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의 오랜 주택이 우손 갤러리 서울의 전시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리노베이션을 책임진 건축가 김세진 대표와 인테리어 소장 정지욱 대표의 이야기.

막혔던 벽을 뚫고, 유리를 활용해 1, 2층이 하나처럼 보이게끔 만든 우손 갤러리 서울의 전시 공간.

우손 갤러리 서울의 외관. 기존 벽돌과 새 벽돌 사이의 이질감은 시간이 갈수록 중화될 것이다.
성북동 조용한 주택가 골목을 거닐다 보면 지난해 말 서울에 새롭게 둥지를 튼 우손갤러리가 차분하고도 장엄한 모습으로 찾아온 이들을 반긴다. 겉으로 보기엔 영락없는 주택처럼 보이는 이 붉은 벽돌 건물의 내부로 들어서면 전혀 다른 화이트큐브 공간이 펼쳐진다. 과거 베네수엘라 관저였던 건물의 외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내부엔 전혀 다른 풍경을 연출하고자 한 지요건축사사무소 김세진 대표(건축 설계 담당)와 그루 스튜디오 정지욱 대표(인테리어 담당)의 숙고 끝에 탄생한 결과물이다. 처음부터 건물이 풍기는 무게감과 역사를 변형할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않았다. 박공지붕만이 가진 매력적인 경사면, 덩어리의 물성, 시간이 가진 힘. 이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김세진 대표는 건물의 매스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주택이 가지고 있던 창들을 메우며 기존의 벽돌과 비슷한 크기와 색의 벽돌들을 조합해 텍스처와 컬러감을 구현했다. 몇 차례씩 이를 재배치하고 줄눈을 맞춰가며 라인을 정리하기도 했다. 새롭게 지은 담장은 건물 세월의 흔적이 가진 내러티브를 확장하기 위해 코르텐 강판을 사용했다. 코르텐은 시간이 갈수록 자연스럽게 녹스는 소재인데, 오래된 벽돌이 가진 힘과 이질감이 들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이를 선택한 것이다.

박공지붕의 특징이 돋보이는 2층의 전시 공간.
“앞으로 10년, 20년, 30년이 지날수록 기존 벽돌과 새 벽돌 사이의 이질성은 점점 옅어질 것이고, 코르텐 담장과 벽돌 사이의 그것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이는 노출 콘크리트와 구로 철판으로 이루어진 대구 우손의 아이덴티티를 확장한 것이기도 하다. 이번 리노베이션의 가장 큰 숙제이자 목표는 건물이 풍기는 외부 이미지와 내부 공간 사이 전환되는 분위기. “결국 갤러리 밖의 세계와 안의 세계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언덕이 있는 주택 건물 안에 들어오면 작지만 강한, 또 다른 공간이 펼쳐지죠. 그 전환이 잘 이루어지면서도, 각자의 분위기가 잘 증폭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곳을 만들었어요. 겉에서 보면 왠지 내부가 우드로 꾸며져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막상 공간에 들어서면 흰색 벽면에 그레이 톤의 스톤 타일이 바닥에 깔려 있어요. 좀 더 현대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공간의 미니멀함이 느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바닥을 덮는 소재로는 콘크리트가 후보로 잠시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스톤 타일이 채택된 이유는 단 1cm의 두께 차이 때문이었다. “1cm인데, 이 1cm가 진짜 중요했어요. 워낙 층고가 낮은 건물이다 보니 조금이라도 그 단점을 최소화한 거예요.” 기존의 룸과 기둥을 다 헐었지만 내부에 새로운 기둥을 세우지 않았다. 대신 조적조로 시공된 건물 벽을 파 철골로 보강한 뒤 새로운 기둥을 세웠고, 천장의 노출 빔이 보이는 것을 택하기도 했다. 제한된 층고와 공간을 최대한 넓게 확장하고, 개방감을 선사하기 위해서다.

우손 갤러리 서울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유진 작가의 전시 전경. 박공지붕에 달린 바리솔 조명은 작품에 따라 색을 바꿀 수 있다.
“조금이라도 공간을 더 확보하기 위해서죠. 갤러리에서는 시선에 따른 거리감을 더 줄 수 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 거잖아요. 건축적으로 볼 때는 조적조로 설계된 것을 파내 철골조로 바꾸는 것이 중요했는데, 거기에서 멈추는 건 엔지니어의 일이죠. 건축가가 해야 되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했을 때, 기본적으로 공간이 어떻게 되면 좋겠는지에 대한 고민이 들어 기술적인 솔루션을 생각했어요.” 김세진 대표가 말했다. 복층 형태로 보이는 1, 2층 모습도 그 연장선으로 탄생한 결과물이다. “복층 구조처럼 보이는데, 사실 복층 구조는 아니죠. 막혔던 벽을 털어내고 유리를 활용해 공간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했습니다.” 현재 갤러리의 1층과 2층은 전시 공간으로, 지하 1층과 4층의 옥탑은 프라이빗 리셉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앞면이 뚫려 있던 주차 공간을 유리로 막아 ‘산 모양을 한, 하나의 반듯한 덩어리’의 모습을 연출한 것도 이들의 작업. 항상성을 가진 블랙 스테인리스 스틸로 1층 출입구와 지하 라운지를 분리하며 건축적인 디테일도 놓치지 않았다. 지하 1층과 4층을 장식한 가구들은 정지욱 대표가 직접 셀렉한 오리지널 빈티지 가구들이다. 시간의 흐름을 보존한 외관의 질감과 융화되면서도 모던한 특징을 가진 바닥과 벽, 천장과는 부드럽게 전환되는 느낌을 준다. 이는 모두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프로젝트와 금호미술관의 바우하우스 전시, 파리 메종 & 오브제의 한국관 전시 공간 등을 기획해온 정지욱 대표이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옥탑의 프라이빗한 공간을 장식한 1960년대의 빈티지 가구들.
대구의 대표 미술관 중 하나인 우손 갤러리가 서울로 지점을 이전한 건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즐겼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됐다. 이들이 바라는, 관객들에게 기억되었으면 하는 우손 서울의 이미지도 비슷하다. “단순하게 그림만 보는 공간이 아니라 정말 집 같은, 미술의 사랑방 같은 공간이 되어서 강의도 듣고,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해요. 실제 앞으로 이곳에서 아카데미 같은 강의도 이루어질 거라 들었어요. 10년 넘게 대구의 메이저 갤러리로 단단하게 존재해온 우손이 서울에서 이렇게 미술을 풀어가면, 시간이 지날수록 코어가 더 강해지는 이 벽돌처럼 갤러리도 더 굳건해지지 않을까 합니다.” 정지욱 대표가 말했다. 그리고 설계자 김세진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굳이 스펙터클한 경험이 아니어도, 이곳에서 본 그림이 집에서도 생각난다든지, 그 경험을 돌아봤을 때 ‘참 좋았어’, 이 정도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간을 갖고 있는 성북동 주택지의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라는 것도, 새롭게 짓는 기념비적인 작업보다 이런 느낌에 가까운 것 같아요. 건물은 이미 포스를 가지고 있었고, 그 나머지의 새로움은 이제 우손이 채워가는 거죠.”

지하 1층의 리셉션 공간을 채운 빈티지 가구들. 르 코르뷔지에, 폴 카도비우스 등 유명 디자이너들의 작업이다.
INTERVIEW
이유진 작가
우손 갤러리 서울에서는 4월 5일까지 이유진 작가의 전시 <Positive Sinking>이 개최되고 있다.

이유진 작가.
전시 이름이 언어 유희적인 동시에 중의적인 표현을 가지고 있다. 독일에서 22년을 생활하면서, 독일 사람들이 ‘th’가 들어간 ‘띵킹(thinking)’을 ‘싱킹’이라고 발음한다는 우스운 에피소드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생각에 잠기다’, ‘어딘가에 꽂혀 빠져 있다’는 표현을 보면 ‘잠긴다’라는 의미를 가진 ‘싱킹(sinking)’이라는 단어도 ‘띵킹’과 그렇게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 ‘가라앉음’이라는 단어가 내가 창작 활동을 하는 모양새와 너무 닮아 있기도 한데, 부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법한 단어 앞에 긍정적인 형용사를 쓰며 한 번 더 질문할 거리를 만들었다.
작업할 때 한지를 캔버스로 사용하거나, 도교 사상의 여백의 미를 이야기하다가도 서양의 유화나 아크릴 물감을 사용한 이유가 무엇인가? 나를 이해시키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나는 ‘메이드 인 코리아’인데, 예술과 함께하는 인생은 독일에서부터 시작했다 보니 이곳에서 나의 선은 어디일까 하는 고민과, 그 선위에서 줄타기하면서 개인적인 밸런스를 찾기 위한 과정이 하나의 그림에 담겨있다. 그 선과 경계라는 건 항상 유동적인데, 모서리 끝에 서 있을 때 가장 큰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그 불편함을 긍정적으로 취하면서도 훨씬 더 적나라하게 느끼고자 하는 마음을 회화에 풀어낸다. 내 전기적 측면이 예술적 측면에 영감을 주는 것도 이 경계 자체가 열려 있기를 추구하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Positive Sinking 전시 전경.
실제로 당신의 작품들을 보면 경계가 명확해 보이다가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의도한 것이다. 열린 경계를 만드는 것에 대해 많이 탐구한다. 그 표현법을 많이 시도하면서 새로운 경계들과 관계성, 그리고 그 사이의 것들에 대한 인식도 발전했다. 관객이 그림 속 경계를 보고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그건 내 영역이 아닌 게 되는 것이다. 작품은 나와 독립적으로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젤에 캔버스를 올리는 대신, 바닥에 두고 작업하는 것도 추상적인 표현과 연관 있는 것인가? 내가 그린 그림은 재현을 하는 게 아니다 보니 실제 모델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어릴 때 과일 장사를 하던 부모님 덕에 과일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머릿속으로 캡처해둔 과일 이미지들이 스케치북에 옮겨진 걸 보고 짜릿한 감정이 들었다. 아마 다음날 똑같은 사과를 그렸으면 그날만의 기분과 분위기를 반영한 또 다른 그림이 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그리다’라는 한국어 단어를 생각하다 보니 ‘그리워하다’는 표현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스쳐 지나가면서 보던 것을 그리워하며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