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비에 억만 겁의 혼을 담아, 정숙희

누비에 억만 겁의 혼을 담아, 정숙희

누비에 억만 겁의 혼을 담아, 정숙희

본 기사는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의 지원을 받아 제작 되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에서 주관하는 우수공예품 지정제도(K-ribbon Selection)에 선정된 올해의 작가 5인을 만났다. 전통과 현대의 감각이 어우러진 그들의 작품은 한국 공예의 미래를 세계로 이끈다.

작가의 작업실 한쪽에 자리한 누비 공예품들. 도자 모양 액자는 쪽염색 기법을 통해 하나의 원단을 여러 색으로 물들여 만들었다.

누비 공예품의 디자인은 심심할 거란 편견도 정숙희 작가를 만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싱조차 할 줄 모르던 그가 누비 공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고향 통영에서 운영하던 특산품 가게 해수점을 운영하면서부터다. 우수한 품질에 비해 한정되고 투박한 디자인 때문에 통영누비 제품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를 개선하고자 수백 개 제품을 뜯어 원단 단위까지 분석하기 시작한 정숙희 작가는 스스로 재봉틀 사용법을 익히며 기존 제품에 새로운 원단을 덧붙였고, 어느새 디자인까지 직접 관여하며 자연스레 누비 공예가로서 첫발을 뗐다. 공예가로서 그의 행보는 실험의 연속이었다. 의류 디자이너 이상봉과 협업한 통영누비 작품을 서울패션위크에 선보이고, 부드러웠던 누비 천에 옻칠을 더해 딱딱한 소재로 재탄생시키거나 원단에 직접 그림을 그려 제품을 만드는 등 기존엔 없던 파격적인 시도를 이어왔다. 진지하게 통영누비의 현대화, 세계화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건 청와대 사랑채에 작업물을 납품하고, 해수점을 찾은 보테가 베네타 한국 지사장에게서 명품 못지않은 통영 누비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면서부터다. 한 번에 여러 줄을 박아 만드는 중국산 기계 누비가 아닌, 통영 고유의 노루발로 한 줄 한 줄 정성을 깃들여 만든 통영누비를 세계에 알리고 싶은 마음으로 공예품의 가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통영누비로 만든 쿠션들.

2024 공진원 우수공예품으로 선정된 <누비혼 백>.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방을 만들기 위해 모든 디자인을 다르게 했다.

수없이 많은 원단을 자르고 이어온 작가의 손.

“공예품의 가치는 쓰임에서 오거든요. 기껏 만든 공예품이 쓰이지 않으면 그건 예술품이지, 공예품은 아니라 생각해요.” 이런 소신으로 2000원짜리 도장 지갑부터 600만원에 달하는 이불 세트는 물론, 클러치나 수면안대, 실내화 등 ‘쓰임의 가치’가 있는 모든 공예품을 누비로부터 탄생시킨 작가다.

2024년 우수공예품 지정제에 선정된 <누비혼 백> 또한 그 덕에 탄생할 수 있었다. 방석 등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을 모아 손가방으로 만들며 쓰임의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저마다의 이유로 힘든 세상, 색으로나마 위안을 주고자 화려한 색상의 누비를 활용하면서도 내부 안감엔 무채색 누비를 더해 언제든 뒤집어 연출할 수 있도록 했다.

섬세한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통영 고유의 노루발.

작업실의 풍경.

지금까지 수많은 특허를 내고, 여러 상을 받은 정숙희 작가에게도 이번 2024년 우수공예품 선정은 더욱 의미 깊다. 목 디스크로 인한 건강 문제와 번아웃으로 휴식을 고민하던 찰나,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우수공예품 선정 직후 리움스토어나 르베이지 등 제 작업물을 납품하고 싶은 곳으로부터 연락이 오더라고요. 11월 도큐서울에서 진행한 전시 <퓨쳐픽션: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물>에 작가로 참여했고, 12월엔 공예트렌드페어도 예정되어 있어요. 2025년 1월엔 메종 오브제 박람회를 위해 또 한 번 파리에 가고요.” 메종 오브제엔 이미 여러 번 참가한 경험이 있지만, 우수공예품 선정 작가에게 지급하는 지원금 3500만원 덕분에 이번 출장은 더욱 풍성해질 것 같다. 과거 예산 문제로 제대로 만들지 못했던 영어 브로셔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제가 원하는 대로 브로셔를 만들 수 있게 되어 너무 좋습니다. 예전에 참석했을 때 제일 아쉬운 부분이 책자였거든요. 해외에 나를 알리기 위해서는 영어로 된 책자가 필요한데, 그땐 준비하지 못했어요.” 한창 막바지 작업 중인 책자엔 그가 지금까지 일궈온 작업에 대한 이야기가 꾹꾹 담겨 있다. 선정된 우수공예품엔 ‘코리아 프리미엄’을 상징하는 K-리본이 주어진다. 우수한 작가와 공예품이 수없이 많은 한국에서 인정받았다는 것은, 해외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는 공진원의 우수공예품 제도를 통해 더 많은 한국의 공예품들이 주목받기 원한다. “저는 우리나라 공예품이 다 명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제는 전 세계가 알아주는 우리나라 고유의 명품 브랜드가 나올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첫 번째 시작을 정숙희 작가의 통영누비가 끊게 될지도 모르겠다.

작업실의 정숙희 작가.

서울부터 밀라노까지, 원단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방문해 직접 공수해온 원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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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원지은, 문혜준 원하영

포토그래퍼

신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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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속에 숨은 시간, 이상호

흙 속에 숨은 시간, 이상호

흙 속에 숨은 시간, 이상호

본 기사는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의 지원을 받아 제작 되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에서 주관하는 우수공예품 지정제도(K-ribbon Selection)에 선정된 올해의 작가 5인을 만났다. 전통과 현대의 감각이 어우러진 그들의 작품은 한국 공예의 미래를 세계로 이끈다.

독특한 미학의 세라믹 작업을 선보이는 이상호 작가.

이상호 작가는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그릇 하나에도 ‘오래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에게는 고대의 문양, 흙의 질감, 그리고 한국적 장식들이 단순한 물건을 넘어 작은 역사를 품고 있는 존재다. 그가 만들어내는 <코리아 판타지 Korea Fantasy>는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한국의 전통적 상징과 현대적 감각을 오가는 독특한 미학을 담고 있다. 작가는 오랜 시간 조선시대의 미학에 주목하며, 흙을 매개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탐구해왔다. 특히 <피스 시리즈>로 대표되는 그의 작업은 비정형의 미를 그릇에 담아, 단순한 생활용품 그 이상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런 그가  2023년 한국 고대 문양에 눈을 돌리게 된 순간은 일종의 전환점이 되었다. 공진원에서 진행하는 전통문화 전문인력양성 프로그램 ‘전통가온 리더과정’에 참여한 그는 경주의 유적을 탐방하고 박대성 화백의 전시를 감상하며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었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다. 조선시대 이전의 고대 유물에 새겨진 장식에는 단순한 문양을 넘어선 의미가 담겨 있었다. 물고기 문양 하나에도 다산의 상징이 깃들고, 소용돌이 문양에는 영원한 생명력과 풍요로움을 품고 있었다. “고대 미학의 장식은 염원을 담고 쌓아가는 것이더라고요. 과도한 겉치레에 불과한 장식이 아니라 의미와 형태를 강조하기 위한 장식을 선보이고자 합니다.” 그의 말처럼, 이상호 작가는 고대 문양이 가진 힘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흙의 물성에 결합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만들어가고 있다.

최근 새롭게 작업 중인 ‘코리아 판타지 월 오브제’ 시리즈.

다양한 스타일의 작업을 볼 수 있는 작업실 전경.

이번에 선보인 새로운 시리즈 <모듈 상감 접시>는 2019년부터 2021년의 <피스 시리즈>에 이어 2024 우수공예품으로 선정되었다. 조선시대 이전의 고대 문양을 현대적 조형 감각과 결합해 재구성한 공예품으로, 해외의 다양한 반응을 경험하며 한층 새롭게 변주한 작업이다. 유럽, 중동, 동남아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그의 공예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작가는 더욱 유연한 디자인 접근과 조화로운 형태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접시를 모듈 형식으로 구성해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조립하거나 변형할 수 있도록 제작했다. 형태는 서양적 모던 디자인에서 가져왔다면, 장식은 한국 고대의 전통 문양을 추상적으로 적용했다. 고대 도자기 장식에서 나타나는 소용돌이 문양은 영원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음식을 먹는 이에게 활력을 주는 장식적 의미로 담고 있다. 그릇 안에 풍요의 이미지를 상감으로 새기고, 그 기운이 음식을 먹는 이에게 전해지도록 의도했다. 추상적인 선은 음각 장식 후 화장토를 입히는 선 상감 기법을 통해 매 순간 형태가 다르게 나타난다. 마치 액션 페인팅처럼 인간의 손으로 표현하는 자연스러운 선의 흐름을 보여주며 공예적 요소를 강조했다.

2024 우수공예품으로 선정된 모듈 상감 접시.

도예 작업 과정. 몰딩 과정 후 형태를 만들고, 음각 장식 후 화장토를 입혀 추상적 형태를 살린다.

이 시리즈는 특히 ‘흙’이라는 소재가 주는 변화를 온전히 담아내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 흙도 한국에 없는 여러 흙을 새롭게 조합하여 기존에 없던 물성을 만들어냈다. 유약이 흙과 만나 가마 속에서 예상치 못한 형태로 흐르며 자연스러운 울림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그의 작품에 독특한 생명감을 더한다. 그는 “회화와는 다르게, 가마에서 재료가 흙 위에 쌓여 변하는 모습에는 시간이 쌓인 울림이 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흙의 물성을 살리면서도 고대의 장식적 요소를 접시에 새겨넣어 흙과 문양이 상호작용하는 순간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2025년 1월, 이상호 작가는 메종&오브제 파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단독 부스를 선보일 예정이다. <코리아 판타지 Korean Fantasy>를 테마로, 기존에 선정된 우수공예품과 함께 오브제 시리즈를 조화롭게 구성해 한국 공예 작가로서 동시대적 관점을 밀도 있게 표현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앞서 2022~23년 우수공예품 지정제도 홍보관으로 참여하며 해외 페어의 구조를 이해하고, 바이어 응대와 수출 경험을 통해 해외 시장의 다양한 시각을 배우고 있다. 특히 올해부터 작가가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우수공예품 지정제 지원 시스템 덕분에 부스비, 통역비, 물류비 등을 직접 챙기며 전시 준비의 전 과정을 몸소 경험하고 있다. “모든 준비 과정을 직접 경험하면서 전시 흐름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 공예가 전 세계에서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는 자립적인 공예 작가로서의 성장과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가지런히 모아둔 작업 도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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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원지은, 문혜준, 원하영

포토그래퍼

신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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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개로 그린 일상, 김송이 김경훈

자개로 그린 일상, 김송이 김경훈

자개로 그린 일상, 김송이 김경훈

본 기사는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의 지원을 받아 제작 되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에서 주관하는 우수공예품 지정제도(K-ribbon Selection)에 선정된 올해의 작가 5인을 만났다. 전통과 현대의 감각이 어우러진 그들의 작품은 한국 공예의 미래를 세계로 이끈다.

2024 우수공예품으로 선정된 소복함. 복주머니를 나무함으로 재해석하고, 꽃 모양 자개로 복을 빌어주는 의미를 더했다.

“사람들이 종종 작업을 보고 ‘이게 자개인가요?’ 하며 놀라곤 해요. 그것이 칭찬처럼 들려요. 자개를 사용하지만 자개 같지 않은, 그래서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방식을 사용하려고 해요.” 전통 자개 공예를 현대적이고 친숙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생활공예 브랜드 소목소복의 이야기다. 누나 김송이 작가가 목공 작업을 하고, 동생 김경훈 작가가 그 위에 자개를 얹어 공예품을 함께 만들어나간다. ‘소목소복’이라는 이름은 ‘소소한 나무가 주는 소소한 행복’을 의미하며, 일상 속에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작은 제품을 통해 보는 이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기 바란다는 뜻이다. 김송이 작가는 취미로 목공을 시작했다가 동생이 만든 자개 고등어 졸업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협업을 제안했다. 그 후 두 사람의 첫 작품인 <자린고비 소반>을 만들어냈다. 마케팅 회사에서 일했던 김송이 작가는 실용적 관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한 김경훈 작가는 미적 가치에 집중하며 서로 다른 시각을 바탕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이 오히려 두 사람의 공예품에 조화와 균형을 더해주며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소목소복을 함께 운영하는 김송이, 김경훈 작가.

제작 중인 소복함을 볼 수 있었던 작업실. 김송이 작가가 목공 작업으로 함을 만들면, 김경훈 작가가 자개 작업을 더해 마무리한다.

두 사람은 위트 있고 재미있는 작업을 공동 목표로 삼고 있다. 대표작인 <일상소복사 시리즈>는 원목 위에 손가락 크기의 자개 장식으로 수영하는 사람이나 산책하는 강아지 등의 일상적인 장면을 담아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든다. 자개를 일상의 소재로 재해석하면서 ‘자개가 우리 일상을 품으면 어떨까?’라는 호기심에서 출발한 이 시리즈는 공예와 일상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전통 자개 기법을 활용하면서 잊혀가는 토종 물고기를 주제로 한 <토종 민물고기 시리즈>도 시작했다. 공진원에서 진행한 공예디자인 스타상품개발 과정에서 탄생한 이 시리즈는 꼬치동자개, 감돌고기 같은 멸종 위기 토종 물고기를 자개로 표현해 트레이와 컵받침 등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형태로 풀어낸다. 이후 공진원의 후속 지원을 받아 <토종 민물고기 타래함 시리즈>를 출시했고, 2022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과 협업해 전통문화유산을 활용한 굿즈 상품을 개발했다. 이 과정에서 레이저 커팅 기법을 처음 시도했으며, 대량 생산이 필요한 경우에는 새로운 작업 방식을 적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2024년 공진원의 우수공예품 지정제도에 선정된 <소복함>은 복주머니를 나무함으로 재해석해 실용성을 더한 공예품이다. 복주머니의 의미를 담아 새와 꽃 자수를 자개로 표현하고, 뚜껑 손잡이에 매듭 장식을 더해 전통적인 멋을 강조했다. 공예트렌드페어에서 확장된 시리즈와 함께 김경훈 작가의 기억에 남는 공예품 중 하나인 <산 시리즈>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 시리즈는 광활한 산을 자개의 색으로 표현해 전통 기법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대표적인 작업이다. 또한 2025년 메종&오브제 전시를 준비 중이다. 이번 우수공예품 지정제도에 선정된 덕분에 지원금을 활용하여 해외 페어에 처음 도전하며, 현지 관람객의 반응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기존에는 정해진 틀에 맞춰 참여했으나 이번에는 주도적으로 페어를 선택해 도전한다. 직접 모든 과정을 준비하면서 공예품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이 커졌다. 해외 관객이 생각하는 자개 공예의 고정된 이미지에 신선한 반전을 주고자, 원목 위에 자개를 접목한 친숙한 공예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자개 공예를 떠올리면 흔히 까만 옻칠 바탕 위에 자개 장식을 떠올리겠지만, 우리는 익숙한 원목에 전통 자개를 접목해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어요. 해외에서도 쉽게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소목소복 작업실 전경.

자개 위 오일로 마무리 중인 일상소복사 작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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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원지은, 문혜준, 원하영

포토그래퍼

신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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