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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길어올린 색과 무늬가 직물이 되고, 가구가 되고, 마침내 하나의 집을 이룬다. 40년간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을 탐구해온 장응복이 무늬로 지은 작은 우주.

장응복과 디자인 스튜디오 스탠다드에이가 조선시대 지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오늘 지장_화조도 이불장’과 그 앞에 걸린 화문석은 직접 기록한 이십사절기 색상판을 바탕으로 밤색, 팥색, 회보라색을 사용해 가을 빛을 표현했다.

전통 지장과 ‘이십사절기 화문석’, ‘은행나무’ 등 장응복의 주요 작품이 어우러진 <집 속의 집> 전시 전경. 서로 다른 공예 재료와 무늬가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생활 공간을 이룬다.

1986년 모노를 설립한 이래 한국의 전통 문양과 자연의 색을 자신만의 디 자인 언어로 풀어온 장응복. 그의 40여 년 작업 세계를 한자리에 모은 전시 <에퀴녹스 추분_춘분>이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1백여 종의 무늬가 펼쳐지는 ‘무늬집’, 직물과 가구, 공예품이 모여 하나의 생활 공간 을 이루는 ‘집 속의 집’, 자연의 순환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탑돌이’까지 세 공간을 따라 그의 작업 세계가 펼쳐진다. 특히 ‘집 속의 집’에서는 전통 지 장응복과 디자인 스튜디오 스탠다드에이가 조선시대 지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오늘 지장_화조도 이불장’과 그 앞에 걸린 화문석은 직접 기록한 이십사절기 색상판을 바탕으로 밤색, 팥색, 회보라색을 사용해 가을 빛을 표현했다. 장과 화문석, 한지와 직물이 서로 어우러지며 오래된 공예가 오늘의 일상 에 머무는 새로운 풍경을 그려낸다. 무늬 하나에도 자연의 시간과 삶의 바 람을 담아온 장응복의 작업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집을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될지도. 추분에 시작된 전시는 계절을 지나 춘분을 앞둔 2027년 3월 7일까지 이어진다.

INTERVIEW

한국의 전통과 자연에서 발견한 무늬를 직물과 가구, 공간으로 확장해온 디자이너 장응복.

40년 작업을 한자리에 모은 첫 전시라고 들었습니다. 의미가 남다를 것 같아요. 40년간의 작업을 돌아보기보다는 새롭게 시작하는 계기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건강하게 30년을 더 일한다면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생각해보는 거죠. 사실 이번에 보여주지 못한 작업도 있고, 아카이브도 더 많이 소개하고 싶었지만 공예박물관의 성격을 고려해 일부 덜어냈어요.

전시 제목이 <에퀴녹스 추분_춘분>인 이유가 궁금합니다. 에퀴녹스는 추분과 춘분을 뜻해요. 낮과 밤의 길이는 같지만 추분부터는 밤이, 춘분부터는 낮이 길어지죠. 같지만 또 다른 거예요. 텍스타일은 다른 재료에 비해 약하지만 그 약함이 매력이기도 해요. 어둠과 밝음, 부드러움과 단단함, 전통과 현대처럼 서로 다른 요소들이 오가며 작업을 발전시켜온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단순한 전시 설치물이 아니라 실제 집의 구조처럼 보이는 ‘집-집’은 어떻게 시작된 작업인가요? 인테리어 일을 하면서 늘 고민했던 게 있어요. 공간을 너무 완벽하게 만들면 주인이 바뀌거나 변화를 줄 때 엄청난 쓰레기가 나오거든요. 그래서 모듈화된 구조를 연결하고 조합해 하나의 인테리어를 만드는 ‘집-집’을 구상했어요. 장도 하나의 작은 집이고, 사람의 몸도 소우주잖아요. 작은 장 안에 산과 물, 하늘과 꽃을 담는 거죠.

‘도원몽’, ‘산-수’, ‘담’, ‘따뜻한 기하학’, ‘촉각의 눈’, ‘움직이는 무늬’ 등 여섯 가지 개념으로 발전시켜온 장응복의 무늬를 소개하는 공간.

그럼 ‘집-집’은 실제 주거 공간에서도 사용할 수 있나요? 그럼요. 실제 판매도 했고, 호텔이나 인테리어 회사에서도 문의가 많아요. 문갑 구조라 구성 요소를 분리해 공간을 열 수도 있고, 패턴만 바꿔도 전혀 다른 표면이 되죠. 제가 디자인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변형이 가능하고, 모듈화되어 있으며,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구조예요.

전통 공예를 현대적으로 풀어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전통을 지나치게 고수하거나 과하게 변형하면 오히려 원형이 가진 힘을 잃기 쉬워요. 저는 전통 공예의 기술과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 현대적인 기능을 더하려고 해요. 무조건 새로운 것을 만들기보다 새롭게 보이는 기획에 집중하죠. 전통 방식을 제대로 배우고 재현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개선하고 현대화할지 찾아가는 게 제 작업 방식이에요.

전통 지장을 현대 가구로 바꾸면서 가장 고민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전통 지장은 춘향목 살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한지를 바르기 때문에 제작이 까다롭고 비용도 많이 들어요. 저는 실용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옷을 넣다가 한지가 찢어질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원목 프레임에 제 디자인을 적용해 그런 문제를 보완했죠. 물론 살이 비치는 아름다움과 숨 쉬는 장의 기능은 줄어들어요. 대신 내구성을 높이면서 전통 재료의 질감과 고유한 패턴은 살리는 절충점을 찾은 거죠.

책가도와 지장의 구조에서 착안한 모듈형 공간 설치작품 ‘집-집’. 목재 골조 안에 직물과 지장, 타일, 완초, 목기 등을 배치해 작은 집을 구현했으며, 벽체와 가구를 자유롭게 조합하거나 해체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지우산장 윤규상과 협업해 전통 지우산의 살을 겹겹이 쌓아올린 조명 작품 ‘낭화 지우산 샹들리에’.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새롭게 시도한 작업도 있나요? 한지사와 수방사 등 서로 다른 재료를 교직해 새로운 패브릭을 개발했어요. 이런 작업은 원사 수급부터 염색, 가공까지 제작 시스템과 프로젝트의 지원이 뒷받침돼야 가능해요. 제가 H 프로젝트를 통해 많이 발전한 것도 그런 이유죠. 해외 건축가들은 제작 방식을 지정하기보다 콘셉트를 제시하고 제안을 요청해요. 그 덕분에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었죠. 그렇게 10년간 쌓인 경험이 제 노하우가 됐어요.

지난 40년간 한국의 집은 아파트 중심으로 크게 달라졌어요. 그 과정에서 사라져 아쉬운 패브릭 문화와 새롭게 가능해진 것이 있다면요? 저도 여러 번 주상복합 주거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획일적인 상자 형태의 주거 공간은 지역 관계망이나 한국 기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패브릭과 나무 대신 유리, 금속, 플라스틱처럼 관리하기 편한 재료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죠. 그렇다고 이런 재료를 배제하기보다는 서로의 장점을 살리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이번 전시처럼 스크린에 자연의 무늬를 입혀 공간의 경계를 부드럽게 만들거나, 침실에 한지와 패브릭 벽지를 사용해 촉각적인 질감을 더할 수 있죠. 금속이나 유리에도 패턴과 빛을 활용하면 공간에 자연의 감각을 들일 수 있어요.

실크, 한지, 유리 등에 표현한 무늬를 72개 나무틀에 담아 자유롭게 조합한 대형 모듈 작품 ‘조각잇기-벽’. 2 디지털 영상 속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를 포착해 정지된 패턴으로 재구성한 ‘움직이는 무늬’.
디지털 영상 속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를 포착해 정지된 패턴으로 재구성한 ‘움직이는 무늬’.

무채색을 선호하는 한국의 집에 무늬와 색을 자연스럽게 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서양의 모더니즘이 도입된 이후 한국은 여전히 그 영향 아래 있어요. 저는 그 모던함과 조화를 이루는 색과 무늬를 만들어왔죠. 색을 사용하는 게 어렵다면 쿠션이나 커튼, 아트워크처럼 쉽게 바꿀 수 있는 요소부터 시작해보세요. 그 공간에 사는 사람도 인테리어의 일부니까, 패션에서 먼저 색을 시도해보는 것도 방법이에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좋은 집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요? 집은 보자기나 그릇처럼 사람을 감싸고 담아내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벽과 창문을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이 서로 숨을 쉴 수 있어야 하죠. 때로는 반쯤 닫힌 공간에서 안전하게 바깥을 내다보고, 때로는 열린 공간에서 넓은 풍경을 바라보며 외부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집이 좋은 집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