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연결

무한한 연결

무한한 연결

원형 고리를 연결해 독특한 조형과 가구를 만드는 방효빈 작가.

그녀는 조형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관계와 균형, 연결의 의미를 탐구하며 무한 연결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작업실 벽면에 걸린 신작 <화조도 키링 시리즈>. 가구는 왼쪽부터 ‘오링 스툴’, ‘오링 체어1’과 ‘오링 체어2’.

작은 3D 모형이 올려져 있는 작업실 창가.

작은 고리가 모이면 거대한 구조가 된다. 방효빈 작가는 원형 고리를 연결하며 가구와 조형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금속공예를 전공한 그녀는 어느 날 키링이나 주얼리에서 흔히 보이는 작은 오링 O-ring을 새롭게 바라보게 됐다. “고리의 굵기, 크기, 개수에 따라 구조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이후 고리를 단순한 연결이 아니라 구조 자체로 활용하는 방식에 몰두했다. 그의 작업은 이제 단순히 연결을 넘어 하나의 세계관을 구축하며 확장 중이다. 그 결과 의자, 조명, 테이블 등 다양한 가구로 확장된 독창적인 디자인이 탄생했다. “O-ring이라는 이름은 형태와 의미를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정했어요. ‘O’는 원형, ‘Ring’은 연결을 뜻하죠.” 그의 작품에서는 작은 연결이 모여 조형이 되고, 조형이 공간을 이루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고리를 확장한 독특한 조형 가구들을 선보이는 방효빈 작가.

가구뿐만 아니라 독특한 조형미를 담은 오브제 작업도 진행 중이다.

독특한 조형만큼이나 작업 과정도 놀이처럼 유쾌하게 진행된다. 고리를 이리저리 연결하고 구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마치 고리가 커진 게 아니라 자신의 몸이 작아져 그 안에서 노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고 말한다. “작은 고리를 연결하며 마음에 드는 구조가 나오면 3D 프로그램으로 옮겨요. 이후 크기와 굵기를 조정하면서 구조를 만들어가죠.” 하지만 단순히 형태만 고려하는 것은 아니다. “가구로 제작할 때는 힘이 받는 지점과 신체가 닿는 부분을 세심하게 조율해야 해요.” 그렇기에 하나의 고리를 원하는 각도로 맞추는 데만 몇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자신을 ‘조율사’라고 표현한다. 그녀는 고리 연결 방식을 사람 간의 관계와도 비교한다. “작은 원과 큰 원, 적절한 거리감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방식이 마치 인간 관계 같더라고요. 너무 가깝거나 멀면 균형이 깨지죠.” 그래서 그의 작품은 단순히 오브제를 넘어, 서로 연결된 존재의 조율 과정을 은유적으로 담아낸다. 최근에는 신작 <화조도 키링 시리즈>를 선보이며 작업에 변화를 주고 있다. 과거 타투이스트 경험을 살려 탐구했던 드로잉과 기존의 오링을 연결하며 시작되었다. 특히 민화의 화조도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새와 식물의 이미지를 자신만의 해석으로 표현해 보는 이들에게 행복과 평안을 기원하고자 한다. “요즘 많은 사람이 키링을 달고 다니는 모습이 마치 부적처럼 느껴지더라고요. 키링이라는 일상적 오브제를 확장해 벽에 걸 수 있는 대형 장식물로 확장했어요. 단순히 장식적 역할을 넘어 행복과 사랑, 평안을 기원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자 했습니다.” 앞으로도 기존 작업을 더욱 확장하며 작업관을 넓혀갈 계획이다. 특히 올해는 석사 청구전과 함께 그동안 목표로 삼은 야외 전시를 계획 중이다. 대지미술 스케일의 대형 연결 작업과 신체와 결합된 퍼포먼스 작업도 언젠가 꼭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더 넓은 세계로 이어질 그의 작업이 더욱 기대되는 순간이다.

작업실 전경. 창문 하단의 드로잉을 비롯해 직접 그린 스케치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SPECIAL GIFT
방효빈 작가에게 증정한 설화수의 윤조에센스 6세대는 피부 속 건조부터 모공, 주름 탄력까지 차오르는 윤빛 피부를 선사하며, 자음생크림은 피부 속 콜라겐을 생성 복구해 피부 자생력을 강화시켜준다. 각각 90mL 14만원, 50mL 27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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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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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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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과 실재의 경계

가상과 실재의 경계

가상과 실재의 경계

디지털 기술은 이제 단순히 도구를 넘어서 새로운 예술의 차원을 열고 있다.
컴퓨터 그래픽과 가상현실을 활용한 작품들을 통해 세 명의 디지털 아티스트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창작 세계를 펼쳐나가고 있다.

지갤러리에서 선보인 <따개비들 The Barnacles>, 2025.

‘두산아트랩 2024’에서 선보인 , 2024. 현재 동일 작품을 대만의 아시아 아트 비엔날레 그룹전에 선보이고 있다.

송예환 작가.

이스탄불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 Cascading Spiral.

The Whirlpool, 2025.

송예환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웹 아티스트. 전형적인 웹 인터페이스를 비틀어 풍자와 비판을 시도한다. 웹사이트, 퍼포먼스, 설치 작업을 통해 온라인과 물리적 공간을 연결하고, 사용자와 기기 간의 새로운 상호작용을 탐구하고 있다. <제24회 송은미술대상전>,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 2025>, 프리즈 뉴욕 등 국내외 주요 전시에 참여하며 주목받고 있다. INSTAGRAM @yehwan.yen.song

웹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미디어 아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디자이너로서 처음에는 사용자에게 긍정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점점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디자인이 최적화된다는 점에 회의감을 느꼈다.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자율적인 탐색을 제한하고, 점점 더 중독적인 인터넷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결국 디자이너로서 내가 하는 일이 이러한 구조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고, 이를 담론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문제제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궁금하다. 터치 스크린에 물을 뿌려 인터넷과 상호작용하거나 화면을 입으로 물어 인터렉션하는 작업들이다. 기술과 인터넷을 바라보는 방식을 다시 고민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기기를 있는 그대로 사용하되, 사용 방법을 바꾸어 우리가 그동안 정해진 매뉴얼과 습관화된 사용 방식에 얼마나 얽매여 있었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퍼포먼스 방식으로 작업을 풀어내게 된 계기도 궁금하다. 직접 출연하는 방식은 어떤 의미를 가지나? 나 또한 인터넷 사용자이고 알고리즘에 매번 휘둘리는 사람이니, 내가 직접 작업에 등장해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 이런 환경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 환경은 문제가 있으니 같이 해결해나가자는 메시지였다.
지난 1월, 지갤러리 G Gallery에서 개인전 <인터넷 따개비들>을 선보였다. <인터넷 따개비들>은 지금까지 ‘서퍼’로 비유되어온 인터넷 사용자들의 행동 양식에서 자유롭고 제약 없는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바위에 기대어 수동적으로 파도를 맞는 따개비 모습에 더 닮은 점에 착안해 제작하게 되었다.
디지털 기반의 작업이지만 오프라인 공간에서 입체적인 구조물을 활용한 점이 흥미로웠다. 특히 이번 작업은 스크린보다 설치에 좀 더 중심을 두었다. 디지털 환경에서는 규모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오프라인으로 가지고 올 때, 디지털에서는 표현되지 않던 규모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이번 작품은 각 면에 맺히는 영상보다는 그 영상이 군집 형태를 이루었을 때 보여지는 밀도와 규모에 더 집중하고자 했다.
구조물 소재로 마분지를 선택한 이유는? 인터넷을 표현하는 데 가볍고 일회용이며 저렴한 마분지가 재료로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소비주의적인 인터넷 환경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재료 아닐까? 또한 마분지를 일종의 조립형 모듈로 만들어 반복되는 패턴과 이동 가능성의 특징을 결합시켰다. 이 또한 인터넷의 여러 특성과 잘 맞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에서 ‘손’이 자주 등장한다. 주로 손을 이용해 인터넷을 사용하니까. 마치 화면을 터치하는 듯한 손가락 모습을 통해 보는 이들에게 인터넷에 대해 직접적으로 환기하고자 했다.
무한한 표현 가능성을 가진 디지털 환경에서 작업의 ‘완성’을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디지털 특히 인터넷 환경은 늘 끊임없이 바뀌는 환경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완성작을 만들기 어렵다. ‘완성작’이라는 용어가 인터넷 작업과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마치 흐르는 강물에 나뭇잎을 띄워 보낸다는 생각으로 작업하는데, 완성되어서 흘려 보내기보다는 때가 되면 보내는 느낌이 더 강하다.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주제나 방식은? 인터넷에 대한 조사와 담론을 계속 작업으로 표현해보려고 한다. 이전보다 깊이 있게, 인터넷의 역사와 그 과정에서의 불합리함 등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정확하면서도 흥미롭게 풀어내려고 많이 시도해보고 있다. 작품 형태보다는 다양한 리서치를 먼저 진행해보려 한다. 리서치 끝에 표현해보고 싶은 이야기가 정해지면, 그 내용과 어감에 따라 표현 방식을 새로 고민해볼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전시나 작업은? 현재 뉴욕의 파이오니어 웍스 Pioneer Works에서 개인전을 진행 중이며, 대만 타이중의 국립타이완미술관에서 2024 아시안 아트 비엔날레 그룹전에 참여하고 있다. 앞으로 열릴 국립현대미술관의 그룹전과 프리즈 뉴욕 아트 페어를 위한 작업을 준비 중이다.

Kiss, 2021, 120 × 100cm.

maro and me 02, 2024, 130 × 85cm.

Inaudibles 1-1, 2024, 20 × 13cm.

Inaudibles 04, 2024, 160 × 150 × 15cm.

람한
포토샵과 태블릿을 활용해 작업하는 디지털 페인터.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SM과 하이브 엔터테인먼트의 앨범 아트 작업으로 주목받았다. 애플, 구찌, 오프닝세레모니 등 글로벌 브랜드와 협업했으며,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부산 비엔날레, 갤러리 휘슬 등에서 전시를 진행했다. INSTAGRAM @ram__han

자신을 ‘디지털 페인터’라고 표현하는 게 인상적인데, 그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나? 디지털 페인팅은 단순히 디지털 툴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사용해 흔적을 남기는 행위다. 일반 회화처럼 물성을 지닌 재료는 없지만, 화면 위에 선을 긋고 색을 채우는 주체가 있다면 그것도 회화로 봐야 하지 않을까. 디지털 툴 역시 탐구하고 발전할 수 있으며, 고유한 질감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세밀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면서 느끼는 장점과 단점은? 대부분 디지털 툴은 간편하다고 생각한다. 물감이 마르는 시간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캔버스 틀을 일일이 만들지 않아도 되며, ‘실행 취소 Un-do’ 기능 덕분에 실수를 무한히 되돌릴 수도 있다. 과정 자체는 간편한 편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하지만 데이터 상태의 이미지를 현실 공간에 드러내게 되었을 때 어려움이 발생한다.
디지털 작업과 회화 작업의 가장 큰 차이점인 듯하다. 그렇다. 화면을 통해 보여지는 이미지와 출력된 이미지는 절대로 같을 수 없기에, 디지털 작업이 현실 공간에 존재할 이유가 빈약해 보일 수 있다. 단순 출력 이미지는 어딘가 공허하고 납작한 작업처럼 보이기 쉽기 때문에 오프라인에서 어떻게 보여줄지 늘 고민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간극을 조율할 때 중점을 두는 부분은? 여러 시행 착오를 거치며 다른 방식을 시도하는 중이다. 라이트 패널 형태의 전시도 그 시도의 일환이었다. 2년 전부터는 출력된 필름 위를 바늘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 물리적인 레이어를 추가하고 있다. 바늘로 긁힌 부분이 빛을 더 많이 투과하며 하이라이트처럼 반짝이는데, 디지털 작업을 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모니터 화면 속 미세한 픽셀의 깨짐이나 균열과 닮은 질감을 만든다.
무한한 표현 가능성을 가진 디지털 환경에서 작업의 ‘완성’을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디지털이든 회화든 완성의 기준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특히 디지털 작업은 선형적이지 않다. 언제든 수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완성까지 가는 길이 여러 갈래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서 작업 파일명이 항상 ‘최종_진짜_최종.PSD’ 같은 식이 된다. 결국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느낌이 화면에서 딱 느껴질 때를 완성의 기준으로 삼는다.
지난 1월, 갤러리 휘슬에서 개인전 <Inaudible Garden>을 선보였다. 이번 전시는 내가 무의식적으로 무엇을 그려왔고, 어떤 방식으로 이미지를 바라봤는지를 되짚어보는 마음으로 준비했다. 식물과 여성의 신체, 디지털 매체가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이 대상들을 디지털 이미지의 질감을 통해 현실 공간에 구현하는 것이 목표였다.

Bye Bye Meat, 2024, 150 × 200cm.

람한 작가.

Inaudibles 2, 2024, 17 × 23cm.

maro and me 01, 157 × 95cm.

Tulip_02, 2024, 150 × 95cm.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여성의 몸, 꽃, 식물 등의 요소를 사용하게 된 이유는?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반복적으로 그리며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진다. 그림에 등장할 때마다 위안받는 느낌이 든다. 특히 튤립처럼 통통하고 부피감 있는 식물을 자주 그리는데, 그릴 때마다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한다. 머리, 몸, 손이 있는 존재처럼 상상하며 식물을 의인화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도 이런 요소를 담은 작업들이 포함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전보다 더 추상적인 형태를 시도했다. 나를 스스로 ‘디지털 페인터’라고 소개하는 만큼, 디지털 드로잉이 가지는 회화적인 질감을 보여주고 싶었다. 구상적인 대상을 해체해 추상적인 표면을 입은 이미지를 만들었고, 질감적인 부분을 더욱 강조하려 했다.
작가 활동 외에도 다양한 커머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기억에 남는 협업이나 흥미로운 경험이 있다면? 일러스트 작업은 미술 작업보다는 제약이 많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스트레스가 적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을 상상하며 작업하는 과정이 환기가 되기도 해서 두 가지 형태의 일을 병행하는 것이 만족스럽다. 가장 흥미로운 순간이라면, 타협하지 않고 원하는 이미지들을 꾸준히 보여주다 보면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일들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작업이라도 반드시 원하는 대로 완성하고, 보는 이들을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올해 예정된 전시나 작업은? 애니메이션 작업에 집중할 계획이다. 원래 애니메이션 전공이기도 하고 간간이 작업해왔지만, 올해는 본격적으로 연구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단편적인 이미지로 세계관을 확장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직접 이야기를 쓰거나 다른 창작자의 스토리를 시각적으로 연출하는 등 좀 더 긴 이야기가 담긴 작업을 하고 싶다.

<빙하를 위한 제의>, 3D 시뮬레이션 비디오, 04분16초, 2022.

박재훈 작가.

<거룩한 묘시>, 대안공간루프 ‘눈 홉뜨기’ 단체전, 2024.

박재훈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는 디지털 조각가.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해 영상 작품을 창작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가상의 공간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뿌리에는 현실 세계의 물리적 사물과 대량생산 구조에 대한 깊은 관심이 담겨 있다. 성곡미술관, 대안공간루프, 암스테르담 브래드볼프 프로젝트 등에서 개인전을 열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INSTAGRAM @windlessroom

미디어 아트와 달라 보이는 정적인 회화 전공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미디어 아트라는 장르로 불리지만,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해 여전히 치열하게 그림과 조각 작업을 하고 있다. 다만 코가 찡긋한 테레핀 냄새와 철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없을 뿐이다. 회화가 가진 정적이면서 시간이 멈춘 듯한 매력은 매우 강력하다. 디지털 작품에도 회화의 속성들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스스로를 디지털 조각가, 시뮬레이터로 소개하는데, ‘시뮬레이션’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회화를 전공하면서 ‘재현 Representation’ 개념이 중요했다. 시뮬레이션은 재현과 비슷하지만 가상현실과 컴퓨터 그래픽 기술에 더 적합한 단어로서 공학적 용어이기도 하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인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시뮬라크르(복제품)’에도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 실재와 구분되지 않는 가상적 복제물로 대체된다고 주장한다. 회화 역시 재현을 통해 실재 너머에 있는 환상을 추구한다고 생각하며, 시뮬레이션이라는 용어가 현대 기술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적합하다고 느꼈다.
작업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디지털 그래픽 작업은 매우 복잡하다. 텍스트 리서치, 비주얼 아카이빙, 모델링, 애니메이팅, 물리 시뮬레이션, 카메라 워킹, 렌더링 등 많은 시각적 데이터 처리 과정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디지털 미디어의 특성상 비물질적이고 휘발성이 강해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실재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를 극복하려 한다.
포인트 클라우드 Point Cloud와 포토그래메트리 Photogrammetry 기술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소개해달라. 현실 세계의 사물을 디지털로 복원하고 시뮬레이션하는 여러 모델링 방식 중 하나다. 포인트 클라우드는 사물 형태를 점들의 위치와 색상 조합으로 표현하는 기법인데, 인상주의의 점묘법과 비슷하다. 포토그래메트리는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 데이터를 엮어 3D 모델을 만드는 기법으로서 입체주의의 콜라주 기법과 유사하다.
기성 데이터 소스나 오픈 소스를 활용해 작업하는 이유는? 회화 전공 후 대학원에서는 길에서 주운 레디메이드, 파운드 오브젝트를 활용한 조각적인 설치 작업을 했다. 대량 생산되고 버려지는 재료들은 현대의 생산과 소비 문화를 드러낸다. 디지털 미디어의 가상세계에서도 거대한 게임, 영화, 건축 산업의 부산물들이 오픈 소스 3D 모델로 공유된다. 이런 조악한 오픈 소스 디지털 데이터들이 현대 디지털 문명의 본질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밤을 위한 제의>, 3D 시뮬레이션 비디오, 06분35초, 2021.

<총체적 난국>, 3D 시뮬레이션 비디오, 02분44초, 2023.

<총체적 난국(거울)>, 3D 시뮬레이션 비디오, 02분44초, 2023.

<돌과 모래>, 3D 시뮬레이션 비디오, 04분44초, 2024.

<단두대가 있는 방>, 3D 시뮬레이션 비디오, 2분33초, 2023.

회화적인 느낌을 주는 프레임 요소를 작업에 활용하게 된 계기도 궁금하다. 회화를 전공하다 보니 디지털 미디어 작품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여지기 원했다. 프랭크 스텔라의 <쉐이프드 캔버스 Shaped Canvas> 작품을 좋아해 프레임의 형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기존 디지털 미디어는 이미 존재하는 TV 스크린이나 프로젝터가 가진 16:9 비율의 화면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커스텀 제작된 LED 스크린 프레임을 사용해 다양한 비율로 보여주면서 회화적 느낌을 강화하고, 평면 스크린 속 입체감을 더욱 강조했다.
<나뭇가지의 방> <황금 콘페티 방> 등의 작품처럼, 자본주의와 문명 발전의 이면을 다루게 된 계기는? 현대 사회의 구조와 그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고 싶었다. 인공 지능, 디지털 기술, 금융 자본주의가 결합되어 오늘날의 하이퍼 자본주의가 형성되었고, 그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관심이 크다. 이런 시스템을 바꾸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적어도 그 구조는 작품을 통해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다루고 싶은 주제가 있다면? 작품을 대할 때 거대한 주제보다는 하나의 사물이 주는 감각과 기억에서 출발한다. 과거에는 대량생산된 사물, 즉 인공적인 것에 집중했지만 앞으로는 자연물, 자연 현상, 우주적인 현상에 대한 주제로 넓혀가고 싶다.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작품은 무엇인가? 가상의 디지털 미디어 작품 외에 물리적 실재의 조각 작업을 준비 중이다. 실재가 없는 작품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공허감이 있었는데, 오랜 노력 끝에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해 디지털 세계에서 실재 세계로 사물을 이주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선보인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하나만 꼽는다면? <촛불>은 1시간 동안 촛불이 타 들어가는 작품인데, 어릴 때 어머니와 절에서 촛불 공양을 드리던 기억이 담겨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을 처음 선보인 곳은 기독교 영향력이 큰 이곳, 네덜란드였다. 관람객들이 기독교적인 상징과 더불어 바니타스 회화 속 해골처럼 인생의 덧없음을 드러내는 정물로 받아들였고, 그 부분이 꽤나 반향을 일으켜 흥미로웠다. 작품이 꼭 작가가 의도한 것만은 아니고, 관객들이 작품의 의미를 더욱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 작업이다.
올해 예정된 전시나 작업은? 3월 말, 2021년에 제작한 <사건의 지평선>이 네덜란드의 데 에르프라이스 De Ereprijs 오케스트라와 함께 라이브 공연될 예정이다. 또한 오는 5월에는 암스테르담 브래드볼프 앤 파트너스 Bradwolff & Partners 갤러리에서 2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12월에는 서울 WWNN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디지털 미디어 작품과 더불어 새로운 조각 작업을 함께 선보일 계획이다. 오래된 양옥의 다채롭고 유니크한 공간의 특성이 남아 있는 건물이라 멋진 디스플레이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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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ies but Goo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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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세나 멋을 좇는 대신 대상의 본질에 집중하기.
이정규 대표가 빈티지 오디오와 릴데크로 채워진 자신만의 공간을 꾸민 방법이다.

프리앰프 겸 믹서로 활용하는 스튜더 169와 962. 듣는 음악의 장르에 따라 두 가지 기기를 번갈아가며 사용한다.

이정규 대표가 조명부터 카펫, 음향 장비 등 모두 발품을 팔아 직접 구매한 빈티지 제품들.

“그 디자인이 좋아요. 60~80년대 옛날 것들의 그 투박한 디테일에 동물적으로 끌려요.” 포토그래퍼이자 식당 두 곳을 운영하는 이정규 대표에게 빈티지가 끌리는 이유를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자동차, 오토바이, 가구, 시계, 오디오, 릴데크까지. 그가 고심해서 고른 컬렉션 중 빈티지가 아닌 제품은 찾기 어렵다. 아니, 컬렉션이라기보다는 일상품이라는 표현이 맞겠다. “매일 일상에서 사용하는 것이죠. 이 기기들로 음악 틀고, 일 보러 갈 때 이 자동차나 오토바이들을 타고. 제가 모은 것들이 삶이랑 동떨어져 있지는 않아요. 그냥 생활 자체에 묻어 있는 거지.” 그러니까, 그의 성수동 자택의 거실을 빼곡히 장식한 오디오와 릴데크도 ‘컬렉션’이라는 장엄한 단어보다는 그저 취향을 반영한 일상품이란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린다는 뜻이다. 이정규 대표가 대중에겐 조금은 생소한 릴데크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음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초등학생 때부터 음악 듣는 걸 워낙 좋아해서. 음악을 듣다 보면 가장 본래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거든요. 이 소스의 근원이 뭘까 생각해보니 릴이더라고요. 그래서 스튜디오 레코딩 당시의 컨디션을 재현하고 싶었어요.” 실제로 레코딩 스튜디오를 생각하며 장비들을 세팅했다는 그는 ‘객관적인 소리’를 듣고 싶다는 이유로 방송국용 기기들로 집 안을 채웠다. 70년대 BBC에서 모니터링용으로 사용하던 로저스 Rogers 3/5A 스피커와 80년대에 제작된 린Linn의 아이소바릭 Isobarik PMS 스피커는 그중 일부. 스튜더 Studer의 보급형 릴데크 A807과 고급 모델 A812까지 두루 갖춘 그는 믹싱 콘솔 또한 두 가지를 구비해 노래의 장르와 취향에 따라 번갈아가며 사용한다. 국내 빈티지 음향 장비의 풀이 작은 만큼 때로는 베트남까지 발품을 팔아야 했지만,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객관적인 소리를 위해서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20여 대에 달한다는 빈티지 오토바이와 7대가량의 빈티지 자동차도 마찬가지. 뉴욕, 일본 등 세계 각지에 수소문한 뒤 한국으로 들여오는 수고를 감수함은 물론, 기존 소유자를 1년 넘게 설득해가며 원하던 물품을 구한 경우도 있다.

릴 데크 사용법을 보여주고 있는 이정규 대표.

거실의 소파 또한 덴마크의 70년대 빈티지 소파다.

“오디오도, 차도, 오토바이도 모두 정점에 있는 걸 좋아하거든요. 제품마다 제일 고가의 브랜드와 모델이 있을 거 아니에요? 저는 결국 제일 좋은 것, 제일 상위 클래스의 것으로 귀결하는 것 같아요.” 물건 고르는 기준을 묻자 이정규 대표는 이렇게 답했다. 오랜 기간 공들여 고가의 제품을 구매할수록 소비가 실패했을 때 오는 허탈함이 더 크지 않을지 문득 궁금해졌지만, 더 잘 맞는 기기를 만나기 위한 과정일 뿐이라 답한 그다. “그것도 경험이죠. 미국 차가 좋아서 말도 안 되게 망가진 차를 들여와 혼자 수리하기도 했어요. 이론적으로 공부하고, 누군가에게 들어서 ‘뭐가 좋다 나쁘다’를 머릿속으로 되새기는 건 아무 의미 없고 몸으로 직접 겪어봐야 돼요. 음식도 먹어봐야 맛이 있는지 없는지 알게 되듯이, 직접 다 겪어봐야 이 기기가 나랑 맞는지 안 맞는지를 알 수 있는 거예요.” 사진을 전공한 그가 음식점을 운영하는 것도 많은 경험을 거친 뒤, 자신만의 취향을 정립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다양한 곳에서 음식을 맛보며 ‘왜 맛을 이렇게밖에 못 뽑을까?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으로 시 작해서 만든 거거든요.” 필리 치즈 스테이크와 부대찌개라는 장르가 전혀 다른 두 음식이지만, 녹사평과 성수동에 위치한 두 식당은 매일 ‘진짜 맛’을 찾는 손님으로 문정성시를 이룬다. 진짜에 대해 말하는 이정규 대표의 기준은 확고하다. 유명세나 멋을 좇는 대신 본질에 집중하는 것, 두루뭉술하게 결론 내리는 대신 정확한 취향을 정립하는 것. “진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몇 안 되는 것 같아요. 기계에 빠지는 거죠. 좋아하는 음악을 더 잘 듣기 위해 기계를 사용하는 게 기본이 되어야 하는데, 정작 좋아하는 뮤지션이나 장르가 없는 경우도 허다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그를 설명할 때는 오디오 기기보다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정규 대표가 추천하는 음반.

집 안 곳곳에 놓인 소품을 통해 그의 취향과 취미를 엿볼 수 있다.

이정규 대표가 운영하는 ‘성수 부대찌개’ 매장의 뒤편에는 빈티지 바이크들을 보관한 개러지가 마련되어 있다.

CREDIT

에디터

포토그래퍼

이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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