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문화, 삶과 죽음, 장애와 비장애 사이의 것들. 샤넬 컬처펀드의 후원으로 진행된 리움미술관의 <사이 어딘가에>는 이분법적 규범의 경계 사이에 펼쳐지는 다채로운 가능성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세실리아 벵골레아의 댄스 퍼포먼스.
현대 추상회화의 선구자 파울 클레는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것”이라 했다. 그에게 있어 예술의 역할은 추상적인 감정과 생각을 형상화하고, 비물질적인 요소를 표현하는 창인 동시에 현실 너머의 상상력을 확장하는 데 있었으리라. 2024년 11월 리움미술관의 아이디어 뮤지엄 <사이 어딘가에>에서 진행한 다수의 세션에 참가한 뒤 파울 클레의 말을 문득 떠올리게 된 것은, 지금까지 크게 와 닿지 않던 이 문장의 뜻을 조금 다르게 해석하게 되면서였다. ‘예술은 관람자의 내면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매개체이자, 그 사이의 것들을 볼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창구가 될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머리로만 이해하던 이 말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예술 덕분이었다.

폴 B. 프레시아도,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 스틸 이미지, 2023. 작가 및 더파티필름세일즈 제공.

강연 <소리의 조율>을 진행 중인 필리파 라모스.
시야에서 벗어난 것, 보고 싶지 않은 것, 존재감이 희미해 가끔 거기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것. 모두 파울 클레가 말한 ‘보이지 않는 것’에 해당하는 동시에 이분법적 규범의 경계에 존재하는 요소들이다. 2023년부터 샤넬 컬처 펀드의 후원으로 진행 중인 아이디어 뮤지엄의 두 번째 프로젝트 <사이 어딘가에>는 그 이분법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조강연으로 그 시작을 알린 김혜순 시인은 이 ‘사이’를 설명하기 위해 ‘드물 희(稀)’ 자를 썼다. ‘희미한’, ‘희끄무레한’, ‘희박한’, ‘희한한’ 등의 단어에 쓰이는 한자다. “보이지 않는, 희박한, 그러나 보려고 하면 보일 수도 있는 것.” ‘사이’는 연대의 가능성을 품는 공간인 동시에, ‘사이’를 응시하는 일은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예술가가 거쳐야 하는 일종의 투쟁이 된다. 강연은 김혜순 시인이 2022년 출간한 시집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에 실린 마지막 시, ‘시인의 장소’의 낭독으로 마무리됐다.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에 네가 있다/ 사라짐과 사라지지 않음 사이/ 의식과 일상 사이/ 페이지를 보지 않고 페이지의 날을 본다. (중략) 나는 저기서는 이름이 있는데, 여기서는 이름이 없는 사람/ 한국어밖에 할 줄 모르는 흰 기린이 앞장과 뒷장 사이에서 운다.” <사이 어딘가에> 개최 이전 발표된 시가 마치 이날의 강연을 위해 쓰인 듯 ‘사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인으로서, 창작자로서 김혜순 시인이 이를 오래 응시해온 덕일 것이다. 강연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질의응답 시간에 한 관객이 전한 인사였다.

강연 <비판적 에코페미니즘: 인간중심주의에서 다종 번영으로>을 마친 후 질의응답을 받고 있는 그레타 가드.

우 창, <모비 딕, 혹은 고래> 스틸 이미지, 2022. 취리히 샤우슈필하우스 제작.
“김혜순 선생님의 책을 아주 오랫동안 읽어왔는데, 그럼에도 선생님이 하는 말을 따라가기 너무 힘들어서 우리 사이에 거리가 생겼습니다. 그 거리가 처음에는, 아주 가까웠다가 점점 멀어져서 마치 태평양처럼 멀어졌습니다.” 고백하건대 나 또한 1시간40분가량 진행된 강연에서 모든 부분을 따라갈 수 없던 터라 김혜순 시인의 강연은 일부 관객과 그의 사이에 거리를 만든 동시에, 관객과 관객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역할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사이’로 돌아와서, 스크리닝으로 시청한 폴 B. 프레시아도의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엔 25명의 트랜스 및 논바이너리 ‘올란도’가 등장해 각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영화는 트랜스젠더를 소재로 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올란도>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올란도>와 버지니아 울프에게 바치는 일종의 연서이기도 하다.) 영화 속 한 올란도는 얘기한다. 정체성을 부정당하면 사회에서 지워진다고. 또 다른 올란도는 말한다. 성별 구분의 논법은 현대사회의 발명품이고, 수술대에 올라가야 할 건 트랜스 수술을 겪는 개인이 아닌 정치의 역사이자 몸과 성별을 구분하는 체제들이라고.
올란도들은 여성과 남성으로 나뉘는 이분법적 성별 체제에 대해 질문을 던졌지만, 이는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문화, 삶과 죽음, 장애와 비장애 등 모든 고착화된 이분법적 경계로 확장될 수 있는 문제다. 열흘 간 진행된 19개의 강연, 퍼포먼스, 스크리닝, 토크는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에 대해 다뤘다. 예술의 역할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것이라면, 미술관의 역할은 그것들이 보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 믿는다. 리움미술관이 계속해서 포용성과 다양성, 평등과 접근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 속 올란도들은 성별과 국적으로 분류되는 대신, ‘논바이너리 지구 시민’으로서 여권을 부여받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논바이너리 지구 시민’들의 시대가 지금 당장 도래하기 어려운 유토피아라도, 전통적 구분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다른 존재와의 공존과 연대를 도모한다면 언젠가는 미래의 이들이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올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폴 B. 프레시아도가 버지니아 울프에게 그랬던 것처럼.

시인 김혜순이 기조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자료제공: 리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