이푸르의 이국적인 건축물에서 영감을 받은 레드는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입체적이고 오묘한 표정을 내비친다. 여기에 도어 표면을 따라 불규칙하게 파인 세로 홈 패턴은 모듈 사이의 뻔한 경계를 허물며,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을 세워둔 듯 감각적인 리듬감을 선사한다.
건축 속에 스며든 가전

가게나우 Gaggenau는 밀라노의 역사적인 건축 공간, 빌라 네끼 캄필리오의 글라스 파빌리온에서 설치 전시 ‘프레즌스 Presence’를 선보였다. 가전을 독립된 오브제로 진열하지 않고 계단과 벽, 서로 다른 소재 사이에 배치해 건축의 일부처럼 보이도록 연출한 것. 뮌헨 건축 스튜디오 1zu33과 함께 완성한 전시는 이탈리아 모더니즘과 고전 건축에서 영감을 받아 빛, 비례, 소재가 차례로 이어지는 공간으로 구성됐다. 전시장에는 지난해 하반기에 공개한 최근 컬렉션도 함께 자리했다. 중앙의 트래버틴 계단에는 두툼한 프레임으로 입체감을 살린 ‘익스프레시브 시리즈’ 오븐을 넣고, 손잡이를 없애고 작동 전에는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설계한 ‘미니멀리스틱 시리즈’는 조명이 들어오는 거울과 색유리 앞에 배치했다. ‘바리오 쿡탑’은 현무암과 불에 그을린 목재 상판에 매립했다. 냉장고와 냉동고, 와인 보관장을 나란히 조합할 수 있는 ‘바리오 쿨링 익스프레시브 시리즈’는 짙은 황동으로 마감한 공간에 담았다. 제품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주변 건축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연출한 방식이 흥미롭다. WEB www.gaggenau.com
3.6m를 띄우는 기술

1972년 주방 시스템에서 손잡이를 최초로 없애며 주방 디자인의 역사를 바꿔놓은 전설의 명작이 있다. 이탈리아 디자이너 루이지 마소니 Luigi Massoni의 ‘실라 Xila’가 그 주인공. 그리고 2026년 보피 Boffi가 이 위대한 유산을 거장 피에로 리소니의 손을 거쳐 한층 날렵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XPL 키친’을 공개했다.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건 조형적인 대비감이다. 바닥까지 묵직하게 떨어지는 모놀리식 타입이 웅장한 존재감을 과시한다면, 플린스(걸레받이)를 안쪽으로 바짝 밀어넣은 서스펜디드 타입은 마치 공중에 가볍게 붕 떠 있는 듯한 착시를 선보인다. 자칫 차가워 보일 수 있는 절제된 단단함 속, 90mm 두께의 측면 패널 모서리를 둥글게 곡선으로 살짝 다듬은 센스도 잊지 않았다. 하이라이트는 단연 시스템 후면에 결합된 스낵 카운터. 무려 3.6m에 달하는 거대한 상판을 처짐 없이 안정적으로 허공에 떠 있도록 설계해 보피의 독보적인 구조 기술력을 증명한다. WEB boffidepadova.com
하나의 무대가 된 주방

이번 밀란 디자인 위크에서 가장 강렬한 존재감을 남긴 주방을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폴리폼 Poliform의 ‘하프 Harp’다. 거대한 아일랜드 테이블이 마치 잘 만들어진 연극 무대처럼 공간의 중심을 묵직하게 잡고 서 있다. 조리와 식사, 일상의 대화가 끊김 없이 흐르도록 다듬은 설계가 돋보인다. 상판과 도어에 적용한 유려한 곡선은 자칫 육중해 보일 수 있는 볼륨감을 유연하고 단정한 분위기로 승화시킨다. 특히 아일랜드 상판과 하부 유닛 사이를 시원하게 가로지르는 선명한 라인은 손잡이 역할을 하는 동시에, 도어와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가려 시각적인 리듬감을 선사한다. 여기에 자연스러운 우드 마감, 묵직한 대리석 상판, 브러시드 스틸 디테일이 얽혀 만들어내는 재질의 레이어링도 매혹적이다. 거실과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힘, ‘하프’는 라이프스타일 전체를 아우르는 가장 근사한 집 안의 무대가 된다. WEB www.poliform.it/ko TEL 02-3445-19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