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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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

재료와 물성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회화의 지평을 넓혀온 작가 하종현의 작품 세계.

〈접합 74-98〉, 1974, 마포에 유채, 225 × 9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자화상〉, 1959, 캔버스에 유채, 63 × 40cm.

〈도시계획백서 67〉, 1967, 캔버스에 유채, 112 × 112cm.

시대의 무게에 맞서고, 끊임없이 회화의 지평을 넓혀온 작가 하종현. 자신만의 실험적인 방식으로 전쟁이 남긴 상흔, 도시화와 경제 성장, 언론 탄압 등 변화하는 한국의 시대상을 작품에 반영해온 그의 작품 세계의 시작엔 앵포르멜 Informel의 영향이 있었다. 정형화된 회화의 틀을 깨고 물질성을 강조했던 앵포르멜은 하종현이 작품 활동을 시작한 1950년대 후반 유럽에 등장해 예술계에 큰 변화를 야기했고, 작가 또한 이에 대한 반향으로 두꺼운 물감과 불에 그을린 표면, 어두운 색조를 활용해 전쟁과 사회적 혼란이 남긴 집단적 기억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한 때인 1959년 그린 <자화상> 또한 당시 표현기법이 잘 녹아있는 작품 중 하나다.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며 다시 한 번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큰 격변을 겪은 70년대의 한국부터 오늘날까지, 하종현은 계속해서 재료와 물질성에 대한 실험을 이어가며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해왔다.

〈대위(對位)〉, 1971(2012년 재제작), 신문, 종이, 91.5 ×111.5 × 80cm.

〈무제 B〉, 1965, 캔버스에 유채, 콜라주, 145.5 ×11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하종현의 앵포르멜 작업부터 초기 단색화 작업까지, 작가의 초기 실험정신과 물질적 탐구의 여정을 조명하는 전시 <하종현 5975>가 아트선재센터에서 진행중이다. 전시는 1959년부터 1975년까지 격동적인 한국 사회의 변화 속에서 탄생한 40여 점의 초기 작업을 다룬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인한 급격한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을 추상화한 <도시계획백서> 연작과 군사정권 시대의 언론검열, 사회적 억압을 은유적으로 드러낸 〈대위(對位)〉 등. 작가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도 회화의 영역을 확장하는 실험정신을 놓지 않았다. 전시의 ‘4부: 접합-배압법’은 특히 실험정신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 탄생한 작가의 <접합> 연작을 조명한다. 마대자루를 캔버스로 사용하여 그 뒤에 물감을 듬뿍 바른 후 커다란 나무주걱으로 밀어내는 ‘배압법’은 그의 독창적 기법 중 하나인데, 2010년부터는 <이후접합> 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며 오늘날까지 하종현의 작업 세계를 대표하고 있다. 단순히 단색화 하나로만 기억되기에는 그가 한국 현대미술사에 남긴 업적이 너무 많다. 스프링과 철조망, 심지어 휴지까지, 재료와 물성을 가리지 않고 시대 속에서 변화하고 성장해온 작가 하종현. 그의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담은 <하종현 5975>는 아트선재센터에서 오는 4월 20일까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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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son of Renew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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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결심이 흐트러지기 좋은 3월, 작가와 출판업계 종사자들에게 몸과 마음을 재정비할 때
읽기 좋은 책을 물었다. 우리의 신년 계획에 안부를 전하며.

≪등산 시렁≫ 윤성중
새해에는 좀 움직이고자 했다. 러닝이나 PT도 좋지만 등산이 맞을 것 같았다. 건강도 챙기고, 높은 데서 좋은 공기도 마시고, 멋진 경광도 즐기고. 그러나 보기 좋게 실패했다. 요즘 같은시기에 등산이나 가자 그러면 지나치게 실없거나 무척이나 한가한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시국 때문일 수도 있고, 미세먼지 탓일 수도 있다. 심지어 오랫동안 등산을 싫어했고, 누군가 산에 가자고 하면 산 아래 백숙집에 가 있을 테니 다녀오라 손짓하던 나였다. 그런 이들에게 이 책의 제목 ‘등산 시렁’은 의미심장하다. 일단 싫어해도 된다고 말하니까. 책은 고결하고 진지한 산행 이야기는 아니다. 친숙하고 엉뚱한 등산 일기라고 할 수 있다. ≪등산 시렁≫을 다 읽고 나니, 다시 산에 갈 결심을 하게 된다. 세상의 근심 걱정 잠시 내려놓고 싶다. 산에서라면 가능하다고, 이 책은 말한다. 서효인 시인, 출판사 ‘안온북스’ 대표 INSTAGRAM @anonbooks_publishing

≪간소한 삶에 관한 작은 책≫ 진민영먹다 반쯤 남은 물병, 자전거 여행에 썼던 모자, 택배를 보내고 남은 영수증, 지인에게 선물받은 그림 액자, 출판사에서 보낸 지난 책들. 계절과 시간의 순서와 상관없이 혼재된 물건들이 책상과 책장에 이끼처럼 켜켜이 눌러앉은 모습을 보자면 그저 한숨만 난다. 올해는 꼭 책장을 비우고 정리된 서가를 바탕으로 차근차근 일의 순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어지럽게 잔뜩 쌓인 물건들이 눈에 밟힌다. 내 공간의 상태는 내 마음과 같다고 했다. 간결한 마음으로 살고 싶다면 결국 하나씩 비워야만 한다. 그렇게 꾸준히 자신을 덜어낼 때 내가 바라는 삶이 된다. 박성민, 서점 ‘프루스트의 서재’ 대표 INSTAGRAM @library_of_proust

≪아주 작은 습관의 힘≫ 제임스 클리어
나를 건사하며 살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수시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한 번 태어나 어떻게든 스스로를 건사하다 죽어야 하는 삶이다 보니, 새해가 되면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는 기분에 습관 책을 다시 꺼내 든다. ≪아주 작은 습관의 힘≫도 자주 꺼내 보는 책인데, ‘일상의 시스템을 만들고, 일은 잘게 쪼갠다’는 대원칙은 습관 형성에 관한 거의 모든 책이 하는 말이지만 읽을 때마다 새삼스럽다. 잘 못 지켜서 또 읽는 거니까. 그래도 반복해 읽는 이유는, 주기적으로 나사를 조이기 위해서다. 언젠간 할 수 있겠지, 언젠간 되겠지, 이번이 아니면 다음에는 제대로 살아볼 수 있을지도. 어쨌든 하나부터, 하루부터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아주 작은 습관부터.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은 좋은 습관을 기르고 싶은 사람에게 권한다. 당신은 부디 나 같은 재독의 늪에 빠지지 않기를. 이다혜 작가, ≪출근길의 주문≫ 저자 INSTAGRAM @alicante

≪저속노화 식사법≫ 정희원
좋은 것을 더하는 것보다 나쁜 것을 빼는 게 실행하기에는 더 쉽다. 단순당, 정제 곡물, 붉은 고기를 식탁에서 빼는 것이 관건인 ‘저속노화 식사법’으로 손쉽게 식단 관리를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저속노화 식사법≫은 트위터를 뜨겁게 달군 ‘저속노화 선생님(@DrEcsta)’, 정희원 노년내과 의사의 저속노화 식사법 A to Z를 담은 책이다. 저자는 ‘건강한 식단’에 대한 맹목적인 지침과 잘못 알려진 정보를 바로잡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 쉬운 저속노화 식사법을 제안한다. 또한 한 주일 간의 저속노화 식단과 레시피를 실어, 노화를 늦춰주는 간편한 상차림을 쉽게 따라 해볼 수 있다. 한 끼 건강이 백 년 건강을 결정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 ≪저속노화 식사법≫과 함께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3월을 시작해보자. 전민지, 출판사 ‘문학동네’ 편집자 INSTAGRAM@munhakdongne

≪와비사비: 그저 여기에≫
레너드 코렌 저, 박정훈 역 “와비사비는 불완전하고 비영속적이며 미완성된 것들의 아름다움, 소박하고 수수하며 관습에 매이지 않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일컫는다. 더불어 마음의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려 애쓰며, 우리 자신을 포함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멸해가는 것들을 돌아보려 마음 쓰는 삶의 태도를 뜻하기도 한다.” 와비사비 철학을 통해 진정한 아름다움의 의미를 깊이 새기면서 마냥 흘러가는 지금 시대를, 그리고 쫓기듯 어딘가로 향하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다면 무엇이 눈에 맺힐까. 이 책을 읽는 동안 이러한 시선을, 어쩌면 우리가 잠시 잊어버린 따스한 눈길을 다시금 지필 수 있기를 바란다. 박선형 번역가, 서점 ‘번역가의 서재’ 대표 INSTAGRAM @tlbseoul

≪나를 살린 문장, 내가 살린 문장≫ 편성준
새해에는 으레 결심한다. 운동을 하자, 소원해진 친구에게 연락하자, 술과 담배를 끊자, 취미생활을 제대로 해보자 등 다양한 결심이 앞다투어 튀어나온다. 편성준의 ≪나를 살린 문장, 내가 살린 문장≫을 읽고 한 가지가 추가되었다. “나만의 문장을 찾자.” 생의 곳곳에서 그를 보듬고 어루만져 준 문장들 속을 유영하다 그중 내게 꼭 맞는 문장을 필사하면 그날이 꼭 새날 같다. 새날에는 새 날개를 펼치듯 기지개를 켜야지,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야지, 나를 살리고 내가 살린 것을 사랑해야지 굳게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오은 시인, ≪초록을 입고≫ 저자 INSTAGRAM @flaneur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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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흐르는 차실

음악이 흐르는 차실

음악이 흐르는 차실

차와 음악, 그리고 공간이 만들어내는 조용한 울림이 일상의 틈을 메운다.

오랜 시간 쌓아온 조은숙 대표의 감각이 머무는 이곳에서, 소리는 삶을 채우는 한 조각이 된다.

카레 클린트의 올 블랙 ‘KK47510 더 레드 체어 The Red Chair’, 박성철 작가의 옻칠 테이블, 플로스의 스트링 펜던트 조명이 어우러진 차실. 찻장을 촬영한 사진은 박찬우 작가의 작품.

데논의 CD 플레이어 DN – 951FA와 DB 테크놀로지 Technologies의 4496 컨버터.

 

집은 단순히 거처를 넘어, 삶의 취향과 태도를 담는 공간이다. 감도 높은 안목으로 조은숙아트앤라이프스타일 갤러리를 이끌고 있는 조은숙 대표의 집 한쪽에는 오디오가 놓인 차실이 있다. 소리와 취향이 공명하는 이 공간에서 그녀는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때로는 책을 읽으며 사색의 시간을 갖는다. 조은숙 대표에게 음악은 배경음을 넘어 취향의 한 조각인 셈이다. “음악은 듣기만 한다고 아는 게 아니에요. 차도 마찬가지죠. 많이 마셔봐야 차를 알고, 음악도 계속 들어야 그 깊이가 느껴지기 마련이에요.” 그녀의 말처럼, 이 공간은 청음실으로서 존재한다기보다는 감각을 키우고 취향을 확장하는 시간이 쌓이는 곳이다. 그녀에게 차와 음악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오랜 시간을 들여야 진가를 알 수 있다는 것. “음악이든 차든 절대 금방 알아지는 게 아니에요. 시간이 필요하고, 경험이 쌓여야 비로소 내 것이 돼요.” 조은숙 대표는 차 마시는 행위를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라 말한다. 차를 우려내고 찻잔을 들어 올리는 순간에도 생각이 정리되고 긴장이 풀어진다. 그런 시간 속에서 음악이 더해지면, 공간은 더욱 깊어진다.

자이스 이콘의 시네마 튜브 앰프 도미날 Dominar – L Typ 32-02/11.

조은숙 대표는 이곳에서 종종 차와 함께 심적 안정을 취하는 시간을 갖는다.

화려함보다는 단정한 디자인과 깊이 있는 소리를 중심으로 선택한 오디오는 빈티지 자이스 이콘 Zeiss Ikon의 Ikovox D Typ 31-15/1이다. 1926년 독일에서 설립된 자이스 이콘은 정밀 광학과 기계 공학을 기반으로 한 카메라와 오디오 기기를 제작했으며, 특히 20세기 중반에는 고품질 의 라디오와 스피커를 생산하며 명성을 쌓았다. 조은숙 대표가 선택한 이 빈티지 오디오는 화려한 장식 없이도 묵직한 존재감을 지닌다. 공간 속에서 시간을 축적하고 감각을 확장시키는 매개체가 되는 것. “나는 돈 냄새 나는 것을 싫어해요. 너무 화려한 것보다는 차분하고, 묵직한 것. 그래서 블랙과 매트한 디자인을 좋아해요.” 실제로 드레스룸을 들여다보니, 놀라울 정도로 모든 옷이 블랙이었다. 그녀의 오랜 취향이 하나의 철학처럼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음악은 초보자라도 자꾸 듣다 보면 들리는 거예요. 글도 많이 읽어야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것처럼, 음악도 마찬가지죠.” 기기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듣는 사람의 감각이라고 조은숙 대표는 강조했다. 사실 처음부터 이곳이 차실로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음악을 듣는 공간 정도로 생각했는데,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게 되고 음반을 모으게 되면서 차와 음악이 함께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렇게 이 공간은 시간이 지나며 조은숙 대표의 취향에 맞춰 진화했다. 이곳에서는 그녀가 사랑하는 클래식과 재즈가 흐른다. 특별한 순간에만 음악을 듣는 것은 아니다. “음반 하나 듣는 데도 에너지가 필요해요. 그래서 늘 틀어두는 건 아니고 시간이 날 때나 저녁에 여유가 있을 때 틀어요.” 가끔은 다니엘 바렌보임의 연주처럼 편안한 곡을, 때로는 마음을 집중하게 만드는 클래식을 듣는다. “클래식은 듣다 보면 감정이 휘몰아쳐요. 그래서 더 몰입하게 되고, 함께 기쁘고, 함께 슬퍼지는 경험을 하게 돼요.”

그동안 사 모은 CD들이 빼곡히 들어 있다.

이곳에는 갤러리에서 전시했던 테이블이 놓여 있고, 작가들의 작품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꼭 필요해서 들였다기보다는 마음이 가는 것을 하나둘 놓다 보니 자연스럽게 완성됐다. “저는 취향을 ‘공부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음악도, 차도, 공간도 계속해서 배워가는 중이에요. 취미가 생활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죠. 그냥 듣고 마시는 게 아니라, 내 취향이 점점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차와 음악을 즐기는 시간은 정말 소중해요.” 이 공간은 앞으로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며 차츰 변해갈 것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좋은 것들을 오래 곁에 두고 천천히 즐기는 태도’일 것이다. “나는 오디오 마니아는 아니에요. 그냥 내가 즐길 수 있으면 된 거죠.” 조은숙 대표의 말처럼, 음악과 차, 그리고 공간은 그렇게 그녀의 취향 속에서 조용히 흘러가고 있다.

덴스크에서 구입한 흔들의자와 달항아리 작품, 한지로 마감한 슬라이딩 창문에서 동양적 미감이 느껴진다.

벽에 걸린 회화는 김근종 작가의 작품.

조은숙 대표가 가장 애정하는 미국 가수 엘라 피츠제럴드의 음반과 미 부에노스 아이레스 큐에리도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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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그래퍼

임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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