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으로 빚은 삶

색으로 빚은 삶

색으로 빚은 삶

강렬한 색채와 유쾌한 텍스트, 직관적이고 유쾌한 작품들. 개념이나 논리 대신 ‘미술이 곧 즐거움’이라는 철학으로 작업하는 이명미 작가의 삶은 그 자체로 예술이 된다.

이명미 작가의 대구 작업실 전경.

“나는 생각나는 대로, ‘이게 참 재미있다’ 싶으면 그림을 그려요.” 이명미 작가를 만나기 위해 대구에 있는 작업실을 방문해, 한 시간가량 두꺼운 도록들을 넘겨 보며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때는 가정에 대한 생각밖에 없어서 그림 가운데 ‘토킹 어바웃 디너 Talking About Dinner’라는 글을 써넣었고, 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빠져 있었어요.”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 있잖아요, 최백호가 부른 그 노래가 진짜 좋더라고요. 그래서 그림에 가사를 넣어 봤어요.” “여기 ‘1’이라는 숫자는 카카오톡의 ‘1’을 생각하며 쓴 거예요. 어느 날 조카가 카톡에서 ‘1’이 안 사라지면 상대방이 안 읽은 거라고 얘기해줬는데, 너무 가슴 아프게 확 꽂혀서.” 너무 평범해 때로는 존재조차 희미한 일상 속 소재들은 이명미 작가에게 작업의 영감이 된다. 가끔 경쾌한 색감의 작품 뒤엔 서정적으로 표현된, 작가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담겨 있다. “내가 위암 수술한 지 6개월 만에 딸이 시한부 6개월 판정을 받았어요. 그 후로 2년을 더 살긴 했는데, 딸 간병을 하느라 내가 환자인 줄도 모르고 살았어요. 딸 간호하고 작업실 와서 캔버스에 물감을 부어놓고, 완전히 몰입하진 못했지만 이렇게 눈물방울 같은 그림을 그렸어요.” “이거는 <내 사랑 나의 누이>. 보들레르의 시에서 나온 글이면서도, 세상을 떠난 언니 이향미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어요.” 한국의 1세대 작가 이명미가 처음 작품 활동을 시작한 1970~80년대엔 단색화라는 지배적인 사조가 있었다. 반복적인 행위와 최소한의 표현을 통해 물질의 본질과 작가의 정신성을 탐구하던 때였지만, 이명미 작가에겐 사유와 논리라는 틀보다는 직관과 감각으로 그리는 ‘놀이’로서의 미술이 더 중요했다. 강렬한 색채와 톡톡 튀는 텍스트, 단순명백하면서도 주관적인 작업들을 이어오며 어떤 미술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축을 형성해온 이유다. 도록에 수놓인 각 작품에 얽힌 사연을 들은 뒤, 이명미 작가의 작업실에 앉아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작업 중인 캔버스 뒤에서 웃어 보이는 이명미 작가.

거침 없는 붓놀림으로 여백을 채우는 이명미 작가의 손.

다채롭고 뚜렷한 색채와 그림 위에 쓰인 단어와 문장들은 작가님의 작업의 근간인 것 같습니다. 작가님에겐 이 두 요소가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1972년 당시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앙데팡당>이 열렸는데, 그때부터 한국에 백색으로서의 단색화가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학교 다닐 때부터 색채에는 쭉 관심이 있었는데, 백색만으로 작업을 하기 싫었던 거지. 꽃밭에는 여러 가지 꽃이 피어야 되는데, 백합이나 흰 꽃만 꽃 취급을 받는 것 같은 마음에 색채를 더 열심히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이전의 사실화는 주제와 등장 인물이 있었고, 잭슨 폴록은 형식적인 그림의 틀을 깨기 위해 바닥에 캔버스를 두고 물감을 흩뿌리는 작업도 했는데, 갑자기 단색화 바람이 부니까 통제를 받는 듯한 느낌도 조금 들었어요. 그래서 1977년 그로리치 화랑에서 첫 개인전 <놀이>를 할 때는 일부러 화면을 다 분할하기도 했어요. 처음부터 계획해서 그린 게 아니고 이만큼씩 분할해둔 다음에 즉흥적으로 그렸지. 어떻게 보면 어렸을 때 위인전을 너무 읽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반골 기질이 생긴 게.

작업실 한쪽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물감과 붓들.

독서 중인 이명미 작가.

작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동물과 식물, 생활용품, 숫자와 문자 등 일상적인 요소에서 작업 소재를 찾으시죠. 우리나라 민화를 보면 색부터 소재까지, 서민적인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잖아요. 또 궁궐에 있는 병풍들을 보면 오색찬란한 그림들이 있고요. 나는 양쪽을 다 그리고 싶었어요. 내 그림의 주제는 내가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계속 나올 거예요. 이 생활이라는 게, 나이 칠십이 넘어서 보니 10대 때 어느 강가에서 본 강 풍경이 훅 생각날 때도 있고, 31세에 처음 했던 경험이 올라올 때도 있고 그래요. 나이가 든다는 건 소재의 창고가 훨씬 더 넓어졌다고 생각하면 돼요. 나는 30대 때부터 그 창고에서 내 안의 경험을 뽑아 써왔어요. 나이가 들면서 더 많이 내려놓기도 하고, 삶에서 쇼크가 올 때는 그 충격의 주파수를 더 올리거나 내리는 기능을 더 발달시키기도 하고요. 그러니 내 그림은 비슷하면서도 그때그때 바뀔 수밖에 없어요.

작업실 한쪽엔 작가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CD 앨범들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다.

어쩌면 논리와 이성보다 앞서는 게 직관과 감각이고, 작가님 또한 거기에 기반해 작업하니 세대를 초월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란 생각도 드네요. 개념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샤르트르나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들을 언급하지 않으면 무지한 걸로 취급받았거든요. 데리다니 라캉이니, 이런 말을 해줘야 ‘책 좀 봤네’ 쳐줬어. 물론 두뇌 역할도 중요하지만, 우리 그림쟁이들은 그림을 재료로 표현하잖아요. 개념미술 쪽에서는 1960~70년대에 성능경 작가나 이건용 작가가 퍼포먼스를 통해 기존 미술 체계에 반하는 제스처를 보였는데, 그것이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했어요. 나도 분야와 추구하는 바는 다르지만, 그런 흐름을 품어야 된다 생각도 했고, 당시 여성 작가들은 남성 작가의 두 배 이상 노력해야 인정받는 분위기도 있었으니 그런 것에 대한 저항 정신이 생겼죠. 전 시대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을 해야 된다는. 나는 내 고유한 것들을 유지하면서 작업해도 할 게 너무 많은데, 기왕 그럴 거면 오색찬란한 걸로 다 하고 싶었어요. 한때는 그런 말도 했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하는데, 물냉면 고를 때는 비빔냉면과 갈등하다 고른다.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과 짬뽕 중 선택해야 하면 반씩 섞어달라’ 한다고. ‘내 그림도 그렇게 그리면 되겠네’ 하는 생각을 일찍부터 했어요. 다 들어갈 수 있는 그림. 내가 그리고 싶은 걸 그릴 때 그게 가장 강한 힘이 되고, 그게 가장 강한 자기만의 향수가 될 수 있어요.

작업 중인 작품들.

조은숙 아트앤라이프스타일 갤러리에서는 이명미 작가의 개인전 을 2024년 12월 28일까지 전시한다.

197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끊임 없이 개인전과 그룹전을 열며 새로운 작품을 그리고 계십니다. 지금 작업실 캔버스에도 여러 개의 작업이 진행 중인데, 바닥의 물감 자국을 보면 작가님의 치열한 창작열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는 있잖아. 눈 뜨면 제일 먼저 그림에 대한 생각들이 비몽사몽 떠올라요. 나이가 들수록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싶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어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작품도 많이 쌓이니까 이 작업실도 작게만 느껴져요. 나는 이런 방이 몇 개 더 있으면 돌아다니면서 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하나님이 나한테 제일 좋은 걸 주셨어요. 아이디어가 한 번도 궁한 적 없어. 2004년 위암으로 위 일부를 절제했거든요. 한 3~4년 전엔 안과를 생애 처음 갔더니 망막이 떨어지고 있다고, 이대로 두면 몇 년 내로 실명한다고 해서 그때 망막 붙이는 수술도 했어요. 이 화실 앞에서 미끄러져 팔이 부러져서 팔 수술도 받았는데, 사실 팔이나 위 수술보다 망막이 떨어진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가 더 충격이었어요. 실명이 되면 아무것도 못 하잖아요, 눈으로 확인해야 되는데. 앙리 마티스는 대장암으로 건강이 나빠지니 색종이를 오려서 콜라주 작업을 하기 시작했잖아요. 나는 그 자세는 돼 있어. 그래서 이제는 조수를 붙여야 되나 생각도 하고 있죠. 아이디어는 자꾸 나오는데, 내 작업 속도가 그걸 따라가지 못하니까요. 내가 해야 될 게 너무 많은 거야. 앞으로도 해야 될 게 너무 많아요.

작가님의 작업물을 보면 세상의 모난 점을 애써 모르는 척하지 않고, 그것까지 유쾌한 시선으로 포용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때로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가족이 먼저 세상 떠나는 걸 지켜봐야 했고, 인생 경험이 쌓일수록 역경도 많이 겪으셨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젊은 저보다도 따뜻하신 것 같습니다. 따뜻해. 왜냐하면 내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림을 그리면, 거기에 내 고통이라든지 아픔도 상쇄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림은 내가 숨는 장소이기도 해요. 내 가슴속에서 그 슬픔을 끄집어내고, 뚜렷이 볼 수 있게 되는 곳. 돌이켜 보면 내 부모님이 아주 맑은 사람이었고, 나하고 결혼한 애들 아빠도 아주 맑은 사람이었어. 살면서 주변에 많은 사람을 안 두는 편이기 때문에 맑은 사람만 택하고 그 사람들만 본 거 같아요. 그리고 나는 내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치유되기 바라면서도, 그걸 억지로 드러내거나 강요하고 싶진 않아요. 그러니까 그 슬픔을 배분하는 거죠. 캔버스 위에 그걸 표현하는 건 감정을 조절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자기 감정을 어느 선에서 표현하는 일종의 균형이 필요하기 때문에, 작가가 세계를 보는 세계관도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완전히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그럴 때는 이런 그림 못 그려요. 운동 선수들도 자기 몸 컨디션을 조절하듯이, 작가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컨디션을 만들어야지.

작가님 작업에 꽃이나 별, 혹은 생명력이 있는 물체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까요? 별이나 꽃은 추악한 것이 아니잖아요. 아름다운 것이고. 별은 결혼 전인 1970년대에도 그렸어요. 이 꽃이나 별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지, 무서운 건 아니잖아요. 또 작가로서 보면 리얼리즘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시점, 그 변화의 과정에서 디자인적으로 압축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세 번째 이유로는, 그리기가 쉬워요.(웃음).

회화부터 설치작품까지, 작가님의 작업에는 의자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1997년 작품 <그 곳으로 갈게>에서는 평면 캔버스 위 그림으로 나타났다면, 2013년 강정 대구현대미술제에서 선보인 의 의자는 캔버스 밖을 벗어나 거대한 조형물로 나타났죠. 이는 이후 <앉으시오>라는, 5m가량의 두 개 설치물로 디벨롭되어 대구미술관에 전시한 후 소장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조형물은 초등학교 시절 쓰던 의자를 배로 확대해서 만든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앉으라고 쓰여 있는데, 크기가 너무 커서 앉을 수 없지. 일종의 블랙 유머예요. 그런데 나중에 전시회가 끝나고 찾아가보니까 어떤 개구쟁이가 여길 올라갔더라고. 발자국이 찍혀 있었어요. 처음 전시하면서 원래는 평면으로 시작을 했다면, 이제는 전시 공간이 점점 거대해지고 확장하면서 작품도 점점 디벨롭된 거죠.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이 처음 작업한 1970년대 초기엔 드로잉으로 등장하다가 이제는 FRP 조형물로 진화한 것처럼, 제 작품 세계와 전시 공간이 확장하면서 표현 영역도 점점 넓어지고 있어요.

근 50년간 쉬지 않고 작업하셨는데, 그것보다 앞으로의 20년이 중요하다고 말하신 적 있죠. 내가 68학번이니 이 일을 한 50년 했는데, 나는 톨스토이나 푸시킨 같은, 산맥 같은 화가가 되고 싶어요. 우리가 문호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산맥 같은 글을 남긴 것처럼 설악산, 지리산 이런 거 말고 태백산맥 같은 산맥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 되려면 더 많은 걸 이뤄야 한다는 생각이 있죠. 아직까지는 이런 나를 보고 웃는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진짜 산맥을 꿈꾸려면 내가 20년을 더 열심히 해야 돼. 그냥 앞산이나 남산 이 정도로 끝나고 싶지는 않아. 일단 꿈은 커야 되잖아. 처음 그림을 시작한 젊을 때는 이런 생각을 안 했어요. 그냥 단순히 그림을 그리고 싶다에만 꽂혔다가, 육십이 넘어서부터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나는 산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대세를 따르지 않고, 개념이나 논리 대신 ‘미술이 곧 즐거움’이라는 철학 아래 감성과 직관에 의지해 작업하는 선생님의 삶 자체가 어쩌면 미술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초반엔 불교 미술 같은 다른 작업도 했지만, 1977년 첫 개인전 <놀이>를 하면서부터는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어요. 너무 확고하고 지금도 해야 될 게 너무 많아요. 나는 작가가 된 게 진짜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업실이, 캔버스가 완전히 제2의 창조 공간이잖아요. 여기서는 내가 새로운 창조를 할 수 있고, 조물주나 다름없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내가 그리는 우주를 만들 수 있어요. 내 작품들은 이명미가 만든 우주고, 내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어릴 때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이기도 해요. 이 우주에 내가 생각하는 도덕감, 선악에 대한 생각 등 모든 게 들어가는 거잖아. 내가 창조주가 돼서 할 수 있는 거고, 기쁠 때는 여기서 기쁨을 표현할 수도 있고, 슬플 때는 여기서 눈물도 말릴 수가 있는 큰 운동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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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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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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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

온기라고는 없을 것 같은 삭막한 도시 속, 세계의 사진가들이 포착한 따뜻한 순간. 2025년을 살아갈 우리 일상에도 따뜻함이 스미기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기록을 한데 모았다.

TOKYO, BARCELONA

       

아르헨티나 태생의 마티아스 갈레아노 Matias Galeano는 유년 시절을 독일, 네덜란드, 영국을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에서 보낸 뒤, 현재 16년째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건물의 대칭성, 미니멀리즘, 기하학적 균형에 매료되어 세계 전역의 도시에서 수천 개 건물 사진을 촬영했다.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평생 동안 많은 곳을 돌아다닌 만큼 어느 곳에서든 ‘자신만의 작은 마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에겐 각국 도시마다 단골 빵집과 술집, 카페 등이 있다. 대도시가 가진 혼란스러움과 삭막함에 억눌려 고립감을 느끼는 대신, 어디서든 친절하게 행동한다면 처음 도시를 방문했을 때 느낀 이질감은 어느 순간 먼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의 무한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100년은 더
머물며 거리의 구석구석을 탐험하고 싶은 마티아스. 그에겐 홍콩, 마카오, 도쿄 등 혼돈이 가득한 도시의 빠르게 변화하는 풍경을 포착하는 것 또한 또 다른 재미다. 전통과 현대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서울 방문 또한 달성하고 싶은 버킷리스트 중 하나다.

INSTAGRAM @boluddha

HONG KONG

   

로맹 자케 라그레즈 Romain Jacquet-Lagrèze는 홍콩에서 활동하는 파리 출신의 사진가다. 15년 전 홍콩으로 이주한 로맹은 건축물과 사람들의 사진을 기록하던 중,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이 도시와 사랑에 빠져 벌써 홍콩의 면면을 담은 포토북을 6권 출간했다. 특히 햇빛이 강하지 않은, 쾌적하고 화창한 겨울의 공원 풍경에서 왠지 모를 따뜻함을 느낀다. 홍콩이라서 가능한 겨울이겠지만 말이다. 로맹의 작업 중 하나인 ‘콘크리트 스토리즈 Concrete Stories’ 프로젝트는 개방적인 홍콩 가우룽 지역 옥상의 특색을 활용한 작업으로서, 운동하고 빨래 널고 식사를 하는 평범한 일상 속 진솔한 장면이 자아내는 독특한 아름다움에 이끌려 셔터를 누른 순간의 결과물이다. 자신의 작업 본질이 눈에 띄지 않는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데 있다고 믿는 그는 햇빛이 머문 공간, 그 안에 포착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몸짓과 행동을 기록해나가는 중이다.

INSTAGRAM @romainjacquetlagreze

BERLIN

   동독 시절의 국경선과 인접한 외곽 지역에서 태어난 마티아스 하이드리히 Matthias Heiderich는 2008년 베를린으로 이주한 후 도시만이 허락하는 익명성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다.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18년 동안 자라며, 이웃에게 감시받는 듯한 느낌이 싫었던 만큼 군중 속에 섞여 자신의 존재감이 흐릿해지는 베를린에서의 삶을 좋아한다. 기상 후 일과는 긴 산책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를 들고 걸으며 가능한 한 많은 사진을 찍으려 하는 그의 렌즈엔 빛과 색감이 도시에 조화롭게 녹아든 순간이 담긴다. 그 사진엔 우리 인생이 그렇듯 화려하고, 종종 미니멀하며,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전혀 유쾌하지 않은 모든 상황이 압축되어 있다. 지금은 주로 도시 건축물을 촬영하지만 언젠가는 남반구를 탐험하며 새로운 작업에 도전하고 싶다.

INSTAGRAM @matthiasheiderich

PARIS

   

파리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사진가 라파엘 메티벳 Raphael Metivet은 옥상, 숨겨진 거리, 고급 호텔과 레스토랑, 유명 관광지 등 파리의 다양한 장소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발견한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시대를 초월한 파리의 매력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 위해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는 그는 잊힌 골목, 상징적인 기념물 등 공간마다 가진 고유의 이야기가 있다고 믿는다. 건물 정면에 깃든 따뜻한 빛, 발코니에서 조용한 순간을 즐기는 누군가의 모습, 옥상에 길게 그림자가 드리운 모습 등 일상에서 존재감이 희미할 수도 있지만 큰 의미가 담긴 순간을 사랑하는 것 또한 그 때문이다. 라파엘에겐 번화한 대도시 속 작은 카페에서 일어나는 활기찬 대화, 추운 저녁 캐주얼한 식당에서 뿜어져나오는 안락한 불빛, 한적한 미술관에서 느낄 수 있는 평온함이 빠르게 흐르는 도시의 리듬 속에서도 따뜻함과 타인과의 연결고리를 잇는 ‘친밀 주머니’인 셈이다.

INSTAGRAM @raphaelmetivet

TOSCANA, FIRENZE, VENICE, PHUKET

     저명한 패션 매거진들과 꾸준히 협업해오고 있는 알렉스 갈미아누 Alex Gâlmeanu는 유명한 공인부터 거리의 행인까지, 다양한 사람의 독특한 이야기와 감정을 담아내는 루마니아 출신 사진가다. 왼쪽 사진들은 진정한 삶의 순간을 포착하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인위적으로 통제하지 않는 ‘내가 본 모습 그대로(As I Found It)’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여러 디테일을 계산하고 만들어내는 스튜디오 사진과는 정반대의 환경에서 촬영했다. 모든 형태의 삶을 사랑하는 그는 이를 모두 관찰하고 기록하기 위해 매일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삶의 여러 측면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대도시에서의 삶을 사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과 그 안에 담긴 삶의 이야기를 겸손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모든 사진가에게 부여된 일종의 ‘의무’라 믿는다.

INSTAGRAM @alexgalmea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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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로운 예술적 감각이 깨어나는 곳. 프랑스 럭셔리 서적 브랜드 애술린의 세계로 초대한다.

애술린을 대표하는 레드 컬러와 디도트 프린트 카펫으로 꾸며진 애술린 코리아.

책을 펼쳤을 때 세상이 변하는 감각적인 순간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책을 넘어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예술 작품처럼 느껴지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는 곳, 바로 프랑스 럭셔리 서적 브랜드 애술린 Assouline이 만들어내는 세계다. 1994년 파리에서 프로스퍼 Prosper와 마틴 Martine 애술린 부부가 시작한 이 브랜드는 출판뿐만 아니라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큐레이션하는 역할을 해왔다. 미술, 건축, 패션, 여행 등 다채로운 주제를 다루는 애술린의 책은 독자가 손끝으로 느끼고 눈으로 감상하며 감각적으로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애술린의 이야기는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애술린의 첫 번째 출간물인 <라 콜롬브 디오르 La Colombe d’Or>는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독특한 호텔을 주제로 한다. 이 호텔은 피카소, 마티스, 샤갈 등 예술가들이 머물며 작업을 하거나 작품을 남긴 곳으로, 호텔 자체가 마치 작은 미술관처럼 느껴지는 공간이다. 애술린 부부는 이곳에서 느낀 아름다운 경험과 예술적 영감을 바탕으로 책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프로스퍼가 촬영한 사진과 마틴의 글이 어우러져 탄생한 이 책은 1994년 출간 직후 큰 반향을 일으키며 애술린의 철학을 세상에 알렸다. 책은 단순히 정보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한 시대의 감각과 문화를 담아내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패션, 와인, 시계 등 다양한 전문 서적을 만나볼 수 있다.

세계 각국을 여행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트레블 시리즈 책.

이러한 독특한 감각과 철학은 한국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애술린이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 문을 연 것은 12년 전이다. 당시 애술린은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는 책의 역할을 넘어, 하나의 문화적 오브제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안하며 한국 시장에서 그 철학을 꾸준히 전해왔다. 10년 넘게 도산공원에서 자리를 지켜온 애술린은, 최근 압구정으로 확장 이전하며 또 하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전 공간이 럭셔리한 화려함을 강조했다면, 새로운 압구정 공간은 따뜻하고 이국적인 빈티지 느낌으로서 방문객들이 더욱 풍성하게 몰입할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하려고 했습니다.” 새 공간에 대해 애술린 코리아의 유제인 부사장이 말했다. 브랜드의 상징적인 컬러와 디테일이 어우러진 이 부티크는 마치 프랑스의 오래된 서재에 초대된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특히 메인 공간에서 눈길을 끄는 ‘더 울티메이트 월 The Ultimate Wall’은 애술린의 대표 타이틀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인데, 방문객이 책을 통해 애술린의 철학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게 배치되었다. 애술린이 만드는 책은 도서 그 이상이다. 한 예로, 와인을 주제로 한 <더 임파서블 컬렉션 오브 와인 The Impossible Collection of Wine>은 실제 오크통 조각으로 제작된 커버를 통해 독자들에게 와인 저장고에 들어온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이처럼 책 내용뿐 아니라 촉감과 시각, 심지어 향까지 자극하는 디테일이 바로 애술린만의 차별점이다. 애술린은 책에 담긴 메시지가 독자의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도록 노력하며, 이를 위해 다양한 제품군을 함께 선보이고 있다. 여행 시리즈 책과 같은 도시의 향을 담은 캔들 컬렉션을 출시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책을 읽으며 떠오른 감성을 향기로 연결하는 순간, 독자는 애술린이 제안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온전히 경험하게 된다. 또 한 가지 새로운 소식은 시그니엘 호텔 79층 라운지에서 애술린을 만나볼 수 있게 된 것. 애술린 코리아 부사장은 “시그니엘 호텔 라운지에 위치한 애술린은 고객이 책과 함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고객은 책 구매뿐 아니라 공간과 어우러진 독서 경험을 통해 브랜드의 정수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애술린은 앞으로 더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독자와 소통할 계획이다. “2025년에는 북 컬처 클럽을 통해 고객들과 함께 따뜻한 문화적 트렌드를 공유하며 애술린의 가치를 더욱 친근하게 전할 계획입니다.” 애술린은 책을 매개로 독자와 감각적인 대화를 이어가며, 이를 통해 우리 일상에 새로운 깊이를 더한다. 한 권의 책이 공간을 채우고 감각을 일깨우며 삶의 순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브랜드. 그들의 여정은 독자들에게 더욱 풍요롭고 아름다운 라이프스타일을 선사하기 위해 계속된다.

매장 뒤편에 마련된 독립된 작은 서재 공간.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한 장 한 장 책 속에 담긴 유익한 정보만큼이나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누군가의 집에 온 듯 따스한 외관이 돋보이는 애술린.

ADD 서울시 강남구 언주로 165길 14 INSTAGRAM @assoulinekorea

The Impossible Collection of Wine(Ultimate Collection)

세계적인 소믈리에 엔리코 베르나르도 Enrico Bernardo가 20세기 최고의 와인들을 큐레이션한 책이다. 1928년 크루그 KRUG 샴페인부터 1973년 스태그스 립 Stag’s Leap까지 각 빈티지의 이야기가 우아한 시처럼 펼쳐진다. 수작업으로 제작되어 그 자체로도 예술 작품 같으며, 와인 입문자에게 와인이 단순 음료가 아니라 시간과 열정이 담긴 예술이라는 걸 일깨워준다.

 

The Impossible Collection of Art(2nd Edition)

필립 세갈토 Philippe Ségalot와 프랭크 지라드 Franck Giraud가 큐레이션한 100개의 현대미술 작품으로서, 마치 한 손에 미술관을 소유한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두 번째 에디션에는 새롭게 추가된 11개 작품이 매 페이지를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준다. 현대미술의 정수를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이 최고의 선택이다.

Travel Series, Provence Glory

맑고 푸른 칼랑크 해변에서 수영을 즐기고, 라벤더 들판을 가로지르는 드라이브를 떠나며 프로방스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만끽해보자. 프로방스의 칼랑크 해변과 라벤더 들판 그리고 중세 성채와 로마 유적까지, 이 책은 프랑스 남부의 모든 매력을 한눈에 담았다. 라벤더 향이 코끝을 스칠 때마다 이 책을 읽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Federer(Classic)

테니스 전설 로저 페더러 Roger Federer의 삶과 감성을 한눈에 담은 책이다. 그의 아내 미르카가 참여해 더욱 진솔하고 특별하게 완성된 이 책은 미공개 사진과 손글씨 메모로 가득하다. 페더러의 진정성과 감동적인 순간이 한 권의 책 안에 생생히 담겨 있다.

 Wine & Travel France

세계 최고의 소믈리에 엔리코 베르나르도가 프랑스의 와인 지역과 숨은 보석 같은 장소들을 탐구한 책이다. 샴페인부터 알자스까지 프랑스 와인의 중심지를 깊이 있게 소개하며, 여행과 와인의 완벽한 조화를 보여준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프랑스 와인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것이다.

Eternally Ritz

시저 리츠 César Ritz가 설립한 리츠 파리는 단순한 호텔 그 이상이다. 코코 샤넬, 어니스트 허밍웨이 같은 거장들이 사랑했던 곳으로서 그 우아함과 영광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언젠가 파리의 리츠 호텔 앞을 지나게 된다면, 이 책을 읽은 순간의 감동이 자연스레 떠오를 것이다. 전통과 현대적 감각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리츠의 매력을 느껴보기 바란다.

Ken Fulk: The Movie in My Mind

전 세계에서 가장 매혹적인 공간을 창조한 디자이너 켄 플룩 Ken Fulk의 독창적 세계를 담은 책이다. 그의 작업은 집과 호텔에서 비행기와 이벤트까지 확장되며, 아름다운 사진과 섬세한 스토리는 단순히 공간을 넘어 예술로 다가온다. 그의 작업은 ‘공간도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CREDIT

에디터

포토그래퍼

이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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