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거장, 프랜시스 베이컨을 조명하는 전시 두 가지가 유럽에서 열리고 있다. 화가와 디자이너를 넘나드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예술 세계.

Self-Portrait’, 1973.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Portrait of a Man Walking Down Steps’, 1972. The Estate of Francis Bacon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순위에 항상 올라 있고, 수많은 마니아 팬층을 거느린 작가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 그에 대한 흥미로운 전시회가 유럽 두 곳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런던 초상화갤러리의 <인간의 존재>(2025년 1월 19일까지)가 널리 알려진 인물 초상화를 다루고 있다면, 남프랑스 아트 콘크리트 스페이스 Espace de l’Art Concret에서 열리는 <프랜시스 베이컨과 디자인의 황금시대>(2025년 1월 5일까지)는 베이컨의 디자이너로서 면모를 소개한다. 그가 워낙 유명한 화가이기에, 디자인도 했다는 사실은 의외로 숨겨져 있는 부분이지만, 그가 20대 후반 그림을 시작하기 전 생계를 유지했던 분야는 인테리어였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영국 부유한 집안의 자제였으나, 어린 시절 드러난 동성애적 성향 때문에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키다가 10대 중반에 집을 떠나게 된다. 그는 런던, 파리, 베를린 등 여러 도시를 떠돌며 잡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심지어 도둑질과 매춘도 마다하지 않았다. 파리의 한 갤러리에서 피카소의 그림을 보게 된 것이 그를 작가의 길로 이끄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1929년 런던으로 돌아와 스튜디오를 차린 후 가구 제작과 작품 활동을 병행한다. 드디어 1944년 작품 <십자가 처형의 바닥에 있는 인물을 위한 세 가지 연구>가 1945년 전시에서 크게 호평을 받으며 전후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디자이너 활동은 잦아든다. 그러나 당대 그가 디자인한 가구들은 인테리어 매거진에 소개되기도 하며 주문이 꾸준히 이어졌다.
작가는 베를린에서 본 바우하우스와, 특히 파리에서 발견한 프랑스 디자이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회고한다. 그들은 같은 영국(아일랜드)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에일린 그레이, 르 코르뷔지에, 샤를로트 페리앙, 피에르 샤로, 안드레 루르카, 로베르 말레 스티븐슨 등으로, 이번 남프랑스 전시회에서 함께 소개된다. 베이컨은 페르낭 레제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아 카펫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 카펫 또한 레제의 작품과 함께 전시될 예정이다. 전시된 디자인 가구와 그림 속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당대 디자이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베이컨의 디자인 가구가 아직은 생소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Henrietta Moraes’, 1966.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남프랑스 아트 콘크리트 스페이스에서 열리는 전시 <프랜시스 베이컨과 디자인의 황금시대> 전경.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한편 런던 초상화갤러리에서 열리는 <인간의 존재> 전시회는 1940년대 후반부터 후대에 이르는 50여 점의 작품들로, 작가 자신의 자화상에서부터 그의 연인이던 피터 레이시, 조지 다이어 등의 초상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교황의 초상화를 전기고문 의자에 앉아 괴로움에 소리치는 존재처럼 묘사한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1953) 작품, 누워 있는 인물을 그린 <헨리에타 모라에스>(1966) 등도 포함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스페인의 대가 벨라스케스가 1650년에 그린 작품과 티치아노의 여성 누드화를 재해석한 것. 미술을 정식으로 공부한 적은 없지만, 미술관을 자주 방문하며 대가들의 작품을 직접 보고 배운 그는 작품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등 대가들의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그에게 작가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준 피카소를 비롯해 벨라스케스, 티치아노, 렘브란트, 반 고흐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베이컨이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는데, 이번 전시에는 현대 사진작가가 베이컨을 모델로 촬영한 흑백 사진들도 함께 소개된다. 가디언 지는 이번 전시를 지금까지의 베이컨 전시회 중 최고라고 평가하면서, ‘베이컨은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신념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현실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던 유일한 예술가였다’고 언급한다. 긍정적인 표현으로 바꿔보자면, 어떠한 판단과 윤리를 배제한 채, 오로지 인물에만 집중한 작품이기에 시간을 초월하여 관람객을 사로잡는 매력을 지닌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