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인정받고 있는 우리 작가들이 있다. 옻칠 공예 작가의 정해조, 거울 작가 방영철, 도예가 김혜정. 수많은 난관과 경쟁의 파도를 헤치고 해외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 3인을 소개한다.

옻칠로 빚어낸 천연 광률
우리의 전통 속에 숨겨진 기와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 정해조. 그가 만든 옻칠 작품의 신세계.

국내 옻칠 공예 분야에서 최고 장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작가 정해조. 그는 지금 유럽에서 옻칠계의 스타 디자이너로 불린다. 그간 필라델피아 크래프트 쇼를 비롯해 런던 사치 갤러리 페어와 밀라노 트리날레 디자인 전시 등 유럽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등장했던 작품은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될 만큼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정해조 작가가 옻칠을 처음 접한 것은 1969년,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다. 홍익대학교에서 디자인학과에 다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공예과 목칠 전공으로 복학했다. “당시에는 칠공예에 대한 과정이 없을 만큼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작품의 일부분에라도 옻칠을 하려면 개인적으로 장인의 공방을 찾아 다녀야만 했어요.” 그렇게 발품 팔아 만들어낸 전공 실기 과제였던 전기 스탠드가 제5회 대한민국상공미전에서 입선한 것을 계기로 그의 운명은 결정적인 전기를 만난다. 이후 옻칠의 오묘한 빛깔에 매료되어 45년간 외길을 걸으며 옻칠 공예와 생의 고락을 함께해왔다. 그의 작품은 아름다운 한국의 전통미를 풍기되 느낌과 정서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새롭게 담아낸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미끄러지듯 활기찬 곡선을 타고 힘 있는 빛깔이 요동을 친다. 빨강, 파랑, 노랑, 검정, 초록 색상은 유연한 곡선을 미끄러지듯 흐른다.
그가 주로 쓰는 제작 기법은 협저태 칠기다. 협저태라는 명칭은 삼베를 지지대 삼아 옻칠 액과 함께 굳혀가는 기법을 일컫는 것으로, 작품의 크기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가벼운 무게도 이런 이유에서 기인한다. “원시 미술을 바탕으로 만든 몸체에 오방색 옻칠을 합니다. 광택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굴곡이 있는 작품을 만든 것이지요. 빛의 난반사에 의해 광택은 살아 있는 듯 춤을 춥니다. 작품명도 빛광률, 적광률, 황록광률 등 빛을 테마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과거에는 토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선보였지만 최근에는 타재 석기와 마재 석기의 원리를 이용한 작품을 만든다. 정해조 작가는 마치 주문처럼 다짐하는 것이 있다. 잊혀져가는 옻칠 공예를 후대에 계승하고 이를 상품화하는 것. 그러기 위해 늦은 나이에 일본 가나자와 공예미술 연구소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국내 최초로 배재대학교에 칠예학과를 개설하고 옻칠데코아트센터를 설립했다. 또 자신의 고향인 충북 옥천에 수십만 주의 옻나무를 가꾸면서 그곳을 대규모 칠공예 단지로 만들기 위해 차근차근 실천에 옮기고 있다. 얼마 전에는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의 이사장인 알렉산더 폰 페게작의 주최로 열린 디자인 건축 워크숍 부아부셰에 강사로 참여해, 세계인들에게 우리 옻칠의 우수성을 알리고 돌아왔다. 옻칠을 위해 살아온 그는 옻과 하나가 되었던 세월에 녹아 있는 삶을 그대로 내보일 준비를 하고 있다.
에디터 박명주

꽃잎처럼 사뿐히, 나무처럼 단단한
흙을 빚고 가마에서 구워내 사용하는 이에게 오감으로 감동을 전하는 도예가 김혜정을 만나다.

깊고 강한 눈매를 지닌 도예가 김혜정은 런던과 일본에서 주로 활동을 해온 도예가다. 재작년 이도 갤러리에서 연 개인전 〈Carpel-心皮〉이 국내에서의 첫 전시였을 정도다. “마음을 담고 표현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나답게 걸어갈 수 있는 길. 그러다 도예의 길을 걷게 됐죠.” 도예가 김혜정은 이화여자대학교 도예과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예술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런던에서는 레지던시 생활을 하며 약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던 페어는 2004년 런던에서 열렸던 첼시 아트 페어예요. 런던 이브닝 스탠더드사가 수여하는 상을 받았는데 마침 그때 한국에서 어머니도 딸의 전시를 보기 위해 오셨었죠.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는 전시였어요.” 도쿄와 런던에서 크고 작은 전시를 진행해온 김혜정은 몇 년 전 국내로 돌아와 부모님의 집 근처에 작업실을 얻었다.
도예가 김혜정의 작품은 곱고 매무새가 깔끔하다. 백자는 담백하고, 청자는 기품이 넘친다. 컵, 접시, 볼 등 당장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도자기들은 어느 곳에 놓이든 야무지면서도 따뜻한 풍경을 만들 터였다. 특히〈Carpel-心皮〉에서도 선보인 유기적인 선의 도자기는 꽃잎이 내려앉은 듯 사뿐했지만 나무처럼 속부터 울려 퍼지는 단단함과 적당한 무게가 느껴진다. “도자기를 만드는 일은 내가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물성의 순리와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도 함께하는 작업이에요. 기대와 다른 결과물이 나오더라도 새로운 발견과 도전이 있어서 매력적이죠.” 또 도자기는 사용자가 실제로 사용할 때 매력을 느낄 수 있다고 전했다. 그래서 촉감, 사용의 편리함, 무게 등을 예민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다고. 수많은 물레 성형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도자기를 만들 때마다 도예가는 이를 사용하는 사람과 안에 담길 것을 생각한다.
도예가 김혜정은 종종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영국에서의 생활을 떠올린다. 하지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자기를 빚고 가마 곁을 지키며 불길을 바라보는 것을 중요시하는 그녀의 작업 과정은 변치 않았다. “저는 도자기를 통해 건강도 얻었고, 귀한 친구와 스승, 더 넓은 세상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어요. 그래서 행복합니다. 도예는 시간은 걸고 한번 가볼 만한 가치 있고 흥미로운 길이에요.” 도예가 김혜정은 올해 말 정소영의 식기장에서 열릴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듯 작품을 만든다는 그녀. 올겨울, 그녀의 도자기는 설원에 피어난 동백처럼 주위를 따뜻한 환희로 물들일 것이다.
에디터 신진수
거울 속에 피어난 자연
거울 위에 회화와 입체를 자유롭게 조화시키는 작가 방영철. 조명과 가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러 아트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

방영철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전시를 통해 개인 컬렉터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작가다. 그러나 거울은 생활 공간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지만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영역이다. 어떤 공간에서도 화려하게 주목받을 수 있는 크리스털 거울을 만드는 그는 프레임 없이 거울 자체의 마감만으로 작업을 하는 국내 유일의 작가다. 미술 전공자는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남다른 손재주로 천부적인 재능을 인정받아오며 거울을 만들기 전 가구와 우산을 만드는 작업도 했었다. 거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다. 백금과 은으로 도금한 크리스털 거울 위에 나뭇잎과 꽃 장식을 더해 화려하고도 우아한 거울은 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훔칠 정도로 아름답다.
“차갑기만 한 거울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었어요. 주제는 꽃과 나비예요. 진부한 얘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꽃과 나비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자연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울을 스케치할 때 자연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중첩된 대나무 숲이 거울 속으로 옮겨지기도 한다. “교토의 대나무 숲을 보고 만든 거울 작품은 특히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많았어요. 꽃과 나비가 있는 대부분의 작품도 한국인보다는 일본인들의 마음을 움직였지요”.
거울을 만드는 과정은 상당히 까다롭다. 특히 거울을 재단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가장 어려운 숙제다. 재단한 거울을 모양대로 정렬하는 작업 또한 쉽지 않다. 이렇게 만들어낸 거울은 원형, 사각형 등 다채로운 모습으로 하고 있으며, 섬세한 크리스털 오브제들로 장식된다. 그의 작품은 주로 40~50대 여성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받는다. 특히 일본 여성 컬렉터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오랜 시간 일본을 오가며 그들의 정서와 문화를 이해하고 습득한 탓도 있겠지만, 새로운 영역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낸 감성적인 작업 스타일이 무기였으리라. ”그동안 일본에 있는 크고 작은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졌어요. 특히 작년 도쿄에 있는 이시카와 갤러리에서 아주 좋은 반응을 얻었지요. 올겨울에는 오사카의 한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질 예정입니다.” 그는 거울과 함께 조명이나 소가구들도 함께 제작한다. 거울을 돋보이게 하는 소품이기도 하지만 이 또한 다양한 미러 아트의 세계를 보여준다.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한다는 작가 방영철은 오늘도 아름다운 모습을 비추는 거울을 제작하는 데 정성을 다한다.
에디터 박명주
에디터 박명주·신진수ㅣ포토그래퍼 박재형